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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Sep 17. 2024

챕터 5. 모르싸의…!(2)

5. 모르싸의…!(1)에서 이어집니다...



    묶음 머리남은 유쾌하게 흥얼거리며 나를 어딘가로 인솔했다. 이 배가 어느 정도 크기의 선박인지는 모르겠으나 크루즈 유람선같이 엄청난 크기는 아닌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작지도 않았다. 좁은 복도를 지나니 계단실이 나타났다.


    "한층 올라갈 거야."


    놈이 내게 먼저 올라가라는 듯 말하고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나는 순순히 그의 의중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네 이름이 뭐라고? 생각해 보니 우리 어제 통성명도 안 하고 같이 놀았었네."


    그랬다. 우리는 하룻밤 일행이었지만 이름도 서로 모르고 있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내 우선순위는 오직 아만다였으니까. 생각해 보니 그녀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 적은 없었지만 내 마음속에서 그녀는 이미 아만다 사이프리드였다.


    "나는 정진이야. 진이라고 불러도 좋아."

    "나는 히카르도. 자, 이제 도착했어."


    히카르도가 안내한 곳은 선내 선원들을 위한 단체 샤워실이었다. 한 번에 8명이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의 시설에는 기본적인 목욕용품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본격적인 샤워장 입장에 앞서 탈의실에서 히카르도는 내 수갑을 풀어주었다. 나는 너무나도 빨리 씻고 싶었기 때문에 후다닥 샤워실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얻어터지고 불편한 자세로 굳어 있었던 몸은 뜨거운 샤워에 녹을 것 같았다. 머리의 상처에 물이 닿자 엄청나게 따가웠지만 이내 적응이 되고 덜 아프게 샤워하는 노하우가 생겼다. 그래도 밖에서 놈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쓸 수는 없었다.

    샤워를 말끔히 마치고 나오자 놈은 기다렸다는 듯 내 상처들을 소독하고 밴드를 붙여주었다.

    뭐야, 자상하잖아?

    그러나 나는 다시 나를 다잡았다. 이놈들은 애초에 나를 납치한 악당들이었다. 더 이상의 스톡홀름 증후군은 사절이었다. 안토니의 애완견이 되었던 것으로 충분했다.

    머리를 말리고 나니 씻는 사이에 히카르도가 준비해 두었던 속옷과 옷가지들을 건네받았다. 히카르도는 윙크를 다시 날리고는 밖에서 기다린다는 말과 함께 샤워실을 나갔다.

    다시 혼자가 된 나는 잠깐의 고민에 빠졌다. 왜 이런 옷들을 주는 거지? 나를 개처럼 부려 먹을 생각이 아닌 건가? 놈들의 목적이 뭐지? 하지만 빨리 나가야 했기에 옷들부터 입었다. 친절해 보이는 저 사람도 실제로는 선량한 시민이 아니었다.

    주어진 모든 옷가지가 고급이었다. 속옷은 아르마니의 것이었고, 검은 바지와 흰 셔츠는 알 수 없는 브랜드였지만 딱 봐도 좋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신은 검정 구두는 구찌의 로퍼. 사실상 살면서 지금껏 입어본 옷들 중에 가장 비싼 것일지도 몰랐다.

    우리 집은 명품이나 사치와 거리가 먼 집안이었다. 부모님들은 물론이고 나 스스로도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물론 아직까지 사치의 맛을 못 봐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뭐든 직접 해보기 전까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담배나 마약도 그렇다. 시작하기 전에는 호기심에 한 번만 해보고 언제든 마음먹은 대로 끊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시작하게 된다.

    그나마 우리 집에서는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형이 명품을 조금 알았는데, 괜히 스스로 찔려서 여러 미팅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산다고 변명하듯 부모님께 말하던 모습이 기억났다. 형이 무슨 걱정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작 부모님은 아무 말씀 없으셨다. 나도 그랬다. 명품 옷을 입은 형의 모습이 너무 멋졌기 때문이거니와 이제 더 이상 형은 엄마에게 잡혀 살지도 않고 미성년자도 아니었다. 그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시기였다.

    옷을 입어본 나는 이 와중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내 모습이 상당히 근사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반곱슬의 긴 머리는 바다 위의 습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구불구불 컬이 들어간 상태로 흘러내려와 있었다. 이왕 하는 김에 좀 더 제대로 된 모습을 보고 싶어서 면도도 하기로 했다. 셔츠가 젖을까 봐 다시 셔츠를 벗고 세면대 앞으로 갔다. 면도를 마친 내 모습은 훨씬 어려 보였다. 피부는 타고났단 말이지.

    왜 이런 옷을 나에게 주는 걸까? 혹시 어디 음지의 매음굴로 팔려가 호스트나 남창으로 부려먹여 지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데 굳이 명품 옷을 입혀놓는 것은 뭐람? 억지로 큰 빚을 지게 만들어 탈출하지 못하고 일만 계속하게 하려는 음모일까?

    ‘히카르도, 이거 다 임대료 청구할 건 아니죠?’라고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가 이미 나가버려서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다 거울 앞에서 너무 시간을 보낸 건 아닌가 싶어서 괜히 소리쳐 밖에 있을 히카르도에게 알렸다.


    "이제 금방 나가요!"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검정과 흰색의 컬러만 사용된 심플한 아웃핏이었다. 너무 통이 좁지도 넓지도 않은 핏의 바지는 다리가 길어 보이게 했고, 살짝 여유로운 흰 와이셔츠는 어딘가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검정 나비넥타이가 하나 있으면 완벽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워실을 나가기 전에 아까 느꼈던 한낮의 뜨거운 날씨가 떠올라 팔을 적당히 걷어 올려 소매를 정리했다.

    샤워실 밖으로 나갔지만 내 예상과 달리 히카르도는 보이지 않았다.

    어라?

    혹시 몰라서 풀어둔 수갑까지 얌전히 챙겨서 나왔는데 나를 감시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알게 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마 지금이 도망의 기회인가?

    하지만 섣불리 허튼 짓은 하지 않겠다 다짐했었다. 순한 양이 되자. 그것이 상어 밥이 될 확률을 낮추는 길이었다. 손에 든 수갑을 절그럭절그럭 흔들며 옳은 길을 찾아 복도를 걸었다.

    일단 실내에서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배를 횡으로 횡단하기로 했다. 샤워실 문 앞에서 바로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보였기 때문에 헤맬 필요는 없었다. 문은 육중하고 손잡이는 뻑뻑했다. 조금 힘을 줘서 문을 열고 얼굴에 들이닥치는 바깥공기를 느꼈다. 해풍이 강했다. 방금 씻고 나와서인지 뽀송한 피부에 바람에 담긴 끈적함이 더욱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우와…"


    육성으로 감탄이 나왔다. 눈에 바로 보이는 바깥 난간을 붙잡고 바다를 보았다. 역시나 배는 정박 중인 것이 아니라 어딘가를 향해 천천히 항해하고 있었다. 지금 있는 층은 1.5층 정도는 되어 보이는 곳이었는데, 지금보다 한 층 아래인 아까의 방들은 수면과 같은 높이거나 물밑이었을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자 쉽게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 위로 사람들의 발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는 배 같았다.

    설마 반전으로 일반 여객선이나 민항선은 아니겠지? 일단 위로 올라가야 하나?

    근처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을 것 같아 배의 머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배의 끝이 금방 보일 것 같았다. 이 배의 크기는 유람선이라고 해야 할지 호화 요트라고 해야 할지 그 사이의 애매한 곳에 위치한 체급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 원작이자 영화로도 만들어진 '나일강의 죽음’의 배경이 되는 유람선 정도의 크기인 전장 60미터 정도의 길이로 가늠이 되었다.

    바로 계단을 찾은 다음 반쯤 올라갔다. 올라가자마자 배의 다른 선원과 눈이 마주쳤다. 선원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선원의 유니폼을 입었다든지 하는 느낌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설마 그냥 평범한 여객선 승객인가?

    내 의혹이자 희망은 그의 태도에 바로 사그라들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낄낄거리며 앞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난간에 기대어 있는 히카르도가 보였다. 그는 묶었던 머리를 잠깐 풀었는데, 바람에 온 머리카락들이 펄럭이는 그 느낌을 눈 감고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히카르도는 내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더니 반갑게 말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나는 또 물에 뛰어든 줄 알았잖아."

    "재수 없는 소리는 하지 마시죠."

    "이제 좀 긴장이 풀렸나 봐. 말대꾸도 하고."


    그의 말에 바로 잠시 잊었던 긴장이 다시 돌아왔지만 히카르도는 그냥 시원하게 웃었다. 그는 불안과 안심의 경계를 계속 오가게 만드는 남자였다. 그의 웃음 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려 했지만, 당연히 당장 답을 알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정말 안전한 사람일까?


    "하하하, 농담이었어 친구. 어제처럼 우리한테 편하게 해. 아, 취소. 우리 말고 나한테만."

    "퍽 도움이 되네요."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 자, 그럼 가보자고." 


    나는 어슬렁어슬렁 여유롭게 걸어가는 그를 따라 걸으며 생각했다. 대체 나를 납치해서 지금 이렇게 앞뒤 안 맞게 행동하는 이유가 뭐지? 추리를 위해 납치 전 내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눈앞이 깜깜해지기 전의 기억은 모르싸, 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내가 그들의 역린이라도 건드린 것일까? 하지만 나는 남미의 누구나가 아는 그들의 마약 여제의 이름을 잘못 말했을 뿐이었다. 답을 유추하지 못한 나는 결국 히카르도에게 물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죠?"


    히카르도는 황당하다는 듯 나를 돌아보고는 계속 발걸음을 옮기며 답했다.


    "잘못이라… 그래, 잘못이지. 아무래도 큰 잘못을 했어."

    "엑, 저는 억울해요! 제가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요!"


    히카르도가 실실 웃으면서 답했다.


    "큰 잘못이지, 아주 큰 잘못."


    우리는 다시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접어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너 어제 카타리나를 건드렸지?"


    히카르도의 말과 동시에 기억을 잃기보다 조금 더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그래, 나는 라틴 버전의 아만다 사이프리드를 꼬시려고 하긴 했다. 하지만 그녀도 좋아서 한 거라고!

그건 엄밀히 따지면 양방향의 사랑이었다.

    젠장, 혹시 아만다가 모르싸 고위 간부의 딸이거나 첩인 것은 아니겠지?

    불현듯 쿠바에 처음 와서 차메로를 다시 만나게 된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불륜 스토리에 끼게 되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케이스 모두 내가 의도한 건 전혀 아니었다.

    나도 몰랐다고! 나도 피해자야!

    속으로 억울함을 성토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잠깐만. 내가 카타리나를 건드렸다고?

    어제 머리를 얻어맞으면서 무의식 중에 떠오른 기억 하나가 있었다.


    *'... 모르싸의 카타리나…'


    그럼 아만다가(다시 말하지만 실제로 아만다가 자신을 아만다라고 소개한 적은 없었다) 모르싸의 보스였다고? 마약 여제? 아니, 그건 그렇고. 백 룸에서 서로 좋아서 물고 빨고 해 놓고 이제 와서 나를 납치한다고?

    사실 백 룸에서 분위기만 달궜을 뿐 레게머리남의 방해로 한 것도 없었다. 당시의 기억으로 돌아가자 억울함이 배가 되었지만 곧 '납치하고 싶어질 정도로 너무 좋아서 그랬나?'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납치당한 이유를 찾느라 머리에 쥐가 나려 할 무렵 히카르도는 꼭대기 층인 3층의 멋들어진 실내 라운지 입구에서 멈췄다. 


    "카타리나를 건드린 게 네가 납치되게 한 큰 잘못은 아니지만. 뭐, 그것도 맘에 안 들어하는 녀석들이 이 배에 꽤나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 그럼 뭣 때문이죠?"


    머리를 다시 묶은 히카르도가 거대한 유리로 이루어진 라운지의 문을 열며 말했다. 문은 생각보다 무거운 듯 그는 힘을 주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네가 지금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아선 안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밝은 태양광이 유리에 부분적으로 반사되어 잘 보이지 않던 내부가 문이 열리면서 차츰 보이기 시작했다. 실용적이면서도 화려한 라운지 내부에는 가운데에 결혼식장의 버진로드처럼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카펫 주변으로 과거 조선시대 대신들이 왕을 받드는 것처럼 모르싸의 부하들이 대열을 맞춰 서 있었다. 장로쯤 되어 보이는 나이가 지긋한 노년부터 한창인 시절의 중년들, 그리고 새파랗게 젊은 사람들이 골고루 섞여 있어 신구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조직으로 보였다.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어딘가 가벼운 태도의 히카르도 때문에 나도 모르게 풀렸던 마음이 이 엄중한 분위기에 압도되며 다시 긴장되기 시작했다. 카펫의 끝에는 누가 봐도 상석으로 보이는 화려한 1인용 소파가 있었다. 그 거대하고 붉은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아만다 사이프리드, 아니 모르싸의 카타리나였다. 그녀의 양옆에는 어제의 스킨헤드녀와 스킨헤드남이 그녀의 왼팔, 오른팔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안으로 걸음을 옮기던 히카르도가 문이 열리고 꿈쩍 않는 나를 뒤돌아봤다. 정말로 저 앞으로 가기 싫었다. 안 움직이냐는 그의 눈길에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던 나는 마지막 애원을 했다.


    "제가 뭘 알겠어요. 저 진짜 아무것도 몰라요.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제발 말 좀 잘해주세요. 모르싸에 대한 것도 진짜 모르싸라는 조직의 이름이랑 인터넷 위키피디아 요약란에 나올 정도로만 알고 있다구요."


    히카르도가 내게로 돌아왔다. 그는 나직이 한마디 하고 걸음을 멈춘 나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그의 억센 손아귀 힘에서 보통의 사람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우리 여왕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거든."


    그의 한마디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나는 그에게 끌려가다시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싸 여왕의 이름을? 그런데 그 이름은 너무 유명해서 카리브해의 코흘리개들도 알지 않나? 모르싸의 카타리나. 바로 저기 앉아 있는 여인의 이름. 그녀의 이름은 누구나 알고 있다.

    나는 그렇게 히카르도에게 붙들려 레드카펫을 걸었다. 마치 결혼식장의 신부가 아버지와 함께 입장하는 꼴이었다. 나는 가녀린 신부, 히카르도는 신랑에게 딸을 넘기는 아버지. 그렇다면 신랑의 역할은 카타리나의 몫이 된다. 그녀는 파라이소에서의 청순하고 밝은 모습은 어디 간 데 없이 오만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가 가까워지자 한 다리를 꼬았다. 화려한 차림의 치마와 부츠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내 마음은 뒤돌아 라운지의 출구를 향해 달리고 있었지만, 현실 속 나는 결국 그녀의 앞까지 도착해 버렸다. 그녀가 어제의 상큼한 미소로 인사했다.


    "안녕? 잠은 좀 잘 잤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그 순간에도 눈동자가 굴러가 로비의 구석구석에 총을 든 그녀의 부하들이 보였다. 말실수라도 하면 총알에 벌집이 되는 걸까. 카타리나 뒤의 스킨헤드남녀도 권총 홀스터를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아마 실탄이 장전되어 있겠지. 그들은 잔인하기로 유명한 멕시코 카르텔 중에서도 가장 악명을 높이는 모르싸들이다.

    나는 그녀를 더 이상 기다리게 하면 안 될 것 같아 억지로 입을 뗐다.


    "안녕… 카타리나."


    그녀는 씨익 웃었다.

    아, 예쁘긴 하네.

    밝은 곳에서 보는 그녀의 미소는 색다른 매력을 풍겼다. 이 와중에도 그녀의 매력을 느끼는 내가 미웠다.


    "그래, 내가 카타리나야."


    쾅!

    갑작스러운 굉음에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로비의 문이 굳게 닫히는 소리였다.


    "자, 그럼 진짜 우리들 밖에 없으니까…"


    그녀의 말에 주변을 살펴봤다. 사면의 바다를 통해 보이는 것은 망망대해뿐이었다. 도망갈 곳은 깊은 바닷속뿐인 완전한 감옥.


    "저, 정말 우리들 뿐이네, 하하…"

    "그래 정말 우리들 뿐이야."


    그녀가 꼬고 있던 다리를 갑자기 풀었다. 잔뜩 겁먹은 나는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도 흠칫했다. 바람의 앞의 등불이라도 된 것 같았다. 딱딱한 표정으로 바뀐 그녀는 엄숙히 선언하듯이 말했다.


    "그럼 진짜 모르싸의 여왕을 소개할게."


    미국에서 영어를 익힌 다음 한 번도 영어를 못한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돈을 받고 번역할 정도로 나는 영어에 있어서 프로였다. 그러나 그 순간은 내 영어 실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모르싸의 진짜 여왕? 이 진지한 분위기에 얼빠진 소리로 '그거 너 아녔어…?'라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의미심장하게 말을 마친 카타리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요염한 자태로 왕좌의 뒤로 걸어갔다. 짧은 거리였지만 관능적인 캣워크 같은 그녀의 걸음이 눈에 띄었다.

    그럼 저 빈 왕좌에 앉는 진짜 여왕은?

    카타리나가 뒤로 빠지자 왕좌의 왼편에 서 있던, 여전히 위아래로 우락부락한 스킨헤드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스킨헤드녀는 카타리나가 비워준 자리 앞으로 갔다. 그녀는 호랑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사냥꾼처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착좌에 무겁고 크게 울리는 소리가 라운지를 채웠다. 거구의 그녀가 주는 위압감은 예쁘장한 카타리나가 주는 것과는 다른 장르의 것이었다.

    그녀는 카타리나가 했던 것처럼 다리를 꼬더니, 무릎 위에 팔을 올려 턱을 괬다. 짙은 스모키 화장이 되어있는 커다란 눈으로 나를 조용히 바라봤다. 사자 앞의 생쥐가 된 느낌이었다. 몸이 얼어붙는 느낌과 함께 또 다른 기억 하나가 그제야 떠올랐다. 그것이 어제의 진짜 마지막 기억 조각이었다. 내가 무심코 말한 여왕의 진짜 이름.


     "안젤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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