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과격하게 열리고 그 틈으로 성난 안젤리카가 방으로 들이닥쳤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더니 카타리나에게 소리쳤다. 다행히 그녀의 짜증 섞인 외침은 우리의 밀회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나와 카타리나는 문이 열리는 굉음에 반응해 안젤리카의 시야에 들어오기 전에 다시 거리를 적당히 벌린 상태였다. 카타리나의 심박수도 언제 그랬냐는 듯 안정 심박수 범위로 돌아와 있었다.
“왜 병실에 있지 않고 여기로 올라온 거야! 박사가 수술이 잘 됐어도 안정을 취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잖아.”
거친 호통이었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것은 걱정하는 마음이었다. 카타리나는 안젤리카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닥터 허쉬펠트도 허락했어요. 그리고 저는 여기, 여왕님의 방이 더 안정을 취하기에 좋아요.”
“그래, 정 그러시다면.”
안젤리카는 툴툴거리며 내가 앉은 곳 옆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떤지가 궁금했다. 제발 자연스러워야 할 텐데. 도둑이 제 발 저린 표정은 아니길 빌었다.
“우리 자기가 돌봐주고 있었어?”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나를 부르는 호칭은 ‘자기’로 바뀌어 있었다. 덕분에 더욱 바람을 피우는 남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어서 괜히 뜨끔했다. 최대한 차분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대답했다.
“네, 물론이죠. 이것도 제가 설치했어요.”
나는 잽싸게 뒤의 링거 스탠드를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말했다. 안젤리카는 그런 나를 와락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그 우악스러운 힘에 나는 종이인형처럼 힘없이 끌려가 그녀의 품 안에 들어갔다. 탄탄한 그녀의 몸이 나를 빈틈없이 꽉 졸랐다. 분명 포옹이었지만 포박에 가까운 압력으로 숨이 턱 막혔다.
“내가 이래서 자기한테 첫눈에 반했나 봐. 자기는 참 다정해.”
그녀가 이 방에서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모르싸들의 눈이 있는 곳에서의 나는 그녀의 연인보다는 시종에 가까웠다. 카르텔의 보스로 산다는 것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외롭고 지킬 것들이 많은 것일지도 몰랐다. 회사의 호랑이 부장님이 가정에 돌아가면 가족들 앞에서 재롱잔치를 벌이는 사랑꾼인 모습을 회사 부하들에게는 숨겨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그녀의 가장 깊숙한 비밀 속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니 특별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것에 따르는 무게감은 일반인이 감당할 것이 아니기에 해방되고 싶다는 생각이 뒤이어 들었다. 나 같은 일개 한량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짐이었다. 나는 아무런 부담 없이 둥둥 떠다니고 싶은 사람이니까.
그녀는 내가 마치 10살 때 가지고 놀던 거대한 토끼 인형(그녀가 10살 무렵 가지고 놀았던 것이 FN57 자동권총일지도 모르지만)인 것처럼 더욱더 세게 끌어안더니 결국 내 이마에 뽀뽀까지 했다. 그 순간 피 냄새가 확 느껴졌다. 동시에 몸을 휘감는 긴장감과 함께 소름이 돋았다.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으로 아까 함께 배에 실려 온 남자가 떠올랐다. 피 냄새의 주인공은 카타리나의 한 어깨를 박살 낸 그 남자겠지. 그가 당했을 꼴을 보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 박살 난 카타리나의 어깨보다 더 박살이 났을 것이다.
“환자 앞에서 좀…”
그녀의 따스한(?)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며 말했다. 안젤리카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싶었던지 나를 풀어주고는 침대에 왼쪽 팔꿈치를 올려 머리를 기댔다.
카타리나가 물었다.
“뭐 좀 더 나온 게 있어요?”
“콜롬비아 놈들인지 멕시코 잔당 놈들인지 처음엔 좀 헷갈렸는데, 결국엔 영혼까지 털어내 다 알아냈지. 우리에겐 안토니가 있잖아?”
그녀는 자기 손톱들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누에보 잔당이었어. 누에보 놈들은 상대할 때도 성가셨는데, 망하고 난 다음에도 끝까지 괴롭히네. 한동안 너무 밖으로만 다녔나 봐. 이제 외부 일정을 마치고 본토로 돌아가면 이런 일이 다시없게 멕시코 내부 정리를 싹 다시 해야겠어.”
누에보? 무슨 과자이름이야?
누에보가 무엇인지 전혀 관심이 없는 나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할 내용에도 그냥 뭔가가 있나 보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선도 대화를 나누는 둘에게서 거둬 침대 위에 걸린 그림을 보는 등, 무관심함을 최대한 나타내고 있는 표정을 지었지만 안젤리카는 그런 내 노력이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정확히 반대로 매우 궁금한 표정이라고 여기고는 내 무릎에 손을 척 올리며 말했다.
“이제 자기에게 설명을 해줘야 할 것 같기도 하네.”
“뭐, 뭘요?”
“우리의 원대한 계획을.”
나는 오늘 벌어진 피 냄새나는 일을 보면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결심한 표정을 보니 얼마나 원대한 계획인지 모르겠다만 그 원대한 것을 그만 꼼짝없이 알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역시나 내가 거절할 틈도 없이 그녀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그냥 강아지로 사는 것이 내 타입에는 더 맞는데…
“우리는 전례에는 없던 것들을 할 거야. 바로 멕시코 카르텔의 총 통합과 수도 멕시코시티로의 진출.”
배경지식이 전무한 나는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너무 대단한 것을 말하는 느낌이라 입을 떡 벌리며 굉장히 놀란 표정을 지어주었다. 모르싸면 이미 멕시코의 카르텔들을 다 휘어잡은 것 아닌가? 그럼에도 더 나아갈 단계가 남아있는 것인가? 그런 내 리액션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의 이야기에도 탄력이 붙어 더욱 열심히 설명을 이어갔다. 나는 두 귀를 막고 싶었다.
“너도 들어는 봤겠지만 카르텔의 통합은 내가 이미 이뤘어. 긴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은 모두 우리에게 항복했지. 특히나 베라크루즈 출신의 우리 모르싸를 무시했던 북부 놈들의 배를 갈랐을 때의 느낌이란!”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그날의 쾌감을 곱씹었다. 그러다 카타리나의 꼴을 보고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덕분에 이런 일이 생겨버렸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카타리나가 재빨리 말했다. 안젤리카가 기운 없는 카타리나의 손을 쓰다듬었다. 내 안위를 위해 두 검지 손가락을 양 귀에 처박고 싶었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새 호기심이 생긴 내가 그녀의 설명을 재촉했다. 이는 마치 멕시코의 근현대사 수업과 다를 게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멕시코시티로의 진출?”
“그래, 내 아버지의 평생소원이기도 했지. 아버지는 멕시코 정계에 돈을 수없이 뿌리셨어. 그래도 사업을 하면서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완벽하게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었지. 정권이란 게 계속 바뀌기도 하고 외부의 간섭도 있다 보니까. 거기다 우리에게 가끔 총구를 겨누는 멕시코 방위군의 문제도 있고 말이야. 유일하게 대형 카르텔이 진출하지 못하는 곳이 바로 멕시코시티야. 우리는 멕시코 시티 밖에서는 왕이지만 마지막 퍼즐 하나가 모자란 거지.”
“그러면 방법을 찾은 거예요?”
“방법? 찾았다면 찾았지. 우리는 힘으로 수도를 함락할 거야.”
“힘…이요?”
“그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힘. 우리는 모든 카르텔들을 통합했어. 카르텔들의 왕은 멕시코의 왕이나 다름없지. 하지만 오직 멕시코시티를 제외한 곳에서는 말이야.
우리는 자격이 있고 능력이 있어. 베라크루즈는 우리가 이미 완벽하게 운영하고 있거든. 베라크루즈 시장의 월급도 우리가 따로 챙겨주지.
이미 우리가 가진 멕시코 전역의 모든 군수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했어. 각국의 군사 전문가들을 영입해 체계적인 훈련도 진행했지. 우리는 탱크를 앞세워 순식간에 밀고 들어갈 거야.”
나는 그제야 감이 조금 잡히기 시작했다. 범죄조직이 군수공장을 돌려서 전쟁을 준비한다고? 우리나라 조폭들이 저기 경기도 안성 언저리 공장에서 나라를 전복시키겠다며 군수품을 찍어대는 모습을 상상하자니 우스꽝스러웠지만, 여기는 그런 것이 가능한 곳, 바로 멕시코였다.
“지금 내전을 말하는 건가요?”
“속전속결. 우리의 해답은 기습작전이야. 전격전! 그래서 더욱 보안에 신경을 쓰고 있는 거지.
그러다 자기가 이렇게 걸려들어 여기 붙잡혀 있는 거고, 우리가 이렇게 정신없이 카리브 해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도 작전과 관련된 일 처리들 때문이야. 문제는 미국인데… 미국 정보부가 낌새를 차려 이를 알린다면 결국 전쟁은 길어지겠지. 그전에 내 모가지를 따려고 할 수도 있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 운명의 행방을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 정보가 필요했다.
“혹시 D-day도 정해졌나요?”
“100일도 안 남았어. 가을이 한창일 때 시작해서 겨울이 되기 전에 모든 것을 끝마친다.”
맙소사, 너무 얼마 안 남았잖아!
나는 가을이 오기 전에 모르싸를 떠나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졌다. 내 고향, 한국이 너무 그리웠다. 하지만 그녀는 내 절실한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건지 덧붙였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부터는 자기가 나를 더욱 떠날 수 없게 된 거야. 보안유지, 알지?”
그래서 처음부터 듣기 싫었다. 나는 그녀에게 씨알도 안 먹힐 맹세를 던져보았다.
“제가 다른 곳에 간다고 해도 비밀은 절대로 지킬게요.”
“사람은 상황이 바뀌면 생각도 바뀌어. 배가 고플 때는 한쪽 콩팥이라도 내어줄 것 같다가도 배가 차면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 인간이지. 자기도 아마 여길 벗어나면 그 생각도 바뀔걸?”
거친 삶을 살며 인간의 본성을 너무 잘 알아버린 듯한 그녀에게 더 이상의 수작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내 항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씻으러 들어가며 말했다.
“이제 열흘 정도 후에 베라크루즈로 돌아갈 거야. 아주 멋진 곳이니 자기도 기대하라고.”
이제 정말로 집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카타리나는 당분간 계속해서 가내 입원 상태였다. 모르싸에서의 내 담당 업무 중에 여왕의 애완견, 살아있는 섹스토이 역할 말고도 드디어 보람찬 일이라 할 수 있는 간병인 역할이 추가되었다.
안젤리카는 업무 때문에 자리를 비웠고, 전례 없이 두 여왕은 떨어져 있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카타리나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우리는 많이 가까워졌다. 카타리나가 총상을 입고 돌아온 그날, 안젤리카가 오기 전에 나와 나눴던 교감이 그녀 내부의 브레이크 하나가 망가뜨려 버린 것 같았다. 약 기운에서 벗어난 이후로도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그전과 아주 달랐다.
아침마다 젊은 주치의 닥터 허쉬펠트가 직접 올라와서 가벼운 문진을 했고, 그녀의 상태를 점검했다. 다행히 상처가 덧나거나 뼛조각에 데미지 받은 신경의 손상이 번지는 등의 악재 없이 회복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안젤리카는 매일 그의 진찰 결과를 듣고 난 다음에야 안도하며 내게 그녀를 맡기고 방을 나섰다. 세간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마귀로 알려진 모르싸의 리더. 그 소문의 당사자 그녀는 카타리나를 단순한 무생물의 소모품처럼 매정하게 대하지 않았다. 진짜 친형제가 다쳐도 저렇게 챙길까 싶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도 그녀의 상태가 좋아져 빨리 다시 세 명이 나란히 요가를 하는 일상의 아침이 돌아왔으면 했다.
둘만 남은 시간의 우리는 마치 밖에 나가기 귀찮아 집에서 데이트를 하는 연인과 같았다. 점심때는 같이 침대 맞은편 벽에 설치된 65인치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봤다. 그러다 식곤증을 느끼면 함께 스르르 낮잠에 빠졌다. 눈을 뜨고 저녁 식사 전까지는 내가 그녀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어릴 적 동화책을 본 적이 없다는 그녀의 말에 놀랐지만, 그녀가 살아왔다는 빈민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곳의 아이들은 달콤한 동화보다 처절한 생존의 이야기가 더욱 가까웠다.
함께 읽는 동화책은 그 어떤 소설책보다 재미있었다. 동화책은 길이가 짧아 읽어주는 것에도, 그 소리를 듣는 사람도 부담이 없는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나중에는 목소리 연기가 가미된 구연동화 낭독회를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나 다정한 시간을 보내다가 안젤리카가 돌아오면 우리는 다시 이전의 관계로 돌아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는데, 실제로 안젤리카에게 느끼는 이 감정이 배신의 죄책감인지, 아니면 발각 이후에 생길 일의 두려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카타리나도 태연하게 연기를 했지만 그녀의 속마음까지는 읽을 수 없었다. 그녀의 충성심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녀는 여왕님의 광신도였지만 확실히 무언가가 바뀌어 있었다. 암묵적으로 비밀을 지키는 것을 보면 그녀도 자신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떳떳하지 않음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책도, 영화도 재미가 없어지면 우리는 대화를 나눴다. 그녀에게서 마르코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다. 알고 보니 이 배에서 나 말고 금지된 사랑을 꿈꾸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카타리나가 배에 들어오는 날부터 마르코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지금까지도 그 마음을 접지 않았다는데, 파라이소에서부터 마르코가 나를 왜 그렇게 미워하는 것처럼 보였는지에 대한 설명이 바로 되었다.
“아, 뭐야, 그런 거였어?”
나는 살면서 짝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녀석의 속이 꽤 탔겠다는 건 알 것 같았다. 백 룸에서 우리의 끈적한 모습을 봤을 때 속이 얼마나 끓었을까. 놈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파라이소에서나 여기에서나 카타리나의 마음은 네가 아닌 내가 가져간다, 이 녀석아.
그때 나는 그러면 안 됐었다.
일은 베라크루즈 행을 하루 앞둔 시점에 일어났다. 카타리나의 회복은 순탄히 진행되어 염증이 도지거나 하는 위험성이 줄어들었다고 판단한 주치의는 이만 주사 투약을 멈추고 심전도 기기도 모두 방에서 뺐다. 그러나 복합골절은 여전히 만만한 부상이 아니었고, 수술에 만전을 기했음에도 결국 신경을 조금 다쳐서인지 카타리나의 거동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때문에 카타리나는 계속해서 방에서 안정을 취했다. 그날도 나는 바닥에, 카타리나는 침대에 누워서 함께 영화를 보는데 그녀가 내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나 씻고 싶어.”
나는 그녀가 한 번도 제대로 씻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젖은 수건 등으로 혼자서 어떻게 처리해 온 것 같지만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안 씻었네?”
“나 냄새나?”
“한 번 맡아보고 알려줄게.”
나는 카타리나가 붕대를 맨 팔의 겨드랑이에 장난스럽게 코를 킁킁대며 가져다 댔다. 카타리나는 기겁하며 나를 장난스럽게 때렸다. 둘의 웃음이 잦아지자 말했다.
“걱정 마, 좋은 냄새나.”
“거짓말.”
“꽃향기나.”
내 말에 그녀는 자신의 겨드랑이 냄새를 한번 맡아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 씻어야겠어. 상처도 다 아물었으니 어느 정도 씻을 수 있다고 했어.”
카타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그 상태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기름에 엉겨 붙은 머리가 여기저기 뭉치고 엉켜 있었다. 침대 시트도 갈아달라고 요청을 다시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자리를 비켜 길을 내주었고 그녀는 침대에서 나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오랜 시간 앉아있던 나는 찌뿌둥한 몸을 스트레칭으로 펴주었다.
이제 베라크루즈에 들어가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거기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애완동물의 삶에도 변화가 일어날까?
육지를 밟을 생각에 반갑기도 하면서 모르싸가 계획하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들어버렸기 때문에 내 신변에 대한 불안이 엄습하기도 했다. 나를 안젤리카의 보디가드 요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군사훈련이 강제로 시작되는 것은 아닐지.
그때 카타리나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있잖아.”
카타리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말했다.
“나 좀 도와줘.”
바로 내 심장이 반응해 뛰기 시작했다. 가냘픈 그녀의 도움 요청에 바로 달려갔다. 카타리나는 옷을 완전히 벗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껏 혼자서 볼일도 봐왔기에 하의는 이래저래 적당히 벗어던질 수 있는 그녀였지만, 부상 부위인 어깨의 움직임을 크게 필요로 하는 상의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밖과 달리 화장실의 좁은 공간에 높은 색온도의 조명을 받은 카타리나가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는데 마치 잡지 화보 같은 느낌이었다. 내 심장이 요동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높아지는 심박수는 속옷 차림의 하의가 원인이었을지도 몰랐다.
“나 좀 벗겨줘.”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그녀가 들었을 수도 있다 생각했다. 그녀의 문제는 속옷처럼 입고 있는 탱크톱이었다. 부상 부위를 자극하지 않고 휴식에 편한 옷을 입은 것이었는데 타이트한 재질의 옷이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걸려 위로 벗어내기가 힘든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뒤로 다가가 그녀의 옷 끝자락을 잡았다. 혹시나 그녀가 아플까 봐 천천히 위로 올렸다. 아래부터 그녀의 척주기립근이 드러나며 잘록한 허리 라인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그녀에게 내 동요를 들키지 않기 위해 호흡 조절에 신경을 썼다. 카타리나가 내 거칠어진 숨소리를 듣고 알아챈다고 생각하니 민망했다.
옷은 점점 올라가 그녀의 탄력적인 가슴을 통과했다. 과정 중에 내 손이 그녀의 피부에 스치며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느 정도 의도된 접촉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접촉의 순간에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내가 과연 호흡 컨트롤을 잘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어딘가 아득한 기분이라 알 길이 없었다.
“이제 조금만 참아.”
어깨까지 올라간 옷은 탈의의 마지막 단계에 돌입했다. 나는 그녀가 덜 아프게 최대한 빠르게 옷을 그녀의 어깨에서 벗겨내었다. 어깨를 움직여야 하는 부분에서 카타리나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지만 딱히 아픈 내를 내지 않았다.
인제 어쩌지? 얌전히 밖으로 나가?
움직인 건 카타리나가 먼저였다. 벗겨진 옷을 들고 어찌할 줄 모르는 나를 향해 돌아섰다. 굉장히 가까운 거리였다. 내 수많은 고민들이 다 무용지물이 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입을 맞췄다.
“잠깐, 씻는 거 먼저.”
카타리나가 다음 단계로 향하는 나를 멈춰 세웠다.
“어떻게 씻지?”
“닥터가 괜찮다고 했지만 방금 옷 벗을 때 조금 부담이 느껴졌어. 닦아줘.”
나는 수건 하나를 따뜻한 물에 푹 적셨다. 그리고 그녀를 구석구석 닦아주었다. 지금 순간만은 우리의 상하관계가 역전된 세계였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했지만, 내 지시에 따라 몸 여기저기를 대주었다. 내 손길이 닿는 곳에는 더러움이 사라지고 온기가 피어났다. 카타리나의 복부에는 파라이소에서 보았던 바다코끼리가 여전히 자신의 위용을 잃지 않고 있었다. 물론 녀석을 씻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양치를 마친 위협적인 송곳니가 예감처럼 반짝이는 것 같았다.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머리 감기까지 마친 우리는 물기를 수건으로 최대한 털고 침대로 갔다. 입원으로 평소보다 초췌해진 그녀였지만 흰 침대 위에 햇살을 받으며 누워있는 자태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나는 그녀 옆에 누웠다. 다른 사전 준비는 필요 없었다. 이미 그녀를 닦는 과정에서 그녀는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모두 끝난 상태였다. 그리고 우리는 파라이소에서 끝내지 못했던 곳에 마침내 다다를 수 있었다.
그녀와 내가 동시에 절정을 맞았다. 평소에 안젤리카에게 쥐어 짜이는 것과 다르게 서로의 사랑이 가득한 마무리였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가득했다. 부상으로 인해 핏기가 없던 모습에 생기가 돌자 인형에 생명을 불어넣은 피그말리온이 된 기분이었다. 고취감에 나는 그녀의 입에 내 입을 맞췄다.
쿵!
누가 강화유리로 된 테라스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우리가 동시에 테라스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마르코가 분노 가득한 표정으로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마르코는 요즘 카타리나의 부상 소식에 입맛이 통 없었다. 그녀가 모르싸에서 활동하며 이렇게 크게 다친 적은 없었다. 몇 번이나 그녀를 병문안 가고 싶어 펜트하우스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 재수 없는 아시안 자식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모조리 퇴짜를 놓았다.
그녀가 힘들 때 옆에서 위로와 힘이 돼주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 자신의 정성이 통한다면 그녀도 나의 마음을 알아주리라. 이러다가는 본토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병문안을 가지 못할 것 같았다. 베라크루즈에 도착해 배에서 내릴 때는 그녀의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마르코가 찾아간다 해도 병문안이 무의미한 상태가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병문안이라는 접견 핑계도 사라지는 것으로 결국 이번 기회도 날릴 것만 같았다.
기회가 떠나간다! 그래서 그는 결국 배의 금기를 몰래 깨기로 했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 도전이었다. 그의 마음은 그만큼 커져 있었다.
그는 낮 시간에 안젤리카가 확실히 자신의 집무실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몰래 3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주위를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난간을 밟고 올라섰다. 그리고 파쿠르를 하듯이 배의 구조물들을 잡고 디뎌 펜트하우스 테라스 난간을 향해 기어 올라갔다.
다행히 아무도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이제 조심히 방으로 다가가 카타리나를 만나 자신의 정성을 각인시킨 다음 조용히 빠져나올 것이다. 같이 방에 있을 아시아 놈은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그 겁쟁이 놈은 비밀을 지키라고 윽박지르면 순순히 지킬 것이 분명했다.
이런 자신의 마음을 받아줄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그는 급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의 슬로우 스타터, 사랑의 마라토너 킵초게였다. 카르텔의 위험한 거사가 마무리되면 안정을 찾은 이후에 안젤리카가 사라지거나 여왕이 그 둘의 사이를 허락할 순간이 오리라.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카타리나와 정진이 뒤엉켜 쾌락의 절정에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자신이 금지된 구역에 침입해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고 당장에 그들을 멈추고 싶었다. 전속력으로 달려가 주먹으로 힘껏 통창을 두드렸다. 쾌락의 정상을 향한 등반을 끝내고 서로의 몸 위로 퍼진 그들이 동시에 마르코를 쳐다봤다.
마르코는 분노와 배신감에 몸이 떨렸다. 그들은 그대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를 꽉 깨물었다. 당장 유리를 깨부수고 들어가 놈의 얼굴을 짓이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여기는 여왕님의 방이었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이미 자신이 용서받을 수 있는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그들을 벌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분이어야 했다. 그리고 그분이 벌하여야 확실하고 자신이 하는 것보다 잔인하게 벌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여왕님은 그의 분노를 능히 충족시켜 줄 사람이었다.
마르코는 방 안에 있는 둘의 예상을 깨고 그대로 뒤를 돌아 다시 난간으로 갔다. 끝으로 한 번 더 방을 뒤돌아보고는 난간 너머로 훌쩍 뛰어내렸다.
“이제 어쩌지?”
큰일이 났음을 직감하고 내가 물었다. 주인이 집에 나간 사이 주인이 아끼는 도자기를 깨트려버린 개 마냥 안절부절못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개들은 그들이 잘못했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라면 나는 확실히 큰 잘못을 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나를 카타리나가 진정시켰다.
“우선 나 옷을 입혀줘. 내가 가서 마르코와 얘기를 해볼게.”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의 입을 틀어막고 이 이야기가 안젤리카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않게 해야 했다. 카타리나에게 옷을 입히는 것은 옷을 벗는 것처럼 시간이 꽤 들었다. 겨우겨우 옷을 다 입었을 때 방의 내선 전화가 울렸다.
“별일 아닐 거야.”
나는 전화를 받았다. 히카르도의 목소리였다.
“여왕님이 카타리나를 호출하시네? 지금 집무실로 내려오면 될 것 같다고 전해줘. 카타리나 몸은 좀 괜찮아진 거야?”
그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목소리였다. 절묘한 타이밍에 걸려온 전화이긴 하지만 아직 안젤리카도 히카르도처럼 이 사실을 모르기를 바랐다. 지금 이 시각에 안젤리카가 방금 벌어진 일을 알기 위해서는 마르코가 뒤도 안 돌아보고 곧장 집무실로 달려가 보고를 하는 것 말고는 시간상 불가능했다. 설마 마르코가 8살짜리 여자아이도 아니고 바로 쪼르르 쫓아가서 일렀을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스스로 상황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고 고민과 고민을 거듭하고 나서 보고를 결정하지 않을까. 그렇게 스스로 위로해 봤지만 난간을 내려가기 전 마르코의 마지막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뛰어내리기 전에 돌아본 그의 돌아있는 눈빛은 먼 거리에서도 뚜렷했다.
카타리나는 마지막까지 나를 진정시키며 방을 나섰다.
“너무 걱정 마. 일 이야기일 거야. 이제 곧 배에서 내려야 하니까 내 몸 상태 체크도 할 겸. 그냥 내 휴가가 끝난 거라고 생각해. 혹시나 마르코가 말했더라도 내가 잘 얘기해 볼게.”
“그래, 잘 다녀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뿐이었다. 여기서 그녀를 막을 수도, 그녀와 모르싸를 탈출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녀를 보내고 지옥 같은 기다림을 가졌다. 이런 느낌은 어릴 적에 피임 없이 여자친구와 관계를 가진 후 생리가 평소보다 늦다던 여자친구로부터 검사결과를 기다릴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때의 검사결과는 다행히 임신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때처럼 결과가 좋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안한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으로 달려가 문구멍으로 밖을 확인했다.
오, 하나님. 별일 없었구나!
카타리나의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나는 문을 열기 위해 재빨리 문손잡이를 찾았다. 그때 바닥과 문틈으로 검은 그림자가 퍼지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의문과 함께 문을 당겨 마저 열었다. 그리고 나는 지옥을 보았다.
찰박, 찰박
검은 그림자는 마냥 검지도 않았고 그림자도 아니었다. 문을 열자 문 앞 바닥에는 검은 그림자처럼 보였던 피 웅덩이가 보였고, 위로부터 핏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지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려오는 핏방울을 따라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안젤리카가 쥐고 문구멍 앞에 대고 있던 카타리나의 머리였다. 안젤리카의 뒤에는 히카르도가 완벽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카타리나의 머리채를 쥐고 있던 안젤리카는 천천히 손목을 돌려 나와 카타리나가 아이컨택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뒤로 물러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오금이 저리다 못해 오줌도 지린 것 같았다. 직접 겪어보니 내가 조절할 수 없는 생리현상이었다. 바닥에서 벌벌 떨고 있는 나는 차마 안젤리카를 올려다볼 수 없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그녀가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잔인하기로 유명한 모르싸의 리더였다. 그리고 다른 카르텔들을 제압할 수 있게 한 방법이 바로 공포였다. 그녀는 그 부분에 타고난 사람이었다. 며칠 전 히카르도가 했었던 경고가 다시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일어나, 자기야.”
안젤리카의 평소보다 더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대로 벌벌 떨면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왼쪽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내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자 그녀가 재차 말했다. 이번에는 더 짧고 굵게 말했다.
“일어나.”
무슨 수를 써도 일어나야 한다.
내 생존본능이 내게 외쳤다. 나는 그제야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젤리카가 뒤를 보지도 않고 카타리나의 머리를 히카르도에게 던졌다. 히카르도는 역시나 무표정하게 그것을 받아냈다. 회전하며 날아간 머리가 피를 뿌려대었다. 피는 히카르도의 얼굴에도 튀었다. 그는 감히 얼굴에 묻은 피를 닦거나 하지 않았다.
내가 완전히 일어나는 데에 성공하자 안젤리카는 내게 따귀를 날렸다. 안토니의 것보다 더 강한 충격이었다. 벽으로 날아가 정신을 못 차리는 내가 쓰러질 틈도 없이 안젤리카가 나를 붙잡아 일으켰다.
“한눈을 팔면 어떻게 해.”
“죄, 죄, 죄, 죄송합니다.”
한 방 얻어맞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왠지 나 더 흥분되는 것 같아.”
안젤리카가 나를 거칠게 방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을 닫으며 히카르도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계획 변경이다. 하루 빠르게 베라크루즈로 간다. 그리고 지금 본부에 연락해서 세 번째 카타리나를 바로 대기시켜.”
고개를 숙여 명령을 하달받는 히카르도의 모습이 닫히는 문 사이로 사라졌다. 그날 그녀는 나를 밤새 거칠게 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