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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Sep 19. 2024

챕터 7. 인형

    7. 인형




    나는 아만다 사이프리… 아니, 카타리나의 뒤를 따라갔다. 또각또각거리는 그녀의 검붉고 굽 높은 부츠 소리가 최면술사의 회중시계 초침 소리 같아 거기에 맞춰 내 정신은 안도와 불안 사이를 1초마다 오갔다. 붉은 카펫의 끝을 지나 사탄과 악마들의 접견지 같던 라운지 밖으로 다시 나올 수 있었다. 문을 나오니 아까는 그냥 지나친 실외 라운지도 눈에 들어왔다. 처음 히카르도와 왔을 때에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 다시 보니 좌우가 탁 트인 이 공간에도 음료 바와 파라솔, 테이블 등이 조금 마련되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영락없는 유람 요트였다.

    해가 지기 시작했는지 바다와 하늘의 색이 변하고 있었다. 평소의 나라면 '우리 잠깐만 멈추고 노을 구경이나 하다 갑시다'라고 제안했겠지만, 지금 그랬다가는 노을 구경은 고사하고 바로 저승 구경을 하러 보내질 것 같았다.

    카타리나는 내가 올라왔었던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 지나쳐 그대로 계속해서 배의 뒤편으로 걸어갔다. 모르싸에서 가장 높은 여왕의 방인만큼 아무래도 배에서 가장 높은 층인 3층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야외 라운지를 가로질러 다시 맞은편의 선실 복도로 들어갔다. 출입문을 열자 보인 것은 여왕의 방이 아닌 아래층과 비슷한 구조의 복도였다. 계속해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카타리나에게 말했다.


    "저는 문을 열면 바로 여왕님의 방이 나올 줄 알았어요."


    카타리나는 내 질문에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정지에 잔뜩 쫄아버린 나의 가녀린 심장이 크게 철렁했다.

    이거 말하라는 허락이라도 받고 말했어야 했나?

    급히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안젤리카가 나에게 말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린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허락 없이 말하지 말라는 금지 역시도 시키지 않았었다. 그 짧은 순간 ‘손을 들고 발언권을 먼저 얻은 다음에 말할걸’ 같은 후회들을 하고 있는데 카타리나가 무심한 눈으로 나를 뒤돌아보고 대답했다.


    "이제 살만한가 보네. 질문도 다 하고."


    굉장히 무미건조한 어투였다. 안젤리카도 그렇고 카타리나도 그렇고 파라이소에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두 모습 중에 무엇이 그들의 진짜 모습일까?


    "아뇨, 그냥 내가 느끼기에 그쪽은 아무래도 다른 분들보다 마음이 편하다…랄까요? 나랑 좀 더 가깝지 않을까 싶어서."


    말을 하면서 자연스레 어제 파라이소 백 룸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녀와 나눴던 짧았지만 뜨거운 기억은 이 상황에 괜스레 민망함을 불러왔다. 비록 그들이 정체를 속이고는 있었어도 적어도 백 룸에서 그녀와 나누었던 감정은 솔직했다고 믿고 싶었다.

    괜한 말을 꺼냈나?

    나는 혹시 카타리나가 역정을 내면 어쩌나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녀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별 말없이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화라도 난 건가? 이러다 총이라도 맞는 거 아냐?

    나는 그녀의 주머니에 혹시나 암살용 소형 권총 따위가 들어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뒤태를 열심히 살폈다. 그러다 그녀의 몸에 타이트하게 붙는 검정 반바지의 라인이 참 육감적이라는 생각하고는 스스로 뺨을 때렸다.

    미친놈 아냐!

    물론 친 쪽은 오른쪽 뺨이었다. 안토니에게 얻어맞은 왼쪽 뺨은 아직도 아렸다.


    한 번 꺾어 들어간 복도를 따라가니 금방 또 계단실이 보였다. 이미 최고층이라 더 올라갈 곳이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한 층 더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카타리나는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를 따라 한 층 올라간 계단 끝에는 복도 없이 바로 문이 하나 보였다. 내가 다 올라오기를 기다린 카타리나는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문으로 나타난 것은 통창으로 연결된 테라스를 가진 5성급 호텔 스위트룸 같은 공간이었다. 영화 타이타닉에 나온 특실처럼 고풍스러운 느낌은 아니었지만, 모던하고 트렌디한 감성으로 꾸며진 공간이었다.


    "우와…"


    멋진 공간에 작게 탄성이 나왔다. 카타리나는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를 따라 들어가며 방문을 닫았다.


    "여기가 여왕님의 방이야."


    거대한 사각형의 라지 킹사이즈 침대가 침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침구는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원래 같으면 다짜고짜 침대에 뛰어들어 온몸으로 쿠셔닝을 확인했겠지만 지금은 그러기에 영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네가 지낼 개집이기도 하지."

    "저도 여기서 잔다고요?"


    나는 혹시 침구가 더 있나 방을 두리번거렸지만, 이 침대 하나를 제외하면 없었다. 이외에 침구로 쓸만한 것들은 길쭉하거나 짧은 길이의 소파들과 창가 근처에 설치된 해먹 하나가 있었다.

이 중에서 나 같이 보잘것없는 존재가 몸을 누일만한 곳이라면 아무래도…

    나는 손가락을 펴 해먹을 가리켰다. 카타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마 침대로 자주 부르시겠지."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나를 침대로 부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흑표범 같은 안젤리카가 침대 위에서 벌벌 떨고 있는 나를 잡아먹는 모습이 그려졌다.

    순간 유치원을 다닐 때 내 장래 희망을 그리며 역할 놀이를 했던 기억을 꺼내 보았다. 그 시절의 나는 미래에 내가 지구 반대편에서 멕시코 카르텔에게 납치되어 성노예가 될 거란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반 친구들 앞에서 ‘장래 희망 : 성 노리개’라고 써놓은 프레젠테이션을 해맑게 발표하고 있는 어린 날의 내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일단 대화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억지로 에너지를 끌어올려 약간 들뜬 목소리로 이것저것 물었다.


    "저기 안쪽에는 드레스 룸 공간도 있어 보이네요? 여기 테라스는 또 어떻게 나가죠? 밖에 수영장도 있네요!"


    카타리나는 말없이 통창 한쪽에 마련된 유리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습하고 더운 바닷바람이 방으로 밀려들어 왔다. 나는 굉장히 넓은 공간의 테라스로 나갔다. 아마 테라스의 바닥 아래로 아까 지나온 복도가 있을 것이다. 요트의 3층 옥상 부분에 여왕의 침소가 자리를 잡고 있는 모양새인 것이다. 이곳은 배의 루프탑 라운지 같은 곳이었다. 넓고 호화롭기도 했지만, 가장 높은 곳인 만큼 배 안의 어느 곳에서도 여기를 엿볼 수 없어 굉장히 프라이빗한 공간이기도 했다. 이곳을 훔쳐보기 위해서는 선실의 벽면을 기어올라와 난간에 매달리는 방법뿐으로 그런 미친 짓을 이곳에서 할 사람은 없을 듯했다. 그들은 안젤리카를 ‘여왕님’으로 부를 만큼 신봉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곧장 발걸음을 테라스의 시설들로 옮겼다. 호화로운 테라스는 폭신한 쿠션들이 깔린 벤치는 물론, 파라솔 딸린 선베드와 길이 7m 정도의 작은 개인용 풀도 갖춰져 있었다.

    테라스를 가로질러 끝의 난간까지 갔다. 내가 자유롭게 움직여도 카타리나는 나를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난간에 양손을 올리고 기대었다. 아래로 아까 안젤리카를 알현했던 실내 라운지로 추정되는 공간이 보였다. 내가 퇴장하고 선내 집합 명령이 해제되었는지 흩어진 조직원들에 의해 배의 여기저기가 다시 시끌시끌해졌다. 대부분이 스페인어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나에 관한 이야기의 비중이 상당하리라 짐작할 수 있겠다.

카타리나가 내 옆에 와서 섰다. 침실에 올라와서 이것저것 물으며 대화했더니 그새 그녀에 대한 경계심이 좀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죠?"


    그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여왕님의 남자로 살아가게 되는 거지. 여왕님이 너에게 질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렴."

    "당연히 거부… 할 수는 없는 거겠죠?"

    "그런 게 궁금했으면 아까 여왕님 앞에서 물어보지 그랬어."

    "당신도 여왕이잖아요."


    카타리나는 피식하고 웃었다. 무표정하기만 하던 얼굴에 작은 웃음꽃이 피었을 뿐인데 어제의 사랑스러웠던 모습이 조금 돌아왔다. ‘그래도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에 나는 왠지 안도가 되었다.


    "여왕이 맞으면서도 아니기도 하지."


    문득, 그녀가 이런 위치를 받아들인 이유가 궁금했다. 무엇 때문에 가짜 여왕의 역할을 하는 것일까. 위험을 담보로 얻는 부와 명예 때문일까? 그렇다고 그녀가 그다지 자유로울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안젤리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 아닌가?


    "왜 하고 있는 거예요?"

    "무엇을 말이지?"

    "여왕의 인형 말이에요. 혹시… 나처럼 납치당했던 건가요?"


    말을 하고 보니 굉장히 가능성이 높은 가설이라 생각했다. 나처럼 납치 혹은 인신매매를 통해 이곳에 끌려와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면 살기 위해 무엇이든 못하랴. 그녀도 나와 같은 처지였기에 어제 파라이소에서 서로에게 통하는 무언가를 느낀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녀에게서 돌아온 것은…

    짝!

    그녀는 내 뺨을 쳤다. 안토니의 전문적이고 매콤한 그것에 비하면 속도가 아주 느렸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따귀의 진행 방향으로 틀어 충격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그래도 하필 다시 왼뺨이었다. 비록 소리만 요란한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겨우 아문 입 안의 상처를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내 충성심을 얕보지 마라. 내 목숨은 여왕님의 것이야."


    나는 뺨을 부여잡고 시무룩해져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곳이야.

    모르싸란 곳은 여왕이란 유일신을 따르는 사이비 광신도 집단일지도 몰랐다. 다들 지독히 미쳐 있었다.

    카타리나는 급하게 시무룩해진 나를 보더니 또 피식 웃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더욱 울상을 지었다. '직접 때려놓고 웃기는 또 왜 웃어' 등의 불만들이 솟아올랐지만 속으로만 구시렁댔다. 또 맞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다 기분이 풀린 카타리나의 표정을 보았다.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도 나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 ‘이게 왜 이러지?’하는 표정이었다. 풀어진 분위기에 겁이 사라진 내가 한마디 툭 던졌다.


    "뭘 봐요?"


    전혀 예상치 못한 나의 한마디가 그녀의 무언가를 건드렸는지 카타리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8초가량 웃음을 멈추지 못하더니 내 따귀를 한 대 더 날리는 것으로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번에도 반사적으로 피한 덕분에 그리 아프지 않았고, 어제와 같은 그녀의 웃는 표정을 조금 더 볼 수 있어서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그래도 입안에서 찝찔한 피 맛이 다시 느껴지는 것만은 좋아지지 않았다.)

    그사이 해가 많이 떨어져 본격적인 일몰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 주변을 뒤덮은 파랑 위로 노랑과 빨강이 덧입혀졌다. 하바나의 내 비밀 담벼락에서 보는 것과 다른 맛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은 잡혀 왔다는 서러운 마음도 잠시 잊게 하고 넋 놓고 그것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나를 따라 카타리나도 일몰을 감상했다.


    "일몰 좋아해요?"

    "싫어하지는 않지."


    카타리나가 다시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가냘프면서도 힘이 있는 매력적인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이 배는 어디로 가는 중이에요?"

    "당분간은 카리브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거야. 하바나가 그 첫 장소였고. 우리가 그냥 놀러 간 거는 아니었거든."

    "아, 멕시코 의대생들의 방학 여행 말이죠? 결국에는 멕시코 본토로 가겠죠?"

    "더 이상 귀찮게 질문하지 말고 이제 저녁을 먹으러 가야 한다는 것만 알아둬."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괜히 거슬리게 했다가는 또 뺨을 맞을지도 몰랐다. 그것도 필시 또 왼쪽을.



    만찬 참석을 위해 우리는 다시 방을 나섰다. 방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가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쪽은 어디서 지내요? 여기도 방을 호실로 구분하나요? 아무래도 카타리나가 가진 조직에서의 위치를 생각하면 품위유지를 위해서 301호 정도쯤은 되려나?"


    카타리나는 모처럼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답했다.


    "펜트하우스."


    이 배의 펜트하우스라면? 아까 여왕의 방 밖에는 없었다.


    "아… 룸메이트였구나. 잘 지내봐요, 우리. 그나저나 침대는 하나밖에 없었는데요? 혹시 해먹이 원래 그쪽 차지였나?"

    "나는 침대에서 자. 여왕님과 함께."


    내 예상을 깨버리는 답이었다.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대답을 듣자마자 아까의 침대 위에서 안젤리카와 카타리나가 난잡하게 뒹구는 장면을 떠올렸다. 아니지, 둘이 같이 붙어먹기보다는 카타리나가 여왕의 안위를 위한 도구니까 사무적으로 침대 양편에 한 명씩 얌전히 누워서 자는 것으로 상상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래, 이쪽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그래도 확인할 것은 확인해야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혹시 두 분이 연인 사이인 건가요?"


    물어보면서도 혹시나 모를 따귀 공격에 대비해 목과 어깨를 긴장시켰다. 학습 능력이 있는 인간이라면 말하다 말고 따귀를 얻어맞는 것을 2회 정도 겪다 보면 3회째는 피하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가 해괴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답을 듣지 않아도 이미 표정으로 답을 한 것 같았다.

    3층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앞에 두고 누군가 문을 먼저 열었다. 문을 연 것은 레게머리 남이었다. 이 자식의 얼굴을 보니 처음 배에서 눈을 떴을 때의 굴욕적인 감정이 기억났다.


    "아, 여기 있었군요. 여왕님이 여왕과 애완견이 조금 늦는 것 같다고 확인해 보라고 하셔서요."

    "보다시피 지금 가는 중이었어. 같이 돌아가면 되겠네, 마르코."


    레게머리의 이름은 마르코였군.

    녀석은 이번에도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슥 훑어보고는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싸가지없는 그의 태도에 '거참, 앞으로 같이 지낼 사이인데 좋게 좋게 웃으며 지내면 안 되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내가 이미 모든 걸 내려놓고 이곳 생활에 적응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한동안 하바나에 머물다 보니 잊고 있었지만 내 인생에 지독하게 얽힌 방랑벽이 다시 도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 하바나도 어차피 떠날 때가 됐었을지도 몰라.

    나는 어느 나라에 몸을 던져도 악착같이 적응하고 살아남아 왔다.

    범죄조직의 일원이 되어보는 것도 이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어. 그리고 이왕 들어갈 거면 강력한 조직에 들어가는 것이 안전하지 않겠어?

    긍정 회로를 너무 돌린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내 놀라운 적응력의 비밀이 바로 이런 긍정적 사고방식이었다. 지옥에 떨어져도 한 줌의 좋은 점부터 찾아낸다.

    나는 마르코와 카타리나에게서 한 발짝 뒤떨어져 걸었다. 둘은 딱히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때문에 뒤에서 둘을 관찰하며 둘의 관계를 유추해보려 했던 것은 무위로 돌아갔다. 새로운 조직에 들어갔을 때 사람 간의 관계도를 파악하는 것은 적응에 상당히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핑계로 열심히 카타리나의 육감적인 뒤태를 관찰하다 보니 금방 내부 라운지에 도착했다. 라운지 내부는 아까와 다르게 일반적인 식음업장 같은 배치로 변경되어 있었다.

    라운지 안의 분위기는 허락된 사람 말고는 입도 뻥긋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아까와 달리 지금은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흡사 실제 레스토랑이나 호텔 라운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안쪽에 안젤리카가 4인용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마르코는 인사를 하고 다른 방향으로 떨어져 나갔고, 나와 카타리나는 안젤리카의 테이블로 향했다. 식탁에는 3인분의 식기 세팅이 되어있었다. 안젤리카는 테이블의 왼쪽에 앉아 있었는데, 나는 남은 가운데 자리와 오른쪽 자리 중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카타리나가 먼저 가운데에 앉았고 자연스레 나는 남은 자리인 안젤리카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우리 3인의 첫 식사가 시작되었다.


    “방은 어땠어?”


    안젤리카가 식전주로 나온 샴페인을 한입 맛보며 말했다. 아까의 고압적인 모습과 다르게 상당히 캐주얼한 분위기의 대화였다. 그녀를 따라 샴페인을 맛보려던 나는 급히 잔을 내려놓았다. 

    뭐라고 대답하지?

    정말 훌륭하신 취향입니다. 마침 제가 살고 싶어 하던 공간이라 생각했습니다. 침대 스프링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짧은 순간 만들어진 많은 답변 중에 내가 고른 것은.


    “네, 너무 좋던데요?”


    무난한 내 대답에 안젤리카는 만족스러운 듯 작게 웃었다. 아이방을 잔뜩 꾸민 후에 갓 입양한 아이에게 방을 소개하는 부모의 기분이 저렇지 않을까. 황소 같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파라이소에서의 소녀 같은 느낌도 완전한 거짓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저런 부분을 더 공략해서 파고든다면 내 생활도 내가 바라는 방향대로 조금씩 바꿔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더 좋아질 거야.”

    “와, 정말 기대되네요.”


    그녀의 말은 샴페인도 목에 걸릴 정도로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그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어떤 식으로 더 좋아진다는 말이었는지 분석을 해보고 있는데 내 의문을 덮어버리는 전채요리가 나왔다. 메뉴는 공교롭게도 문어 카르파초였는데, 내가 하바나를 떠나온 날 차메로가 오늘의 메뉴로 준비했던 메뉴라 눈물이 핑 돌았다.


    “입에 안 맞아?”


    안젤리카가 내 눈이 촉촉해지는 것을 보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아뇨, 맛있어요.”



    우려와 달리 저녁 식사는 무난하게 끝났다. 음식들은 훌륭했으며 안젤리카와의 대화도 많지는 않았지만 전부 일상적인 수준의 것들이었다. 그녀도 아까 왕좌에 있을 때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마치 수줍어하는 상대와의 소개팅 자리 같달까. 식사가 끝날 때까지 옆을 지킨 카타리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안젤리카는 내게 먼저 방에 가서 쉬고 있으라고 했다. 모르싸 주요 인원들의 소개와 배 내부 구경은 내일부터 천천히 하게 될 것이고, 오늘은 간단히 주의해야 할 점들만 안내받았다.

    당연히 외부와의 접촉을 시도할 경우는 바로 즉결 처형이었다. 그런 험악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을 보면 조용한 소녀 같은 면을 보이기도 하는 그녀였지만 본성은 범죄조직의 리더란 것을 잊지 말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녀의 허락을 받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방으로 돌아가는 길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는 길에 냉장고에서 차가운 탄산수 한 병을 챙기는 여유도 부려보았다. 내가 단독으로 움직이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험상궂은 남자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앞으로도 절대 익숙해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재빨리 라운지를 떠났다.

    마주치는 사람은 식사 때보다 적었지만 라운지 밖에서도 나는 여전히 그들의 시선을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편하게 바람을 좀 쐬고 싶었지만, 어서 위에 올라가서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간절했다. 위에 올라가면 나에겐 혼자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안젤리카의 개인 테라스가 있었다.

    아까 카타리나의 에스코트를 받았던 경로를 잊지 않고 방으로 무사히 도착했다. 3층 구조는 아래층과 달리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나 자신도 내가 지금 생각과 느낌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군입대 훈련소 입소 후 부대에서 맞는 이튿날 아침 같았다. 마찬가지로 눈앞에 닥쳤으니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화장실을 찾아 찬물에 세수했다. 방 안에 구비된 화장실도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는데, 더블 싱크 구성의 세면대는 금장의 수도꼭지를 가지고 있었다. 거울 속에는 말쑥한 옷차림의 남자가 하나 보였는데, 아까 옷을 갈아입으며 신나 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나도 참 대단해. 그 상황에서도 기분을 낼 수 있었다니.


    바람을 느끼기 위해 테라스로 나가기로 했다. 카타리나가 했던 것을 떠올리며 벽 쪽에 붙은 곳에서 손잡이를 찾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아까처럼 바람이 강하게 불어 들어왔다. 문을 그대로 열어두고 밖으로 나갔다.

달이 짙은 구름 속에 숨어있는 밤하늘 아래의 바다는 정말 어두웠다. 벤치에 털썩 앉았다. 가만히 있으니 파도의 파고가 느껴졌다. 비슷한 울렁임이었지만 수면 아래의 선실에 묶여 느끼는 것과 야외 수영장 옆의 벤치에서 느끼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답 없는 고민을 시작했다.

    마침내 짙은 구름의 바다를 뚫고 달이 밖으로 나왔을 때, 방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방의 주인들이 돌아온 것이었다. 안젤리카와 카타리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잠시 잊었던 불편도 함께 돌아왔다.

후, 별 수 없지.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끝까지 살아남자!

    나는 퇴근하고 돌아오는 주인을 맞이하는 집 지키는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그들을 반겼다.


    “오셨어요?”



    나는 몸을 웅크리고 숨죽여 울먹였다. 수갑을 찼던 손목에 아직도 자국이 남아 아렸다.

    이 빌어먹을 놈의 수갑은 진작에 버리고 왔어야 했는데!

    씻을 준비를 하려는 안젤리카가 수갑을 발견하고 재미있는 것을 찾았다는 표정을 지었을 때의 공포감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불이 꺼진 방의 그녀는 수줍은 모습은 오간 데 없는 거친 모습의 한 마리 야수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열정을 받아낼 수밖에 없는 인형이었다. 그녀는 겉과 속이 모두 근육질로 가득한 에너지 덩어리였고 쉴 새 없이 나를 쥐어짰다.

    방 안에서 우리가 절정과 쾌락의 반복을 거칠 때, 또 하나의 인형 카타리나는 테라스 밖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내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격렬한 움직임을 가져가고 있던 와중에도 문득문득 눈에 들어온(채광 좋은 통창이라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정말 잘 만들어진 하나의 인형과 같았다. 어느새 하늘을 가득 채운 달빛 아래의 그녀는 바다를 보고 있기도 했고, 한순간에는 우리를 바라보기도 했고, 또 다른 순간에는 하늘을 보고 있기도 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조심히 몸을 돌려 안젤리카의 침대를 확인했다. 해먹에서 몸을 움직이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무게중심을 이동시켜 해먹이 뒤집어져 바닥으로 떨어진다거나 하는 일 없이 그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전라의 두 여인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와 안젤리카의 성공적인 합방이 완료되자 카타리나는 방으로 돌아와 안젤리카와 마찬가지로 모든 옷가지를 벗은 다음 곧 잠에 빠지려는 그녀의 옆자리에 누웠다. 카타리나는 잠을 자는 모습도 인형 같았다.

    두 여인 모두 잠버릇이 고약하지 않은 듯 조용히 쌕쌕거리며 숙면을 하고 있었다. 내 예상과 달리 둘은 따로 몸을 비비거나(?) 하지 않고 얌전히 잠자리에 들었는데, 둘의 거리가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것이 딱 가족이 유지하는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보이는 둘의 잠자는 모습에 나는 카타리나의 모르싸 입단 첫날밤은 어땠을지 궁금해졌다. 그녀도 이 특이한 환경에 조금은 떨었을까? 나는 그녀의 첫날밤을 상상해 보며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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