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내가 안젤리카다."
그녀는 어제의 수줍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위엄 있는 정복 여왕의 형상으로 내 앞에 있었다. 위엄은 목소리에도 짙게 서려 있었다. 나는 지금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고민했다. 안젤리카와 모르싸들은 그런 나를 가만히 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운지에는 음악만이 흐를 뿐이었다.
그 순간, 내가 아직도 바보처럼 손에 수갑을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를 원망했다.
이 멍청아, 이런 건 아까 샤워실에 두고 왔어야지. 이걸 왜 들고 와서.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누군가가 왕을 알현하는 웅장한 장면에서 알현 자의 손에 수갑이 채워진 것도 아니고, 그냥 덩그러니 수갑을 들고 있는 장면은 없었다. 보통은 적국의 포로로 잡혀 온 일당백의 장군이, 온몸이 포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글거리는 눈으로 왕을 노려보는 장면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일당백의 장군도 아니었고, 적국의 왕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 포박되기는커녕 무슨 액세서리나 선물이라도 되는 양 수갑을 덜렁덜렁 들고 왔으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안젤리카가 이 수갑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전에 처리를 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는 동작 중간에 슬쩍 주머니로 넣는 작전을 세웠다. 나는 시선의 분산과 작전을 수행할 손의 여유 공간을 위해 과장된 동작으로 무릎을 꿇으며 수갑을 엉덩이 주머니에 잽싸게 찔러 넣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제발 한 번에 들어가라!
하지만 내 둔탁한 손재주 때문인지 주머니에는 수갑의 한쪽 고리만 제대로 들어갈 수 있었고, 반쯤 들어가다 말고 도로 흘러나온 나머지 한쪽은 동네 똥개의 꼬랑지처럼 밖으로 덜렁거리고 있었다.
망했다…!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충분히 눈치챘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뻔뻔함을 발휘해 실수에 동요한 티를 내지는 않았다.
내가 무릎을 꿇자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앉은 자세로 발을 까딱까딱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여왕은 아무 말이 없었기 때문에 들리는 것은 라운지의 클래식 음악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기분과 흘러가고 있는 상황을 읽고 싶었지만, 차마 그녀를 쳐다볼 용기가 없어서 그녀의 흔들리는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살려주십시오!"
이 공간의 누구도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울려 퍼진 애원이었다. 장내가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와 비웃는 소리로 잠깐 들썩였다 가라앉았다. 한 박자 늦게 안젤리카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웃음이 신호라도 된 듯 다들 마음 놓고 웃는 시간을 가졌다. 개중에서는 억지로 쥐어짜 낸 날카로운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웃음이 잦아지고 그녀가 말했다.
"내가 왜 널 죽이겠어."
귀가 번쩍 뜨인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정말인가요?"
턱을 괴느라 가운데로 모인 그녀의 우람한 어깨가 강조되어 그녀는 마치 전설 속 바위거인으로 보였다. 잘 단련된 근육들과 타고난 장사 체형의 그녀는 직접 전장을 진두지휘하는 전사의 이미지가 강했다. 트로이 전장을 누비던 헥토르와 아킬레우스. 코끝에 있는 피어싱 때문인지 스페인의 검은 투우를 떠올리게도 만들었다.
"그래, 정말이야. 내가 너를 죽일 생각이었으면 너는 진작에 물고기 밥이 됐겠지. 바다 청소부들이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네가 알면 놀랄 거야."
침을 꿀꺽 삼켰다. 나를 죽일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나를 납치한 그들의 목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내 신분을 조회하고 내 모든 연고를 끊었다. 나를 마음대로 다룰 모든 조건들을 얻었다.
"내 이름… 어떻게 알고 있었지?"
그놈의 빌어먹을 이름!
나는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억울함이 담긴 나머지 말의 속도도 빨랐다.
"제가 여왕님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날 유명한 ‘카타리나’라는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았고 '카'라는 글자가 있었던 것만 기억났었는데, 제가 그날 술집에서 허풍을 떠는 바람에 뭐라도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카’가 들어간 아무 이름을 뱉는다는 것이 하필 그게 여왕님의 이름을 골라버려서…"
"그래 네놈이 안토니 앞에서 모든 것을 실토하는 것을 봤어."
나를 감시하던 부하들과 그들이 설치한 카메라가 생각났다. 카메라를 설치한 이유가 바로 그녀에게 보고를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네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나는 재빨리 머리를 다시 조아렸다. 코가 바닥에 닿을 듯 숙인 나머지 바닥 카펫의 붉은 직물 올올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안 죽인다고 말했잖아.”
그녀의 냉랭한 목소리가 내 정수리에 꽂혔다. 혹시 자꾸 같은 말을 하게 만든다고 그녀가 화를 내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들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른 말을 이어갔다.
“지금 우리가 아주 큰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거든. 보안 유지에 필사를 기하고 있는 와중에 하필 네가 가장 중요한 비밀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내 정체를 술집에서 떠들어댄 거지. 대외적으로 모르싸의 여왕은 카타리나지만 그녀가 한낱 선전용 인형에 불과하다는 것은 지금 여기 이 공간의 사람들 밖에 모르는 일인데 말이야. 그런 기밀을 처음 보는 동양인이 하바나의 제일 유명한 술집 한가운데서, 그것도 우리 앞에서 보란 듯이 말한 거야.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놀랐겠어?"
그제서야 한 조각 빠져 있는 퍼즐처럼 모호하던 그들의 동기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모르싸면 멕시코 여러 카르텔들을 모두 흡수한 초거대 집단이다. 멕시코 전역의 수많은 조직원들에게도 비밀인 내용이 외국에 있는 동양인 남자 하나가 알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살짝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요즘에 우리가 준비하고 있다는 그 일 때문에 말이야, 이게 좀 스케일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큰 건이라 미국이 언제 냄새를 맡고 개입할지 모르거든. 미국은 좀 성가셔. CIA니 FBI니 하는 놈들 말고도 웬 듣도 보도 못한 조직들까지 총을 들고 설쳐대고, 인종이란 인종들은 깡그리 모아 놓고 훈련시켜서 여기저기 숨어있는 그놈들을 찾아 색별 해내는 것도 힘든 일이란 말이야."
"저는 결백합니다! 믿어주세요."
그녀는 드디어 의자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나와 높이를 맞추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 그녀는 대형견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믿어. 믿는다니까? 네가 아무리 미국 출신에 우리가 방문할 하바나에 있었고,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그녀와 몸이 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기운만으로도 사람을 복종시키는 기세를 가지고 있는 그녀. 감히 그녀 왕좌의 진위를 의심할 수 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살인 집단 모르싸의 대장이었다.
나는 벌벌 떨며 물었다.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그녀는 '푸후훗'하고 웃더니 말했다.
"너는 이제 내 손에 길러질 거야."
"네…? 제가요? 길러지다뇨?"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그녀는 다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째서인지 그 손길에 더욱 개를 어루만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 본 네 모습이 마음에 들었거든. 너는 이제 내 애완견이자, 노리개. 그리고 내 애인이자 남편이고, 시종이다. 넌 내 거야."
좆됐다. 또다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파라이소에서 그녀가 내게 보냈던 관심 어린 눈빛이 기억났다. 나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아까 위성 전화로 지인들에게 전한 내용들이 떠올랐다.
'5년 동안 배를 탈 거 같아요.'
나를 살려두더라도 이들은 나를 가까운 시일 내에 풀어줄 생각이 없다. 아무래도 나처럼 잡혀 온 노리개들이 내가 처음은 아니었겠지? 내가 몇 번째일까? 다들 얼마나 버티다가 폐기처분 되었을까? 갈 때는 곱게 보내줬을까?
연달아 떠오르는 끔찍한 의문과 상상들 속에 정신을 놓고 허우적거리는 나를 두고 그녀가 일어서며 말했다.
"자, 내 방에 너를 위한 근사한 개집을 마련해 두었다. 너는 앞으로 매일 밤 나와 함께 잘 거야. 지금 보니 엉덩이에 귀여운 꼬리를 달고 있던데. 그런 취향도 나쁘지 않지."
그녀가 내 엉덩이에 달려있는 수갑을 툭 쳤다. 안젤리카가 나를 보고 애완견 타령을 하고 있는 와중에 마침 내 엉덩이에 강아지 꼬리처럼 달린 수갑이 괜히 원망스러웠다.
윽, 뒷주머니 말고 앞주머니에 넣었어야 했나? 그럼 적어도 강아지 꼬리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텐데.
하필 또 수갑은 페티시적인 느낌도 드는 아이템이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방 안내는 카타리나가 해줘."
그녀의 지시에 왕좌 옆에 서 있던 카타리나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자, 그럼 다시 돌아가 보자고."
안젤리카가 손뼉을 두 번 짝짝 치며 원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카타리나는 안젤리카에게 자신이 서 있던 자리를 양보하고는 다시 빈 왕좌에 앉았다. 자리 이동을 마친 그들은 성격도 다시 뒤바뀌어 있었다. 아이돌 같은 완벽한 비주얼의 여왕과 그녀의 우락부락하고 과묵한 경호원.
나는 그 어이없는 장면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이 정도의 치밀함이라면 그들의 비밀이 지금까지도 잘 지켜지고 있다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자리에 앉은 카타리나는 방금의 공손함은 어디 가고 다시금 도도한 아름다움을 뿜어대는 여왕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착석하자 라운지의 문이 다시 열리고 바깥사람들이 알고 있는 모르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