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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Sep 26. 2024

챕터 12. 501호 병실의 동양인

    12. 501호 병실의 동양인




    처음 이틀간은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안’은 것이 아니라 ‘못’ 한 것인데, 침대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힘이 드는 최악의 몸 상태 때문이었다. 신나서 침대에 뛰어들 만큼 에너지 넘치던 첫 체크인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멕시코 열대의 옷차림으로 알프스의 한기 가득한 바람을 맞이한 것이 독이 되었던가. 짐을 푼 그날 저녁부터 감기 기운이 조금 도는가 싶더니, 증상은 밤새 착실히 진행되었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는 말 그대로 무언가에 짓눌리는 느낌이었는데, 이불 위에 보이지 않는 전설의 프로레슬러 헐크 호건이 승리를 위해 핀 폴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 레슬링 경기와 다른 점은 3초를 카운트해 경기를 끝내줄 심판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알프스 산골 비행장에서의 추위는 근 몇 년간 느껴보지 못했던 수준의 것임은 확실했다.

    확실히 강풍을 너무 맞았어.

    특히나 근래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하바나는 가장 추웠던 날도 영상 20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온화한 곳이었기에 내 몸이 급격한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힘들어할 만도 했다.

    지독한 감기 녀석 때문에 따뜻한 이불속에서도 오한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오들오들 떨며 침대 사이드 테이블 위의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수화기 너머로 친절하게 응답하는 직원에게 오늘 아침 식사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졌다.


    “혹시 방에서도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나요?”

    “네, 룸 서비스로 식사 가능하십니다.”


    확실히 고급스러운 요양시설이라 그런지 5성급 호텔에서 가능한 것들은 거의 가능한 모양이었다. 냉큼 그녀에게 방에서 먹고 싶다고 전했다. 차마 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직접 식당까지 가서 식사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딱히 이유는 전하지 않았다. 유선상으로였지만 첫 만남인데 그녀에게 강한 남자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함이었다(와 같은 이유는 아니었고, 당시에는 그냥 불필요한 말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쾌활하게 대답하며 식사를 원하는 시간을 물었다. 나는 당장에 따듯한 무언가를 위장으로 넣어야 하는 상태였다. 음식이야말로 에너지가 금방이라도 다시 솟아나게 할 최선의 수단인 것 같았다. 최대한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틀어막아도 절박함은 새어 나와 목소리에 묻어났다. 가능한 가장 빠른 시간을 요청했고, 식사 준비에는 지금부터 30분가량 걸린다는 그녀의 대답과 함께 예약을 완료할 수 있었다.

    (식사와 함께할 음료도 주문해야 했는데, 메뉴가 어찌나 다양했는지 그녀가 읊어주는 음료 리스트가 도통 끝이 나지 않아 중간에 뚝 끊을 수밖에 없었다.

    "음료는 어떤 것으로 가져다 드릴까요? 저희는 커피는 물론이고 다양한 셀렉션의 차들과 음료가 준비되어 있답니다. 티로는 얼그레이, 잉글리시 블랙퍼스트, 다즐링…"

    "따뜻한 차라면 뭐든지 상관없어요."

    "그렇다면… 오늘은 따뜻한 히비스커스차로 어떠신가요?"

    "완벽해요.")

    나긋하고 듣기 좋은 그녀의 목소리에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지만, 그와 별개로 몸은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긴 수화기 너머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마녀가 속삭이는 마법의 주문이 아니라면 목소리만으로 어떻게 내 몸 상태를 호전시켜 주겠는가. 그녀가 내 침대로 찾아와 나를 품에 안아주는 것이 아닌 이상 실제로 이 오한이 멎을 리는 만무했다. 수화기를 떨어뜨리듯 놓은 나는 침대 옆의 마스터 컨트롤러로 손을 뻗어 방의 공조 온도 설정을 충분히 높였다.

    위잉

    천장의 공조음이 커지면서 방의 공기가 한층 따뜻해지기 시작했지만 오한을 멈추는 데에는 그리 효과가 있지 않았다. 되려 공기가 건조해지면서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없던 나였다. 집을 나와 이리저리 몸을 굴리면서도 아프지 않았었는데… 살면서 크게 앓아본 적이 없는 나는 몸이 무력하면 정신도 무력해진다는 사실을 계란 한 판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집 나와 아프면 서럽다는 말의 참뜻도 조금 알 것 같았다. 생전 처음 오는 낯선 나라와 낯선 공간에서 혼자 웅크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은 궁상맞기 짝이 없었다.

    결국은 또다시 '이방인'이었다. 내 평생의 팔자라 생각하고 초연해진 타이틀이었지만 이번에는 몸이 아파 덩달아 약해진 정신 때문일까, 조금은 서글프게 다가왔다.

    지금이 아침은 맞지?

    다시 컨트롤러를 조작해 모든 커튼을 일제히 열었다. 커튼이 갈라짐과 동시에 엄청난 밝기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타오르는 망막과 시신경을 보호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눈이 찌푸려졌다. 이렇게나 채광이 좋은 방일 줄이야. 통창으로 연결된 테라스가 있는 방에다가 코너 룸으로 두 면에 창문이 나 있어 바깥 빛이 안 들어오려야 안 들어올 수 없었다. 내 방 전체가 하늘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 같았다.

    나는 빛을 피해 이불속으로 몸을 지렁이처럼 움직여 내려가 머리끝까지 완전히 들어갔다. 얇지 않은 이불 속이었지만 침대 위로 쏟아지는 햇빛이 이불 커버와 거위 털 사이를 파고들어 옅은 조명처럼 안을 은은히 비추었다.

    무기력한 몸 상태를 생각하면 금방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그대로 이불속에서 웅크려 있기를 20여분이 지나자 노크 소리와 함께 벨 소리가 들렸다.

    아침밥이 왔구나!

    그러나 몸을 움직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밥도 좋지만 침대 밖으로 나가는 큰 노동보다는 이대로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었다.

    내가 문을 열어줘야 하나? 혹시 직원이 알아서 열고 들어올 수는 없나?

    남을 기다리게 하기는 싫었지만 문 밖의 직원이 짜증 내지 않을 정도의 시간 안에 침대와 멀리 떨어진 문을 열어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한 나는 웅크린 몸을 다시 펴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크게 소리쳤다.


    "들어오세요!"


    그러자 잠금이 풀리는 작은 소리와 함께 직원이 정말로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알아서 들어올 수도 있구나!

    머리로 새로운 지식이 들어옴과 동시에 코로는 음식 냄새가 들어왔다. 하지만 텅 빈 뱃속과 달리 전체적인 컨디션 난조 때문인지 생각보다 식욕이 일지는 않았다.

    어제 나를 방으로 안내해 준 또마는 교대를 한 건지, 음식을 서빙하는 부서는 그가 일하는 곳과 다른 부서로 서로 맡고 있는 업무가 다른 건지, 방에 들어온 것은 처음 보는 직원이었다. 룸서비스 카트를 밀고 들어온 남자 직원은 침대를 못 벗어나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밝게 인사했다.


    "봉주르!"


    나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앉아 힘겹게 마주 웃어주었다. 아까 주문할 때 메뉴판을 꺼내 펼쳐볼 여력이 없던 터라 메뉴를 직접 선택하지 않고 간단한 콘티넨털 식으로만 부탁했었다. 그래서인지 아침 식사는 과하지 않고 단출했지만 사각의 목제 트레이에 오밀조밀 제법 알차게 담겨 있었다.

    직원은 침대 왼편의 테이블에 트레이를 올리고 식기 세팅했다. 마지막으로 작은 꽃무늬 패턴이 인상적인 찻잔과 찻주전자를 꺼냈는데, 주전자에서 또르르 흐르는 옅은 붉은색의 차는 기분 좋은 소리로 잔을 채워갔다.


    "추가로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로 요청해 주세요!"


    그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방긋방긋 웃으며 방을 나갔다. 그래, 먹어야 몸조리도 하고 활동도 하지.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억지로 식사했다.



    그러나 식사 후에도 몸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침을 먹기 전에는 마법의 수프라도 마신 것처럼 먹자마자 병이 뿅 나아버리는 상상을 했었지만 현실이란 동화와 달리 녹록지 않은 것이었다. 하긴 소망하는 족족 병이 낫는다면 세상에 큰 병을 앓는 사람이 어디 있고 병원이 왜 필요하겠는가. 몸살과 함께 입맛도 뚝 떨어졌는지 음식을 반도 채 먹지 못하고 다시금 전화기를 들어 상을 물렸다.

    입맛이 없기는 그날 점심과 저녁까지도 그랬는데, 점심은 간단한 리조또 한 그릇으로 해결했고, 저녁으로는 토마토수프 한 접시와 스테이크 한 접시를 주문했다. 인 룸 다이닝 메뉴판을 펼쳐 주문할 때 메뉴판의 가격들이 너무나도 심려스러운 수준이라 아픈 와중에도 식사 대금의 결제는 어떻게 되느냐고 재차 물었더니 모두 룸차지로 자동으로 청구된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첫날에 프란시스가 말해준 것처럼 예치금에서 자동 차감되는 것 같았다. 예치된 금액을 모두 사용해 버린 내가 스테이크 비용을 위해 아픈 몸으로 골골대며 설거지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렇게 첫날은 그럭저럭 침대에 누워서 보낼 수 있었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에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하루 자고 일어나면 훌훌 털고 일어날 줄 알았건만!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눈을 뜬 나는 우선 커튼을 열어보았다. 역시나 엄청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황급히 커튼을 다시 닫고 수화기를 들어 아침을 주문했다. 하루 만에 전화로 주문하는 것에 능숙해졌다.


    "봉주르!"


    어제와 같은 급사가 같은 인사말을 하며 들어왔다. 어제처럼 싱글싱글 웃으며 들어온 그는 나를 보더니 얼굴이 놀란 표정으로 바뀌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아니요…"


    지금 내 모습이 그럭저럭 괜찮아 보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남이 보기에는 어제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것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병든 병아리처럼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서 골골대는 내게 그는 조심스럽게 도움의 말을 건넸다.


    "의사를 불러드릴까요?"

    "의사요?"


    의사라니? 잠시 머릿속에 직원의 부름을 받아 눈 덮인 산속을 헤치며 여기로 출장 왕진을 오고 있는 의사의 모습이 시트콤처럼 재생됐다. 그러다 이곳의 이름이 부르기뇽 ‘요양원’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랬다. 이곳은 단순한 리조트 호텔이 아닌 최고급 요양원이었고 그에 걸맞은 뛰어난 의료시설을 갖춘 의료반이 상주하고 있었다.


    "젠장, 여기 의사도 있었군요?"


    내 깨달음에 직원은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간단하게 요양원의 의료시설을 자랑했다. 호텔처럼 휴양을 위해 오는 손님들도 있지만, 정신적으로 상처받은 환자들, 큰 수술을 치르고 회복하려는 환자들도 주요 손님들이었다. 실제로 이곳에서 임종을 맞고 싶어 하는 손님도 있는 까닭에 의료반은 24시간 상황 대기 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아침 식사를 마친 다음 의사의 진료를 예약할 수 있었다.

    늦은 아침인 오전 10시, 노크 소리와 함께 의사가 도착했다. 나는 절반 정도 먹다 남은 식사를 물리고 아침잠에 잠깐 들어있었다. 다행히 너무 깊게 잠들지 않았는지 의사의 벨 소리에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담당 버틀러 또마를 동반한 의사는 겉에 가볍게 걸친 의사 가운을 휘날리며 거리낌 없이 방을 가로질러 와 침대 곁으로 왔다. 그 당찬 발걸음을 보면 요양원의 환자들의 병실에 들어오는 것이 매우 익숙해 보였다. 그는 갈색 가죽으로 된 낡은 왕진 가방에서 차트 하나를 꺼낸 다음 가방을 침대 아래에 붙어있는 기다란 발받침 소파에 툭 올려놓았다. 낡고 투박한, 슈바이처가 썼을 것 같은 전형적인 왕진가방이라고 생각했다.


    "반갑습니다, 닥터 쿠퍼입니다. 정진 씨 맞죠?"


    툭툭 던지는 인사말과 인상착의에서 지금껏 봐온 의사라는 작자들과 조금 다른 분위기의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다. 인자한 의사보다는 뭐랄까, 냉소적인 변호사가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가 청진기를 낀 모습을 상상해 봐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처럼 중간은 없이 엄청난 돌팔이 거나, 엄청난 실력의 명의 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그러나 적당히 희게 세기 시작한 머리와 표정에서 잔뜩 묻어 나오는 여유가 그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자제하게 했다. 170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크지 않은 체구는 옆의 건장한 또마에 비해 왜소했지만 지금 이 방에서의 존재감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짧은 머리와 하관을 뒤덮은 짧은 수염은 모두 비슷한 색감으로 희끗희끗했지만, 눈에는 여전히 젊은이의 총기가 서려 있었다.

    나는 내 몸의 증상과 멕시코에서부터 여기까지의 이력을 읊었다. 그는 얘기를 듣더니 크게 고민도 하지 않고 선 자리에서 진찰을 마쳤다.


    "독감이네요."


    닥터 쿠퍼의 말에 급사가 노트를 꺼내 받아 적기 시작했다.


    "이 좋은 방에서 잘 먹고 푹 쉬면 금방 좋아질 겁니다. 약은 치료제라기보다는 진통제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약은 끼니마다 식사와 함께 올려보네 드릴까요 아니면 한꺼번에 드릴까요?"

    "어…"


    혼자서 쉴 새 없이 쏟아대다 갑자기 선택권을 쥐여주자 내 생각 기능이 고장 나 버렸다. 다소간의 정적이 발생했음에도 닥터 쿠퍼는 순간 벙어리가 되어버린 내 말을 끊고 대신 결정해 주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쏟아댔다.


    "식사와 함께 받는 것으로 하죠. 그래야 약 복용도 잊지 않고, 공복에 약을 먹는 일도 없죠. 평소 위염 증상이 있거나 소화기가 약한 분들은 불편함이 배가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해드린 증상으로 저를 또 호출하시면 안 됩니다."

    "아, 네…"


    그는 차트 상단 집게에 꽂혀있던 펜을 꺼내 뭔가를 이리저리 휘갈기기 시작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펜동작으로 글의 내용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쓰는 것을 계속하면서 중간중간 급사에게 말했다.


    "며칠간은 이 방에서의 방역에 조금 신경 써 주세요. 전염성이 크지는 않을 텐데 조심해서 나쁜 것 없죠."


    또마도 자신의 노트를 꺼내어 그의 지시를 추가로 받아 적었다. 메모를 마침과 동시에 의사의 펜도 멈췄다. 그는 다시 가방에 차트를 넣고는 모든 진료를 마쳤다.


    "그럼 바로 오늘 점심부터 약을 드시고 며칠 푹 쉬면 될 겁니다. 쉬다 보면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 겁니다. 그때 정도면 약을 그만 드시고 일상으로 복귀하셔도 됩니다. 그전까지는 외부 출입, 특히 요양원의 공용시설 출입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혹시나 다른 증상이 나타나거나 오히려 증상이 심해지면 언제든 전화로 알려주세요."


    진단과 처방까지 쉬지 않고 마친 그는 내가 붙잡을 새도 없이 일방적인 인사말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또마도 급히 인사를 남기고 그의 뒤를 따라 허겁지겁 방을 나갔다.

    바쁜 일이라도 있나?

    나는 그가 내 체온 한 번 재보지 않고 내린 진단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동네에서 유명한 돌팔이 내과 의사의 진료가 딱 이랬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급히 수술이 필요한 내 맹장염을 단순 소화불량에 동반된 위장통이라 진단한 그는, 내가 죽다 살아난 이후에 우리 엄마와 한바탕 싸운 후, 소문이 나 버려 더 이상 동네에서 장사할 수 없었다. 그날 의사의 말을 믿고 집으로 그냥 돌아갔다가 결국엔 뱃속에서 곪아 터진 맹장 때문에 대학병원에 실려 가 사경을 헤맨 것을 생각하면 엄마의 투쟁은 나름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의사의 처방대로 점심 식사와 약이 함께 방으로 배달되었다. 그러나 아직 1회분 약을 먹지도 않았지만, 의사가 다녀간 뒤로 어째서인지 몸이 한결 나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점심으로 주문한 클럽 샌드위치를 남기지 않고 먹은 것을 보니 컨디션이 정말 조금은 돌아온 것 같았다. 의사와의 상담만으로도 상태가 호전된 것을 보니 닥터 쿠퍼가 특유의 싸가지없는 말투로 마법의 주문을 읊기라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물론 터무니없는 헛소리였다. 혹은 잔병치레 없던 내 몸이 시차 적응을 끝내고 다시 제 역할을 시작한 것일지도 몰랐다. 축 처져 있던 면역력들이 끓어오르는 중이라면 환영이었다.

    샌드위치의 칠리 마요네즈 소스가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고는 손에 남은 빵가루를 털어냈다. 이제 정신적인 호전도 좋지만, 보다 실질적으로 호전되기 위해 얌전히 처방받은 약을 먹었다.

    식사 자리를 정리한 다음 양치를 할 겸 화장실로 가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체크인한 이후 처음으로 자세히 살펴보았다. 흰색의 대리석 세면대에 두 손을 짚고 기대었다. 거울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는 거울 속 청년은 확실히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급사가 놀랄 만했어.

    조식을 세팅하다 말고 놀라서 상태를 물어보던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만큼 지금 내 눈은 퀭했고, 얼굴은 수척해 보였다. 아무리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아도 대리석과 금장 장식이 가득한 고급스러운 배경과 썩 어울리는 꼴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걸치고 있는 도톰하고 부드러운 실내 가운을 제외하고는 이 요양원의 투숙객인지 일개 직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내가 백화점의 마네킹이었다면, 매장 매니저가 화들짝 놀라 행여 고객이 볼세라 뒷골목의 쓰레기통 앞으로 가져다 놓았을 것이다. 배경이 쓰레기통 앞이라면 내 모습은 장소와 꽤 어우러져 그 동네에서 짬밥이 가장 높다는 터줏대감 노숙자도 흡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리라.

    거울 속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살폈다. 삐죽삐죽 자라난 수염 때문인지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잠옷으로 입고 있던 반소매 티셔츠를 벗어 상체를 확인했다. 몸에 잡혀 있던 근육들이 옅어진 것이 보였다. 옷을 벗은 김에 뜨거운 물에 몸을 씻을까 했지만 순간 머리가 핑 돌아 그냥 양치만 하고 다시 침대로 몸을 옮겼다. 약 기운을 자장가 삼아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잠든 나는 조금 늦은 저녁 시간에 다시 눈을 떴다. 나를 깨운 것은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할 것인지 묻는 요양원의 전화였다. 어제도 요양원 측에서 이렇게 내 저녁 식사를 먼저 신경 썼었는지 기억을 떠올려봤지만, 확실히 어제는 이런 세심하고 가까운 케어가 없었다. 아무래도 오전에 의사의 진료를 본 뒤로는 요양원의 투숙객 명부에서 내가 환자로 분류되어 관리되는 모양이었다. 순간 점심 음식을 배달 온 급사가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하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허투루 운영되는 곳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녁 식사를 권하는 것도 규칙적인 약 복용을 위해 내 식사를 챙기려는 의도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아마 약 복용에 대한 처방도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곳의 근본이 요양원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자각할 수 있었다. 효율적으로 약의 효과를 받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복용으로 체내의 약 농도를 유지해 주는 것이 중요했다.

    잠결에 받은 전화였지만 이번에는 충분히 배가 고팠기에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메뉴판을 직접 펼쳐 볼 필요도 없이, 이전 주문 때에 눈여겨보아 놨던 메뉴인 버거를 주문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스스로 몸 상태를 체크해 보았다. 처방의 효과 때문인지 몸의 불편함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았다. 꽤나 멀쩡히 움직일 수 있게 된 나는 저녁이 도착하기 전에 아까 접어두었던 목욕을 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 거대한 욕조에 물을 받는 데에는 시간이 상당히 걸릴 것 같았다. 물을 다 받을 때쯤 음식이 도착할 것 같은데 식사보다 목욕을 먼저 한다면 음식이 식을 것이고, 목욕보다 식사를 먼저 하자니 목욕물이 식어버릴 것이었다. 내가 빠지고 싶었던 것은 따뜻한 목욕물이었는데 정작 딜레마에나 빠져버리다니!

    목욕물의 딜레마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는 잠깐의 고민 끝에 탈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간단히 샤워로 만족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나중에서야 이때를 떠올리면 'Do not disturb’ 등을 켜놓고 있지 않은 이상 목욕을 하고 있으면 그들이 알아서 방에 들어와 식사 세팅을 마치고 나갈 것이란 것을 알았겠지만 당시는 이곳의 서비스 활용법을 모르는 초짜였다.)

    밖에서 언제라도 초인종이 울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쫓기는 마음으로 씻으니 10분도 안 되어 샤워를 마칠 수 있었다. 목욕물을 두고 갈팡질팡 고민하다가 보내버린 시간이 짧지 않았기 때문에 음식 도착시간이 임박했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헐레벌떡 씻어본 적은 군대 훈련소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러나 군대식 샤워가 무색하게도 주문한 저녁 식사는 머리를 완전히 말린 후에도 오지 않았고, 화장실 서랍에서 발견한 손톱깎이로 손톱과 발톱 정리까지 마쳤건만 벨은 울리지 않았다. 멍하니 앉아 기다리기가 심심해진 내가 방의 소파 테이블에 비치되어 있던 럭셔리 패션 잡지를 펼치기에 이르렀을 때는 상당히 배가 고파졌다. 다행히 잡지 페이지를 뜯어먹으면 무슨 맛이 날까 하는 의문이 들기 전에 식사가 도착했다.

    가느다란 감자튀김이 곁들여진 버거 한 접시는 꽤나 훌륭한 식사가 되어주었다. 작은 유리단지에 담겨 나온 케첩과 머스터드소스는 앙증맞았고, 버거 패티는 육즙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양파와 각종 야채들이 싱싱한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순식간에 접시를 비운 나는 식기 정리를 요청하고 저녁 분의 약을 챙겨 먹었다.

    모처럼의 샤워와 식사를 배불리 마친 것 때문인지 침대에 몸을 누이자 순식간에 잠이 다시 몰려왔다. 분명 점심을 먹고 오후 시간 내내 자지 않았던가? 오늘뿐만 아니라 어제도 잠만 잔 것 같은데… 하루에 20시간씩 자는 인간은 과연 옳은 인간인가? 어쩌면 약효가 제대로 먹혀들어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저항하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약 기운에 혹시나 요양원 측의 실수로 약을 2회분 먹어버린 건 아닌가 싶었지만, 점심때에 투여한 약 구성과 분명히 같은 구성이었다.

    혹시 옆방 환자의 약과 바뀌어져 배달받았다면?

    무서운 가능성이 떠올랐다. 옆방 환자가 지독한 불면증과 저혈압을 겪고 있고 내가 그 약을 받아먹아서 이렇게 몸이 고장 난 것이라면? 온갖 음모론들이 내 머리를 지배했지만 병적으로 쏟아지는 잠기운을 못 이겨 이를 닦는 것도 잊은 채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이 떠졌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무사히 잠에서 일어난 것을 자각하고 버튼을 조작해 커튼을 모두 열었다. 낮의 강렬한 햇빛과 대조되는 밤의 어두운 별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상체를 일으키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몸이 너무 가볍다는 것이었다. 닥터 쿠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쉬다 보면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 겁니다. 그때가 되면 약을 그만 드시고 일상으로 복귀하셔도 됩니다.'


    몸이 가벼워질 것이란 게 이런 말이었구나. 나는 바닥을 사뿐히 딛고 일어섰다. 이렇게 다이나믹하게 증상이 좋아진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발걸음도 어찌나 가벼운지 걸을 때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그건 바닥의 카펫이 두툼하고 고급인 이유 같기도 했다.) 

    확실히 의사가 괜히 의사가 아니네. 전문직인 이유가 있구나?

    오래간만에 자유로운 몸의 나는 신이 나서 다시 방 구경을 나섰다. 앞으로 지낼 보금자리. 두 번째로 들여다보는 방에는 처음 체크인 한 날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마치 잘 만들어진 영화는 처음 볼 때와 두 번째 볼 때 보이는 것이 다른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가장 먼저 방 한편에 서 있는 제네바의 스피커를 발견했다. 컨디션이 안 좋았을 때는 그냥 목제 가구겠거니 하고 넘겼었는데, 자세히 보니 상당한 고급형의 스피커였다. 블루투스 문양이 있는 것을 보니 무선으로 손쉽게 플레이어와 연결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전화기조차 없는 내게 음악을 재생할 플레이어가 없다는 점이었다. 베라크루즈에 있을 때에는 내가 따로 음악을 틀지 않아도 젊은 조직원들이 틀어 놓은 음악들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스피커 뒤의 벽에는 정물화가 하나 걸려있었다. 꽃과 과일의 정물이었다. 어두운 빛 아래에서 붉은 과일과 푸른 꽃의 조화가 아름다웠다.

    그림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데?

    조명을 켜서 제대로 감상하고 싶은 나는 박수를 두 번 치고 외쳤다.


    "방에 불 좀 켜줘!"


    그러나 적막이 흐를 뿐 조명이 켜지거나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여기라면 어쩐지 켜질 것 같았는데 말이야.

    나는 직접 스위치를 찾아가 불을 켜면서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신나서 방구경을 마친 내 관심은 이제 요양원 전체로 향했다. 모처럼 몸에 에너지가 넘치니 모험심도 덩달아 함께 끓어올랐다.

    그래, 이게 바로 본연의 내 모습이지!

    마땅히 입을 외출복이 아직 없어서 방에 비치된 톡톡한 두께의 가운을 걸치고는 방 밖으로 나섰다(나중에 알게 된 가운의 가격은 개당 100만 원이 넘어가는 고가의 제품이었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처음으로 직접 열어보는 문은 상당히 묵직했다. 방에 처음 들어올 때에는 또마가 있었기에 내가 문을 손으로 만질 필요가 없었다.

    고개를 내밀어 복도를 확인했다. 밤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바로 앞에 맞은편 방의 문이 보였다. 아무런 소음이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빈 방이거나 방음처리가 잘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요한 복도 속으로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복도 끝 방이라 그런지 문을 닫자 바로 오른쪽에 세로로 긴 직사각형의 창문이 있었다. 어둑하게 세팅된 내부 조명과 복도 끝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으로 복도는 낮은 조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낮의 분위기도 많이 밝지는 않았기에 낮과 밤의 밝기가 큰 차이 없는 공간이었다.

    창문으로 가서 밖의 풍경을 살폈다. 어두운 하늘 아래로 요양원의 뒷마당이 보였다. 뒷마당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는데, 마당이라기보다는 좀 더 큰, 공원의 느낌이었다. 공원의 끝을 지나서는 1층짜리 별관으로 보이는 현대적인 파빌리온이 있었다. 유리와 콘크리트로 지어진 별관 뒤의 절반은 온실이라도 되는지 천장부터 온통 유리였다.

    그 뒤로 더 멀리 떨어진 곳에는 스위스 샬레 스타일의 큰 건물이 보였다. 건물 파사드에 많은 창이 보였는데 대부분은 불이 켜져 있었다. 저기는 뭐 하는 곳일까.


    "아!"


    이런 멍청한!

    나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이 나왔다. 거리가 멀어 한 채의 장난감 집처럼 보이는 샬레의 빛에 홀려있던 나는 키 카드를 챙기지 않고 방을 나섰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무래도 방을 처음으로 나가 보는 만큼 익숙지 않은 부분을 놓치고 만 것이다. 문 앞으로 돌아가 애꿎은 손잡이를 거칠게 돌려봤지만 자동으로 잠겨버린 문은 열리지 않았다.

    조금 당황했지만 금방 생각을 고쳐먹었다.

    괜찮아, 어차피 로비로 내려가 볼 생각이었으니까. 카운터에는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겠지?

생각해 보니 지금이 몇 시인지도 확인을 안 한 상태였다. 나는 주먹으로 한심한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 홀을 지나 로비가 보였다. 메인 로비도 상당히 조용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5층의 복도처럼 별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심야의 로비는 조명이 많이 줄어들어 낮과는 다른 어두운 무드를 풍기고 있었다. 천장의 거대한 샹들리에도 조도가 많이 줄어들어 화려함을 감춘 채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직 로비 가운데의 메인 카운터만이 연극 무대 위 핀 조명을 받은 것처럼 밝았다. 그렇게 보니 로비가 거대한 극장의 무대 같았다. 그러나 무대에서 관객에게 방백을 읊고 있어야 할 프런트 직원은 따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카운터로 다가가며 핀 조명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눈으로 좇았다. 조명은 독수리 동상 바로 아래쪽에 달려있었다. 빛 뒤의 어두운 동상을 올려다보다 눈이 부셔 그만 시선을 내렸다. 인제 그만 직원을 찾아야 했다. 텅 빈 카운터에는 은색의 종과 함께 안내문이 세워져 있었다.


    '24시간 직원 대기 중. 부재 시 종을 울리시오.'


    동그란 버섯 모양의 종의 꼭대기에는 버튼이 있었다. 어릴 적 교실에 이런 황동색의 종이 있었던 기억이 났다. 손바닥을 펴 그 시절 그때처럼 종을 내리치려는데 무엇인가가 내 시선을 끌어 손을 멈췄다. 붉고 노란빛이었다. 그 빛의 정체는 타오르는 장작불로 체크인할 때 내 시선을 빼앗았던 난로와 소파 공간이 보였다. 난로는 거대한 불을 입에 머금고 이 어두운 로비 한구석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손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요양원 구경을 하러 나온 것이니 키카드 용무는 조금 이따 보아도 되겠지. 직원이 24시간 대응할 수 있는 것은 확인했으니까.



    방을 처음 나왔을 때의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뿐사뿐 다가갔다. 소파에 거의 다 다다라서 나는 멈칫했는데, 난로 가까운 자리에 이미 한 사람이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정체는 한 노인이었다. 파자마 차림에 아라베스크 문양의 두꺼운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그는 내 인기척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불길을 바라보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노인이라는 타인의 존재가 조금 불편했지만 이 멋진 공간을 그대로 지나칠 수도 없었다. 처음에는 노인과 정반대의, 난로와 거리가 가장 먼 자리에 앉으려다가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노인과 거리를 두려 했지만 나도 가까이서 불을 쬐고 싶었다. 거기다 저 난로의 불은 왜 이렇게 멋지게 넘실거리고 있는지.

    나름의 결의를 다진 나는 노인의 맞은편 자리로 갔다. 막상 가보니 공간이 생각보다 넓었다. 맞은편 노인의 자리와 거리가 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무릎을 맞대고 앉는 느낌은 없었다. 우려와 달리 개인의 공간을 침해할 정도는 아니었달까. 내가 이 자리에 앉는다고 해서 노인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의식적으로 노인을 쳐다보지 않으며 자리에 앉아 고개를 그대로 90도로 꺾은 채 난로를 바라보았다.

    타닥, 타다닥

    장작이 불로 산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은은한 불 냄새가 코에 닿았다. 불의 강렬하지만 불규칙한 온기가 나를 어루만졌다. 나는 살짝 땀이 나기 시작할 같은 느낌이 들어 가운을 풀고 노인의 담요처럼 어깨에 가볍게 걸쳤다.

    한동안의 정적이 맴돌았다. 이곳 말고 뒤편의 다른 소파 구역에 있는 텔레비전은 전원이 꺼져서 지금 로비에 들리는 소음은 오직 나무가 탁탁거리며 타는 소리뿐이었다. 난로의 속삭임 말고는 서로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스스로 이 정도면 제법 공간에 잘 녹아들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홀로 만족하고 있을 때 앞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로군."

    "네?"


    나는 그제야 계속해서 난로 방향으로 꺾었던 고개를 풀고 앞을 보았다. 노인의 시선은 여전히 난로에 가 있었다. 그 모양으로 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기에 나는 방금 나를 부른 것이 노인이 아닐 리가 없음에도 다시 한번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내 무의식 안에 그의 존재감이 커서 환청을 만들어 낸 건가?

    그가 내 대답에 다시 대답한 것도 아니었기에 합리적인 의심으로 여겨졌다.

    만약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꿈이라면? 사실은 아직 내가 약에 취해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는 거라면?

    영화 ‘식스센스’와 같은 내용을 그리고 있는데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듯 내 헛생각들을 끊어내고 말했다. 여전히 불을 바라보는 같은 자세로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501호의 동양인이 자네로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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