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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Sep 20. 2024

챕터 8. 카타리나

8. 카타리나



    나는 늘 그랬듯이 놀라운 생존력으로 새로운 삶에 적응했다. 물론 자유 시민의 삶이 아닌 인간으로서 중요한 무언가를 박탈당한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나의 빼어난 적응력이 본연의 임무를 다하기 시작했기에 납치된 나에게도 조금씩 일상이란 것이 생겨났다.

    커튼을 치고 잔 날은 느지막하게 기상하여 안젤리카의 그날 기분에 따라 내려가서 밥을 먹거나 룸서비스로 올라온 아침을 먹는다. 가끔 커튼을 치는 것을 잊고 자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는 통창을 통해 무자비하게 내리쬐는 강렬한 햇살에 우리 3명 모두가 강제 기상해야 했다.

    안젤리카와 카타리나는 테라스로 나가 아침 햇살 아래에서 종종 요가와 맨몸운동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요가 매트 위에서 코브라 자세를 거쳐 물구나무를 서는 그들의 모습은 요가에 관심이 전혀 없던 나조차도 요가에 대한 경외와 관심이 생길 정도였다. 잘 관리된 그들의 몸과 건강한 구릿빛 피부가 더욱 건강해 보였다. 더욱이 안젤리카는 속이 꽉 찬 근육과 그 놀라운 유연성에 나를 한 번 더 놀라게 만들었다.

    언젠가부터는 그들의 건강한 아침을 이불속에서만 보고 있기에 죄책감이 들어 나도 그들과 동참하기로 했다. 하바나에 있었을 때도 가게 뒷마당의 차메로가 쓰는 운동기구들을 종종 사용하곤 했었다. 나는 요가나 스트레칭과 거리가 멀었다. 굳이 따지면 맨몸 운동에 가까운 웨이트 운동이 주종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배에서 그런 운동에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는 곳은 이 팔자 좋은 루프탑 테라스가 아니었다. 카르텔 전투원들이 잔뜩 타고 있는 이곳에는 필연적으로 남자 땀내 나는 체력단련실이 있었다. 그러나 그곳을 가득 채운 문신 마초남들과 아직은 데면데면한 사이였던 터라 적당한 무게의 덤벨 한 짝과 푸쉬업 바 한 쌍을 들고 방으로 도망치듯 돌아왔다.

    그들 중 한 명이 체단실 밖으로 기구를 반출하는 나를 붙잡았는데, 왜 몰래 기구를 반출하냐 따져 묻는 녀석에게 전부 여왕님의 심부름이라고 대충 둘러대자 그들은 나를 통과시켜 줄 수밖에 없었다(실제로 이 여왕님의 심부름이라는 핑계는 이 배에서 놀이공원 자유 이용권 같은 만능 프리패스 티켓이었는데, 부엌으로 가서 ‘여왕님의 심부름’으로 여러 군것질거리들을 빼내 올 수도 있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서 동정심 같은 것도 얼핏 보였다. 그들 눈에 나는 마치 남성성이 거세된 강아지 한 마리로 보이기라도 하는 걸까. 견종을 따지자면 절대 사냥개 종류는 아닐 테고, 포메라니안이나 말티즈, 잘 쳐줘도 대형 푸들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침에 우리 셋은 일렬로 서서 각자의 운동을 했다. 하늘을 가득 메운 햇빛은 바다에 반사되어 더욱더 강하게 내리쬐었는데, 안젤리카가 아직 내 피부가 하얀 것이 더 좋다고 하여, 운동하기 위해서는 아침 댓바람부터 선크림을 발라야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아침부터 피부에 선크림을 얹는 것은 조금 번거로운 작업이었지만, 여왕의 명령으로 선크림이 다음 섬에서 왕창 공수되어 부족한 것도 아니었고 확실히 아침부터 몸을 움직이면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안젤리카는 처음에 내가 걱정한 것보다는 나를 겁박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난 기간이 너무 짧은 시간이라 믿기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처음 배에서 정신을 차린 날 왕좌에 앉은 그녀 앞에 엎드려 애완견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그녀가 내게 은빛 스파이크가 박힌 가죽 개목걸이나 목줄을 채우고 옷을 헐 거 벗긴 채로 온종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었지만, 그녀는 첫날 보인 압도적인 위엄에 비하면 내게 상당히 상냥한 편이었다(물론 다른 모르싸들을 대할 때나 나와 둘만의 밤 시간에는 황소로 돌변했지만.) 낮에 내가 따로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부잣집 팔자 좋은 고양이나 강아지의 삶과 비슷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 악랄한 카르텔 일당들은 나를 태우고 캐리비안의 여러 곳을 항해했다. 어떤 목적에서인지 콜롬비아의 바랑키야,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퀴라소 등을 바쁘게 오갔다. 배가 정박해 그들이 육지로 떠날 때는 나를 배에 내버려 두고 갔는데, 그동안은 배의 인원 절반 정도가 빠지기 때문에 내 숨통이 훨씬 트이는 시기였다. 나는 그때마다 방 밖으로 나가 산책을 즐기곤 했다.

    그들에게는 선내 게시판에 벽보를 굳이 붙여놓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여러 암묵적인 규칙들이 있었는데, 항구에 정박했다 출항하거나 외부 접촉이 있었던 뒤 24시간 동안 안젤리카와 카타리나의 위장을 철저히 유지하는 것도 그것 중 하나였다. 24시간이 지나면 배 전체에 알람이 울리는 것으로 카타리나는 가짜 왕좌에서 내려와 안젤리카에게 모든 위엄을 양보했다. 이 위장이 활성화된 시기에는 카타리나는 누가 봐도 여왕이었고, 안젤리카는 그녀의 충실한 경호원이자 수행원이었다.

    그들의 소름이 끼치는 역할극을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이 배우 지망생들이었나 하는 의심을 하곤 했는데, 실제로 안젤리카의 옷방 한쪽에는 다양한 가발들도 구비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안젤리카가 짧은 스킨헤드 스타일을 고수하는 이유 중 하나는 머리가 짧으면 가발을 쓰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이유는 카타리나와 안젤리카가 함께 서 있으면 거친 인상과 스타일의 안젤리카가 일개 모르싸 부하 중의 한 명으로 100% 동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인형같이 작고 오밀조밀한 카타리나 옆에 우락부락한 스킨헤드의 안젤리카는 누가 봐도 그녀의 숱한 수행원이나 보디가드들 중 하나처럼 보였다.


    이제 스스로 배를 제법 돌아다니게 된 나는 점심도 해결할 겸 방 밖으로 나와 선내 산책을 하고 있었다. 배의 1층 난간에 잠깐 기대어 서서 밥 먹고 뭐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아는 체를 했다.

    종종 나를 비웃는 모르싸들이 지나치며 악의적으로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 일 없는 듯 지나쳤다. 들어오는 시비에 대한 무시라는 방법은 긴 기간 외국 생활을 해본 동양인이라면 아마 모두가 숙지하고 있는 가장 효율적인 대처방안일 것이다. 한국을 떠나 서방 국가로 간다면 아무리 선진국을 가더라도 곳곳에서 크고 작은 인종차별을 겪을 수밖에는 없는데, 가장 좋은 대처법은 맞대응이 아닌 무시였다. 이는 가장 속 후련한 방법은 분명 아니었지만, 속 후련함을 좇는 선택을 했다가는 뒤따를 여러 부수적인 일들의 처리가 굉장히 귀찮거나 곤란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확, 여왕한테 일러바쳐?

    이런 충동이 일다가도 도저히 이후 상황을 예측할 수 없었으므로 늘 해오던 대로 무시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평소처럼 툭 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 뚜렷하게 나를 부르는 제스처였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돌아봤다.


    “아, 히카르도!”


    그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반갑게 인사했다. 다행이었다. 묶음 머리남 히카르도는 그날도 머리를 멋들어지게 묶고 근사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때, 지낼 만해?”

    “네, 적응이 빠른 편이라.”


    히카르도는 내 옆으로 와 난간에 기댔다.


    “왜 이번에는 여왕이랑 같이 안 내렸어요?”

    “여기 푸에르토리코에는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히카르도가요? 누구예요?”


    히카르도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답변을 피했다. 포획되어 온 한 마리 짐승에 불과한 나와도 서글서글하게 지내는 그가 피하는 사람이 다 있다니. 표정을 보니 어지간히 골치 아픈 사이인 것 같았다.


    “그냥 개인 가정사라 생각해. 그나저나 너는 여왕 따라서 육지로 가고 싶은 생각 없어? 배에만 너무 오래 있다 보면 육지 생각이 나기 마련이거든. 뭐, 적어도 나는 그렇단 말이지.”


    히카르도의 말처럼 오래간만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 구경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당장은 온전히 혼자서만 보낼 수 있는 시간을 더 확보하는 것이 더 필요했다. 거기다가 여기 푸에르토리코에는 차메로 밑에서 함께 일 한 페르난도가 아직 머무르고 있을 확률이 있었다. 괜히 나갔다가 그를 마주치게 되면 그와 차메로의 신변에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지나가는 나를 발견한 그가 현장에서 내게 아는 척을 하거나 험악한 인상의 무뢰배들과 돌아다닌다는 내 목격담을 하바나로 돌아가 차메로에게 전할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래도 그의 말마따나 위아래로 흔들리지 않는 육지도 그리워지고 있던 차라 다음 정박 때는 나가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왕들과 한방에서 사는 건 어때?”

    “음, 상상하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걸요?”

    “내 상상이라…”


    히카르도는 잠깐 고민하더니 나를 불렀다.


    “이봐, 정진.”

    “네?”

    “여왕님의 총애를 받는 자네에게 주제넘을지 모르지만 내 충고 하나 하지. 여왕님은 무서운 사람이야. 자네가 가늠하고 있는 것보다,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잔인할지도 몰라. 아니, 분명 그럴 거야. 그녀가 걸어온 피의 길을 나는 모두 지켜봤어. 그러니 항상 염두에 두고 살라고. 절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고.”

    “아, 조언 감사해요.”


    히카르도와는 그렇게 짧은 회포를 더 풀다가 헤어졌다. 그는 선원들 사이에 밤마다 맨 위층의 펜트하우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열띤 토론이 벌어진다고 했다. 누구는 안젤리카가 짐승처럼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고도 했고, 누구는 내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고도 했다. 또, 누구는 매일 밤 우리 셋이서 질펀한 플레이를 하는 것이 뻔하지 않냐고 주장했다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마르코에게 된통 얻어맞았다고도 했다.

    그러나 확실한 건 내가 배에 들어오고 안젤리카의 성격이 많이 누그러졌다는 의견에는 모두가 동의했다는 것인데, 내가 느껴온 안젤리카는 그리 싸이코 같은 성격이 아니어서 조금 의아했다. 그러나 히카르도가 헤어지며 전한 끝까지 잘 부탁한다는 응원을 듣자 확실히 그녀에게 온화한 변화가 있긴 한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나 때문에 평화를 얻은 놈들이 왜 지나가는 나를 툭툭 건드리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괘씸한 놈들. 고맙다고 말해도 모자랄 판에.



    히카르도와 헤어지고 방으로 돌아가려던 무렵 항구 쪽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소리를 따라 이번에는 반대 방향의 항구 쪽 난간에 붙어 소란의 원인을 찾았다.

    각자의 임무를 위해 하선하여 배의 보급과 기타 볼일들을 보러 흩어졌던 모르싸들이 한꺼번에 여기저기서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이 동시에 복귀하는 모습은 꿀벌들이 집합 명령을 듣고 벌집으로 모여드는 모양새였다.

    무, 무슨 일이지? 섬 전체를 날려버릴 만한 시한폭탄이라도 작동시키고 오는 길인가?

    여기저기서 모여드는 인파는 갈림길에서 한 점으로 모이더니 곧 모두 배를 향해 다가왔는데, 처음에는 그 모양새가 성난 폭도들처럼 보이기도 해 반란이라도 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안젤리카의 폭정을 참다못해 들고 일어선 것인가!

    그들이 충분히 가까워졌을 때 나는 이 소란의 원인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군중의 맨 앞에는 피를 흘리는 카타리나가 안젤리카의 부축을 받고 배로 귀환하고 있었다. 그 뒤쪽에는 피떡이 된 한 남성이 함께 실려 오고 있었다.

    카타리나! 젠장,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재빨리 배의 갑판으로 향했다.


    내가 갑판에 도달했을 때 그들이 배에 무사히 올라온 것이 보였다. 카타리나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혈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발길을 따라 핏방울들이 흩뿌려졌다. 나와 마주친 그녀의 두 눈은 고통스러운 듯 흔들렸다.

    카타리나는 바로 배의 의무실로 이송되었다. 다행히 배에는 늘 모든 혈액형의 수혈팩과 수준급의 주치의, 의료 장비들이 있었고, 총상은 그들의 의사가 가장 많이 처치하는 종류의 상해였다. 만약 그가 모르싸를 관두고 외부 병원에 취직한다면 총상의 임상 전문가로 걸출한 논문도 몇 편 써내는 외과계의 권위자가 되어 의료계를 호령하리라(그러나 그가 사임 의사를 비춰도 모르싸가 그를 얌전히 내보내 줄지는 미지수다.)

    상태로만 따지면 뒤따라 실려 온 남자의 상태가 훨씬 안 좋았었는데, 그는 카타리나와 함께 의무실로 실려 가는 대신에 안토니와 함께 배의 낮은 층으로 보내졌다. 나는 그가 이 사건의 범인임을 직감했다. 또한 안토니가 나를 심문했던 때처럼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란 것도 알 수 있었다.

    안젤리카는 이 난리를 구경 중인 나를 발견하자 당장 방으로 올라가라고 살벌하게 윽박질렀다. 평소 낮 시간대의 그녀가 내게 보인 수줍음은 찾아볼 수 없었다. 히카르도가 내게 했던 충고가 떠올랐다. 나는 그녀의 호통이 끝나자마자 대답도 않고 바로 달리듯 그 자리를 빠져나와 방으로 직행했다. 그 모습이 조금 겁쟁이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별 수 없었다. 안젤리카와 카타리나는 해가 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배는 급히 푸에르토리코를 떠나 바다 한가운데로 갔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멍하니 소파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아까의 장면이 머리에 자꾸 맴돌았다. 피가 이리저리 튄 모습들과 반죽음이 되어있던 남자의 모습이 내게 강한 자극이 되었다.

    곱게 자라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피는 내게 너무 강한 자극이었다. 그제서야 내가 정말로 범죄조직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너무 평화롭고 편안한 일상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 현실감을 잃었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마르코와 카타리나가 서 있었다. 카타리나는 마르코를 돌려보냈다. 그는 왜인지 그녀의 말을 곱게 따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에는 돌아내려 갈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끝내 벌렸던 입을 다물고 뒤로 돌았다.

    카타리나는 멀뚱멀뚱 지켜만 보고 있는 나를 불렀다.


    “보지만 말고 여기 와서 이것 좀 들어줘.”



    그제야 마르코가 들고 온 링거 스탠드가 보였다. 마르코가 계단을 내려가고 혼자 남은 그녀는 힘겹게 스탠드에 기대어 겨우 서있었다.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는 역시나 몸이 불편한지 표정을 찡그리고는 나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침대에 누웠고 나는 링거 스탠드를 그녀의 옆에 설치했다. 링거 스탠드의 아랫부분에는 넉넉한 수납공간이 있었고, 스탠드에는 심전도 모니터가 설치되어 그녀에게로 몇 줄기 전선들을 뻗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고 물었다.


    “좀 괜찮아요? 병실에 있지 왜 올라왔어요?”


    카타리나는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며 답했다.


    “그냥, 여기 있는 게 더 좋아서.”

    “제가 뭐 도울 것은요?”

    “혹시나 내가 잠들어 버리면 너는 자지 말고 여기 주사제가 잘 떨어지는지 잘 봐줘. 잔량이 얼마 안 남았다 싶으면 여기 무전기로 바로 의사를 불러.”

    “네, 그리고 다른 건요?”

    “그리고 이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울리거나 내 체온이 비정상적으로 치솟아도 똑같이 의사를 불러줘.”

    “이럴 거면 차라리 병실에 있는 게 더 낫지 않았어요?”

    “여기나 거기나 별 차이 없어.”


    하긴, 이 좁은 배 안에서는 어디에 있든지 처치의 손길이 도달하는 시간이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내가 24시간 대기할 수 있는 여기가 위급상황에 대처하기 더 쉬울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데 체온을 가늠해 보며 물었다.


    “수술을 한 거예요?”

    “맞아, 싸구려 발터 권총이었어. 내 왼쪽 어깨뼈에 박혀 복합골절을 일으켰다는데, 다행히 그 정도가 복합골절 치고는 심하지 않았나 봐.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서 깨어난 후 조금 쉬다가 여왕님의 허락을 받고 올라왔어.”


    복합골절? 이름만 들어도 아픈 느낌이 드는 부상이 아닌가?

    그녀가 조금은 가쁜 숨을 뱉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숨결에는 열감이 가득했다. 방이 조금만 더 추웠다면 하얀 입김이 나올 듯했다. 그녀가 아픈 몸으로 침대에 녹아드는 데에는 몇 분의 시간이 걸렸다. 이리저리 뒤척여가며 몸이 아프지 않고 편안한 자세를 찾아갔다. 나는 카타리나가 침대에 자리를 잡은 후에 그녀가 이만 편히 쉴 수 있게 소파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그녀의 손이 떠나가는 내 손을 잡았다.


    “여기서 계속 내게 말을 해줘.”

    “네…?”

    “무서워, 잠들면 다시는 눈 뜨지 못할까 봐.”


    나는 그녀의 요청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모습은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의 올리비아 핫세가 로미오의 칼로 자신을 찌른 직후의 모습과 같았다. 가녀린 모습으로 그런 대사를 하는 그녀를 뿌리칠 수 있는 남자는 세상에 없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나는 별수 없다는 듯 다시 자리에 편하게 주저앉으며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요, 나 여기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는 지금껏 나눈 대화 중에서 가장 긴 대화를 나눴다. 사실 파라이소 이후에 그녀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적이 많이 없었다. 내가 안젤리카의 남자가 된 것이 문제인지 배에 오른 다음 그녀는 나와 필요 이상의 교감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 제한을 둔 것 같았다. 하지만 수술을 마치고 몽롱한 약 기운에 그녀 자신을 온전히 다잡지 못하고 있는 지금은 그런 제한들이 저절로 해제된 것처럼 보였다. 아픈 카타리나에게는 미안했지만 내게는 지금이 오히려 더 좋았다.

    그녀는 파라이소 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농담할 때마다 그녀는 아픈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 활짝 웃었으며,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거리는 좁혀져 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사실 대화의 공백이 생기면 그녀 쪽에서 다음 대화를 재촉했다. 대화가 잠깐 끊기고 찾아오는 무음의 공백이 두려운 것 같았다. 그녀는 작게 떨면서 내 손을 꽉 쥐거나 아무 화제를 던졌다. 카타리나는 죽음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 보이는 걸까? 마치 마지막이 오더라도 아쉬움을 남기지 않고 떠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가 두려운 것은 죽음 그 자체일까 아니면 그녀의 삶에 어떤 한 부분일가?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의사가 처치와 처방을 제대로 하긴 한 것 같았다. 조금씩 차분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나는 한숨 돌린 그녀에게 늘 궁금해하던 것을 물었다.


    “섬에 내렸는데 멸망시켰던 카르텔의 잔당이 복수를 위한 암살 시도를 가했다고요? 푸에르토리코에 미리 잠복해 있다가? 대체 왜 이런 위험한 자리에 앉아있는 거예요? 심지어 그 카르텔 멸망이란 것은 본인이 주도적으로 한 일도 아니잖아요?”

    “내 목숨은 여왕님의 것이니까.”

    “또 그 대답이네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목숨을 그분이 살려주셨어. 그러니 이 목숨은 그분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옳아.”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관심 없어요. 심지어 당신이 ‘첫 번째’ 카타리나도 아니라면서요?”


    그녀는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맞아, 나는 ‘두 번째’ 카타리나야.”


    나는 기가 막혔다. 그녀는 너무나 태연했다.


    “여기에서 살다 보니 듣게 되었어요. 왜 남미 사람들에게 모르싸의 카타리나는 죽여도 죽지 않는 괴물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지. 처음에는 단순히 극악무도한 모르싸의 이미지가 그녀의 이미지를 과장되게 만든 것인 줄 알았어요. 사람을 산 채로 벗겨먹는 불사의 악마.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요. 신격화. 그리고 실제로 그녀가 이뤄낸 업적들도 대단하니까요.”


    나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한 박자 쉬었다 말했다. 그녀는 단지 계속해서 희미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맙소사 인간 대역이라니. 정말 놀랍지 않나요? 어떻게 하면 그런 잔인한 방법을 떠올릴 수 있는 거죠?”

    “그냥 보디가드 같은 거야. 세계의 주요 인사들 모두 경호원을 가지고 있잖아. 그녀의 안전을 위해 내가 그녀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야.”

    “먼저 죽어 나간 첫 번째 카타리나도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물론 그녀도 기쁜 마음으로 죽었을 거야.”

    “당신이 죽기 직전에도 그렇게 느낄 거라 확신해요?”


    나는 카타리나의 몸과 머리가 펄펄 끓던 아까의 상태를 떠올리며 물었다. 정말 자신이 죽음을 태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 사람도 동물이고 동물에게는 생존 본능이라는 강력한 본능이 있는 것이다.

    그녀는 아까 자신의 모습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대답했다. 마치 오래전 스스로에게 지독한 최면을 걸었던 것처럼. 잠깐 풀렸던 최면은 다시 그녀를 지배했다.


    “빈민촌에서 죽어가는 나를 그녀가 살려줬어. 다행히 내가 첫 번째와 똑 닮았기 때문에 그녀가 나를 거둬들였지. 그리고 나는 이 역할을 다하며 그만한 보상도 받아. 빈민가에 살다 부모의 손에 직접 인신매매단에 팔려 가 인간답지 못하게 사는 것보다 여기서 거짓이라도 여왕의 삶을 사는 것이 더 좋은 조건 아니야? 당장 이 방을 둘러봐. 그 마을에 있었더라면 내가 이런 곳에 발이나 들일 수 있었을까?”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은혜를 입어 보은 한다. 그래도 사람의 본연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시간이 지나 감사의 마음이 무뎌지기 시작하면 본인의 행복을 다시 찾고 싶어 질지도 모르는데. 허나 애초에 자유를 모르는 그녀에게 자유는 필요가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내가 그녀에게 약간의 자유를 알려준다면?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어요?”


    대답을 기다리는 나의 손을 그녀가 먼저 잡으며 물었다. 그녀의 체온은 여전히 나보다 뜨거웠다. 평소라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내 걱정을 해주는 거야?”

    “그... 그건.”


    진심으로 걱정되니까 걱정하는 거죠.

    답이 명확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몸이 안 좋은 와중에도 또롱또롱한 눈을 만들어 나를 쳐다보는 카타리나의 모습은 반칙에 가까웠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을 손바닥으로 덮어 버리며 말했다.


    “세 번째 카타리나가 구해지기 전까지는 그쪽이 건강해야 하니까요.”


    그녀가 얌전히 눈이 가려진 채로 말했다. 내 손아래로 보이는 입만 움직이는 모습이 제법 귀엽다고 생각했다.


    “아, 다행히 얼마 전에 세 번째를 구해서 훈련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어. 다행이지.”

    “뭐야, 심지어 이미 구했어? 그리고 뭐가 또 다행이에요?”

    “다행이지. 우리가 준비하는 거사는 매우 위험할 거야. 그러니 여왕님을 위해 세 번째는 물론, 네 번째도 준비를 해놓으면 좋을 거야.”

    “그게 무슨…”


    나는 그녀를 덮었던 손을 치웠다. 그러다 지근거리에서 그녀와 눈이 딱 하고 마주쳤다. 남녀 사이의 묘한 기류 속 한순간 스파크 만들어내는 정적이 흘렀다. 나와 편하게 떠들다 보니 그녀의 입술에 혈색이 조금씩 돌아와 있었다. 그녀도 분명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 것 같았다. 왜냐하면 지금 이 상황이 지금이 처음이 아니니까. 카타리나는 파라이소 백 룸에서의 눈과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여왕에 대한 최면은 분명 이전보다 약해졌다.

    그녀의 열감이 나에게도 전염된 것 같았다. 그녀의 뜨거운 숨과 나의 뜨거운 숨이 섞였다. 나는 그녀에게 점점 다가갔다. 그녀도 눈을 감았다.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확실히 그녀는 평소와 달랐다. 나는 그녀의 변화를 이용하기로 했다. 두 입술이 닿았다.

    쾅!

    그때 선실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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