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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Sep 25. 2024

챕터 11. 기품 있는 귀빈들을 위한 부르기뇽 요양원

    11. 기품 있는 귀빈들을 위한 부르기뇽 요양원




    정중한 프란시스를 따라 요양원의 정문으로 향했다. 우리의 발걸음에 맞춰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정복 차림의 도어맨이 상냥한 미소로 문을 열어 주었다. 도어맨도 색은 다르지만 벨보이와 같은 디자인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유니폼의 색으로 직책을 구분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요양원의 이름부터 이런 융숭한 대접까지, 이거 귀빈이 된 느낌인걸?

    열린 문으로 프란시스와 나, 그리고 벨보이가 지나갔다. 나는 습관적으로 문을 잡고 있는 도어맨에게 가벼운 목례와 함께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내가 소리를 내 인사하자 도어맨은 황급히 나를 따라 목례하며 인사를 건넸다.


    "환영합니다."


    문부터 이어진 기다란 카펫을 따라 들어온 로비 내부는 화려함 그 자체였다. 내가 프랑스 곳곳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화려하기로 유명한 베르사유의 궁전이나 여타 사치스러운 귀족의 성들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미디어로 접해본 서양식 궁전들은 죄다 이렇게들 생겨먹었었지.

    인테리어 테마는 고전이었지만 내부 구조는 현대적인 호텔 로비의 것을 가지고 있었다.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거대한 샹들리에가 로비 천장 한가운데에 매달려 있었고, 그 아래로 깔린 대리석 바닥이 사방팔방으로 샹들리에의 빛을 반사해 공간을 금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로비 한구석에는 거대한 벽난로가 있었고, 난로를 감싸는 모양새로 'ㄷ' 형태의 배치를 한 소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벽난로는 나무로 된 진짜 장작에 진짜 불이 붙어 있는 진짜 벽난로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연기가 빠져가는 굴뚝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벽면을 위로 쭉 훑었지만 연기가 빠져나가는 통로는 벽체 내부에 잘 숨겨져 있었는지 눈에 보이는 것은 멋들어진 벽 장식뿐이었다. 아까 들어오는 리무진에서 본 요양원의 전경에 건물 위로 승천하는 희미한 연기가 있었던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건물 외부로 연기가 잘 배출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불똥을 탁탁 튀기며 살아 숨 쉬고 있는 장작불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넘실대는 생동감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나는 갑자기 멈춰 선 프란시스의 등판과 거의 충돌할 뻔했다. 그는 로비 가운데에 위치한 메인 프런트 데스크 앞에 도달해서는 제식이 몸에 밴 잔뼈 굵은 군인처럼 휙 하고 90도로 방향을 꺾더니 로비 사이드의 작은 방으로 향했다.

    프런트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중년의 금발 여직원도 나에게 미소와 인사말을 건넸다. 나도 그녀에게 미소와 목례로 답했다. 그녀가 서 있는 프런트 데스크 뒤로는 나선형의 대리석 계단이 2층으로 이어져 있었고, 계단은 1층에서 2층까지만 운행하는 엘리베이터를 반원형으로 감싸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엘리베이터는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현대적인 엘리베이터와 달리 초기 양식의 엘리베이터로 마름모꼴의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 철창을 문으로 하고 있었다. 계단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리다 보면 2층 엘리베이터 천장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독수리 형상의 석제 조각이 상승하는 시선의 종착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주변의 수려한 대리석들과 달리 거친 느낌의 가고일은 이곳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었다.



    먼저 한번 내 시선을 뺏어간 거대한 벽난로에 이어, 당장이라도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가 내려올 것 같은 계단과 매서운 눈빛의 독수리 조각에게 다시 정신이 팔려버렸다. 그러다 아까처럼 다시 멈춰 선 프란시스와의 충돌을 이번에도 가까스로 모면할 수 있었다.

    프란시스는 무거운 목제 여닫이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는 작은 방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가 안내한 작은 방에는 책상 하나에 마주 보는 의자 2개, 그리고 한 구석에 소파 하나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모르싸에게 납치된 첫날 안토니가 안내한 방이 겹쳐 보였다. 취조가 아니라 체크인을 하는 것이 맞겠지? 아직 이 시설에 대한 의심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여기가 컨시어지입니다. 우리 요양원은 호텔식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요."


    먼저 책상에 자리를 차지하고 컴퓨터로 용무를 보고 있던 직원이 프란시스를 보더니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문밖으로 나갔다. 긴장한 듯 경직된 미소로 후다닥 이곳을 뜨는 직원을 보니 이곳 요양원에서 프란시스의 위치가 내 생각보다 높거나, 작은 트집거리가 있으면 아랫사람을 쥐 잡듯 잡는 상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원이 퇴장하자 프란시스는 내 의자를 먼저 빼주고는 책상 건너편으로 넘어가 직원석에 앉았다.


    "이곳에서 체크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내가 모르싸에게서 전달받은 지시사항은 여기까지가 전부였다. 이 요양원에 체크인하고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푹 쉬고 있으라는. 언제까지인지, 내가 여기서 해야 하는 것이 있는지는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투였다. 애완견을 애견 호텔에 맡기면서 애완견에게 언제 돌아오는지 알려주지 않는 것처럼. 이 애견 호텔에 맡겨진 나는 그저 주인이 다시 찾으러 오거나, 요금이 체납되어 쫓겨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하나의 인격체인 내게서 주체성을 박탈해 버린 처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앞으로 멕시코를 뒤덮을 혼란 통에서 나를 빼내 주는 것만으로도 이것은 안젤리카가 내게 베푼 호의이자 사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르싸의 배에 납치되어 레드카펫 위에서 머리를 조아린 순간부터 나는 생존하기 위해 내 주체성을 되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지 오래였다.

    모르싸에게서부터 나 혼자 동떨어져 있는 이곳이라면 이전의 순종적인 마음가짐에서 태도를 조금 달리할 수 있겠지만, 나를 향한 안젤리카의 마수가 여기에도 뻗쳐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조차 가능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나는 자유로운가?


    "여권 드리면 되나요?"


    컴퓨터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는 프란시스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씩 웃으면서 답했다.


    "그러셔도, 안 그러셔도 됩니다."

    "예?"


    내 어리둥절한 반문에 그는 시선을 모니터에서 떼고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말했다.


    "고객님은 일반 요양 프로그램이 아니라 특별 프로그램으로 예약을 주셨는데요. 특별 프로그램의 경우는 꼭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권을 보여주시면 여기 계시는 동안 저희가 좀 더 친밀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신분을 확인시켜주시지 않아도 체크인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예약하실 때 투숙객이 '프랭클린 루스벨트'라고 하면 여기서 지내는 동안은 프랭클린 루즈벨트이고, '마이클 잭슨'이라고 예약하면 마이클 잭슨이 되시는 거지요. 아, 그렇다고 신분이 확인되지 않은 손님들에게 저희가 불친절할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저희는 항상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니까요."

    "일반적인 요양시설과는 조금 다르네요."


    프란시스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고정하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렇죠! 보아하니 손님이 우리 요양원을 직접 찾아서 입원하시는 것은 아닌 것 같아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스위스의 수많은 비밀은행들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셨죠? 저희는 돈이 아닌 인간들을 위한 스위스 비밀은행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대충 얼버무렸다. 역시나 범상치 않은 곳이었다. 겉은 그저 럭셔리한 호텔이나 요양원 같았지만 실상은 국제적으로 수배 중인 마피아 범죄조직도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는 곳. 안젤리카가 이곳과 연이 있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평범한 분들도 돈만 지불하면 호텔처럼, 요양원처럼 이용이 가능합니다. 이곳을 많은 분들이 찾아주고 계시지요. 조용히 쉬고 싶은 정치인들, 연예인들, 그리고 간혹 공공장소에 출입하기를 꺼리시는 분들도 계시고(프란시스는 나를 잠깐 힐끗 바라봤다). 망명 신청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제3 국의 거물들이라든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침 넘어가는 소리를 들었는지 프란시스는 내가 무슨 할 말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말을 잠깐 멈췄다가 다시 이어갔다.


    "그리고 손님의 입원을 의뢰하신 고객님도 저희와 연이 깊은 분들이시죠."


    안젤리카가와 연이 깊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보았다. 이 수상한 요양원의 투자자 거나 단골손님 정도려나? 범죄자 신분을 대물림하고 있는 그녀의 가문에게 이곳은 매우 적합한 시설로 그들이 요양원을 종종 이용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닐 것 같았다.

    이 알프스의 설원을 배경으로 안젤리카가 설표의 가죽을 그대로 벗겨 만든 것 같은 코트를 입은 모습이 그려졌다. 눈 내린 자연 한가운데에서 두 다리를 눈 속 깊숙이 박고 선 그녀는 위풍당당한 풍채로 언제나 그랬듯 나를 내려다봤다. 상상 속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불어온 눈보라에 그녀의 코트가 펄럭이며 가리고 있던 속살이 드러났다. 상처 가득한 근육들과 나를 수없이 겁탈할 때 입었던 눈에 익은 속옷이 눈앞에 나타나자 나는 그 모습이 그저 머릿속의 상상이란 것도 잊은 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내가 갑자기 눈을 감으며 움찔하자 프란시스가 다시 그 기척을 알아차렸는지 하던 것을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무안함을 느낀 나는 그에게 떠오르는 아무런 질문을 하나 투척했다. 정신이 아파서 요양원에 보내진 사람으로 보이기는 싫었다.


    "왜 요양원 이름이 부르기뇽인가요? 여긴 부르고뉴 지방도 아닌 것 같은데… 요양원 근처의 설산들을 보자면 이곳은 스위스 근처 지방이 아닐까 하는데, 맞나요?"


    프로의식이 좋은 프란시스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 혼자만의 우려와 달리 아직 내 정신상태를 의심하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저희 창업주님께서 직접 지으신 이름입니다. 맞아요, 여기는 부르고뉴가 아닌 론 알프 지방입니다. 여기서 오늘부터 장기 투숙하시게 될 텐데, 천천히 그 이유를 한 번 알아가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런 주제로 저희 직원들과 대화를 나눠보시고 요양원 곳곳을 직접 둘러보세요! 마치 탐정 에르큘 포와로처럼 말이죠. 우리 요양원에서 지내는 것이 지루해질 리 없겠지만, 여기 계시는 동안 손님의 추가적인 여흥 거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실제로 몸이 아파서 오신 것은 아닌 것 같고… 목적은 일단 휴양이신 거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말썽꾸러기 아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 아들의 침대 머리맡에서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표정과 어투로 말하는 프란시스 때문일까. 어쩐지 이 요양원에 무언가 숨겨진 비밀이나 신비한 사연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J.K. 롤링의 비밀 가득한 호그와트처럼 말이다.

    설마 본인도 잘 몰라서 대충 얼버무리는 건 아니겠지? 나를 에둘러 방으로 올려 보내고 황급히 ‘부르기뇽 요양원의 역사’ 같은 제목이 달린 책자를 뒤져보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다가 그의 프로페셔널한 자태와는 너무 동떨어진 모습이라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기로 했다.

    그래도 프란시스의 의도가 나에게 제대로 먹혔는지 한참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머릿속으로 펼쳐보고 있을 때 그의 타자 소리가 멈추는 것으로 체크인이 끝났다.


    "자, 체크인 절차가 완료되었습니다. 여기 시설에 관한 안내 사항들이 적힌 출력물들을 병실에서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예약은 올인클루시브 옵션으로 있어서 하루 세끼의 식사가 모두 제공됩니다. 외에 추가적인 룸서비스나 유료 액티비티들은 추가 결제하셔야 하지만 거액의 예치금을 예약 당시에 이미 지불받았기 때문에 비용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궁금하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지나가는 우리 직원을 붙잡고 물어보시면 됩니다. 방에 있는 전화기도 우리 직원들과 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디파짓이 이미 잡혀 있다고요? 금액한도는 어느 정도인가요? 그래도 예산이 얼마 정도인지는 제가 알아 둬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대략적으로라도 알고 있어야 계좌에 구멍이 나는 참사를…"

    "일단은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드립니다. 디파짓이 고갈되면 처음과 동일한 금액만큼 의뢰인 분의 스위스 계좌에서 자동으로 다시 결제될 예정입니다."


    아무래도 요양원의 결제 시스템과 안젤리카의 개인 금고가 제대로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자동결제라니. 유튜브 프리미엄에나 자동결제를 써보았지, 이런 큰 금액을 자동결제 하는 스케일은 너무나 생소했다.

만약 재결제를 할 때 계좌가 막혀있거나 잔액이 부족하다거나 해서 예치금이 떨어진다면? 워낙 소시민적인 삶을 살아온 내 머리에는 불안한 질문이 하나둘 떠올랐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실현될까 봐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나의 카타리나를 잃는 날에도 부정적인 생각이 결과로 이어졌었다.

    뭐, 그때쯤이면 이곳에서 지내온 정이 있을 텐데 이 엄동설한에 매정히 쫓아내기야 하겠어?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앞으로 여기서 지내는 동안 이들에게 녹아들어 갈 것이다. 쫓겨나는 대신에 손님 신분에서 주방보조로 변신해 제2의 하바나 생활이 이곳 알프스 근처에서 시작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살인귀들 사이에서도 적응하고 살아남은 내 생존력에 이제 강한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안젤리카가 돈 자랑을 디테일하게 한 적은 없었지만 멕시코 전국적으로 군대를 운영할 정도면 그녀의 자산규모를 감히 국가급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그래, 우선은 돈 걱정 없이 펑펑 써보자. 집안 대대로 마약 팔아서 축적한 더러운 그 돈, 내가 열심히 까먹어 주마!

    이 다짐을 하는 순간만큼은 고을 사람들의 고혈을 쥐어짜 모은 탐관오리의 창고를 털어먹는 의적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프란시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덩달아 일어났다. 컨시어지룸 밖에는 어느새 직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컨시어지 데스크를 차지하고 있던 아까의 직원이었다. 프란시스는 직원에게 룸의 키 카드를 맡기고 짧게 무언가를 지시하고는 사라졌다.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로 멀어지는 그의 제비 꼬리 코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새로운 장소에서 그나마 대화를 가장 많이 해봤다고 할 수 있는 그가 사라지자 새로운 환경에 떨어졌을 때 느껴지는 어색함과 약간의 긴장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군대의 훈련소에 갔을 때와 안젤리카의 배에 탑승하게 되었을 때, 학창 시절 학년이 바뀌어 새로운 반에 들어갔을 때 느끼곤 하던 긴장감이었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프란시스의 지시를 받은 직원이 가만히 서 있는 내게 출발을 알렸다.


    "따라오시죠. 짐은 이미 올려두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 짐을 끌며 따라오던 벨보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잽싸게 슈트 케이스를 내가 묵을 방으로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로비로 나와 이번에는 컨시어지 사무실 정반대 편으로 향했다. 다시금 중앙 카운터를 지나게 된 나는 아까의 여직원이 그대로 데스크에 있는지 살폈지만, 그 사이에 그녀는 잠깐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우리는 로비를 완전히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홀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는 벽 하나에 2개씩 총 4개가 서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로비 카운터 뒤의 고풍스러운 엘리베이터와 달리 현대적이고 내부가 넓은 모델이었다.


    "5층으로 모시겠습니다."


    에스코트하는 직원이 말했다. 생각해 보니 내 방이 몇 호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제가 몇 호에 묵게 되나요?"

    "우측 윙 병동에 위치하고 있는 501호 병실입니다."


    병동과 병실이라니. 지금까지의 모습은 영락없는 호텔이나 리조트였지만 그들은 철저히 이곳을 요양시설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야 이 비밀스러운 프라이빗 클럽의 존재를 가려 그들의 취지에 맞게 운영을 할 수 있기 때문일까?


    "네, 그렇군요."


    나의 짧은 대답. 그리고 다시 적막이 흘렀다. 그냥 빨리 방에나 도착했으면 했다. 내 마음을 아는지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5층에 도달했다.

    띵

    도착 알림음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를 나온 우리는 'ㄷ' 자 구조인 맨션의 한쪽 윙 끝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가장 먼 쪽에 1호실이 위치한 구조인 것 같았다.

    묵직한 붉은색 카펫은 우리의 발소리를 모두 집어삼키는 듯했다. 복도를 지나치며 호실 넘버가 하나씩 작아지는 것을 보았다.

    504… 3… 2… 그리고 1.

    직선의 복도 끝에 다다라서 드디어 직원의 발걸음이 멈췄다. 문 옆의 벽에는 문손잡이와 비슷한 높이에 초인종이 있었고, 그 위쪽에는 호실 수가 새겨진 고급스러운 동판 명패가 있었다. 은은한 조명이 명패를 비춰주고 있어 고급스러운 느낌이 더해졌다.


    "저희가 자랑하는 라메주 스위트 병실입니다."


    직원이 카드키로 잠금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문이 묵직하게 열리는 것과 함께 넓은 거실과 옅은 커튼이 쳐져 있는 통창 새시가 보였다. 커튼과 유리창 너머에는 테라스도 비쳐 보였다. 먼저 도착했다던 내 가방은 낮고 길쭉한 짐 받침대에 이미 올려져 있었다. 직원이 벽체의 컨트롤패드로 가 무언가를 조작하더니 방 전체의 조명이 들어오면서 모든 커튼이 열리기 시작했다.


    "커튼은 수동으로도, 지금처럼 자동으로도 조작할 수 있습니다. 열린 통창으로 라메주 산을 가장 깔끔하게 볼 수 있는 객실은 이 스위트 카테고리뿐으로 우리 요양원에 몇 없는 병실이기도 합니다. 우리 요양원은 고객님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를 대비하여 직원들이 24시간 대기하고 있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기를 들어주시면 됩니다.

    저는 오늘 정진님을 모시게 된 또마입니다. 지내시는 동안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또마는 이런저런 병실 내의 설명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키 카드를 테이블 위에 놓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가 떠나고 나서야 알프레도가 했었던 제안을 떠올렸다.

    아, 왜 이 요양원의 이름이 부르기뇽인지 물어보는 건데…

    하지만 이미 급사가 방을 떠난 후였다. 또마의 마지막 손길이 닿았던 적당한 크기의 원형 테이블로 다가갔다. 테이블 위에는 웰컴 선물인 와인 한 병과 과일 접시가 놓여 있었다. 사과, 오렌지, 포도 등 일관성 없는 구성의 과일들은 세잔의 정물화를 보는 듯 아름다운 구도로 쌓여 있었다.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이라니!

    특별한 사람이 되는 느낌이 있어 잠시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나 혼자 남은 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정적을 느끼며 자유롭게 방을 둘러보았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스위트지만 거실과 침실 공간이 벽으로 구분되지 않은 스튜디오 구조로 공간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벽이 가운데에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편이 내 취향에 맞았다. 거기다 일반적인 건물보다 층고가 높은 까닭에 화려한 인테리어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천장에는 로비에서의 것보다는 크기가 작았지만, 고급스러움에서는 뒤처지지 않는 샹들리에 하나가 매달려 방의 메인 조명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감탄을 뱉으며 침대 쪽으로 이동했다. 501호가 맨션 가장 끝의 코너 룸인 까닭에 침실 쪽의 벽에도 창이 나 있어 파노라믹 한 개방감이 대단했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테라스도 건물의 모서리를 따라 'ㄱ' 자로 꺾여 있었다. 직접 나가보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다시 시선을 방 안으로 돌렸다. 머리맡에 거대한 풍경화가 걸린 킹 베드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어릴 적 만들었던 캐노피 스타일의 침대는 아니었지만 공주가 아침에 눈을 뜰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침대 헤드를 가지고 있었고 두툼한 침구를 덮고 있었다. 희고 풍성한 볼륨을 가진 침구가 내게 어서 자신의 품으로 뛰어들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보조개가 생길 정도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녀석의 유혹을 참지 못하고 우다다 달려가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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