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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Sep 27. 2024

챕터 13. 노인

    13. 노인




    나는 당황해서 눈을 이리저리 굴릴 뿐이었다. 정신없이 움직이느라 초점 안 맞는 시야에 디즈니 미녀와 야수에 나왔던 밤의 성 풍경과 비슷한 것들이 휙휙 지나갔다. 제정신이었다면 눈여겨 볼만한 멋진 배경이었겠지만 지금은 전혀 의식할 수 없었다.

    뭐지, 이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개인정보 유출인가?

    급히 정신을 다잡고 위아래로 노인을 훑어보았지만 전혀 요양원 직원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직원으로써 투숙객의 인상착의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 말 못 하고 ‘이 사태에 대해 요양원 측에 강력하게 항의를 넣어야 하나’ 같은 상황 해결에 전혀 도움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노인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프허허허, 많이 놀랐나 보군. 미안하네, 사과하지.”


    정적 끝에 먼저 말문을 튼 노인 덕분에 막혀 있던 내 입도 열렸다.


    “네, 조금 놀랐습니다. 저를 어떻게 아신 거죠?”


    노인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다시 껄껄껄 웃었다.


    “자네 이웃일세.”


    이웃이라면… 아까 문을 열자 보였던 502호실에 숙박 중인 건가?


    “아, 그러셨군요. 502호나 503호에 묵으시나 봅니다. 네, 제가 501호에 새로 들어왔습니다. 혹시 제가 지내는 며칠 동안 시끄러웠나요?”


    여기에 들어온 이후로 종일 누워서 잠만 자던 내가 시끄러웠을 리는 만무했지만, 자연스러운 대화 연결을 위해 조심스레 물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물 흐르는 듯한 대화를 위해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묻는 것은 내가 갈고닦은 소통의 기술 중 하나다. 나는 대화의 방향을 내가 원하는 쪽으로 이끌 수 있어서 좋고, 상대는 나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면서 만족감을 받을 수 있다. 서로 기분이 좋은 상태로 대화가 이어지니 친밀감을 빨리 쌓을 수 있는 것이다.

    내 공손한 질문에 담요를 목으로 한껏 끌어올린 노인이 답했다.


    “아닐세. 우리 요양원은 방 간의 방음이 무척이나 뛰어나지. 그래서 자네가 방 안에서 어떤 음란한 짓을 했는지는 다행히도 알지 못해.”


    이상한 노인네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작게 찌푸려지는 미간과 좌우로 벌려지는 나의 콧구멍. 처음부터 이어져 오던 대화의 온도를 완전히 벗어난 발언을 하고도 노인의 표정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노인이 내뿜고 있던 고고한 자태 덕분에 생겼던 약간의 경외심과 경계심, 그리고 나보다 나이 많은 연장자에 대한 존중이 노인의 마지막 문장 때문에 순식간에 절반 정도 팍 꺾여 나갔다. 덕분인지 내 다음 말은 좀 더 편하게 나갔다.


    “뭐, 뭐예요? 일단 그래서 영감님은 어디에 살고 있어요? 502호? 503호?”

    “사실 그렇게 이웃인 건 아니네.”


    뭔 소리야 이건 또?

    그렇게 이웃이 아닌 건 어느 정도 이웃인 사이를 말하는 걸까? 그렇게 이웃이 아니면 저렇게 이웃 정도는 되려나? 나는 이웃으로서 노인과 나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 보며 황당하다는 말투로 물었다.


    “그럼 얼마나 이웃인데요?”

    “음… 적당히?”

    “살다 살다 적당히 이웃인 사람을 또 만나보네요. 반갑습니다.”


    내 비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은 껄껄껄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오래된 종소리처럼 로비로 울려 퍼졌다.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 위엄 있는 목소리가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제대로 된 내용을 말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로 하는 말 사이사이 이상한 소리를 섞어 넣는 것이 노인의 변태적인 취향이라니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었다. 웃음을 멈춘 노인은 팔을 무릎에 기대며 몸을 앞으로 당겼다.


    “나는… 자네 맞은편 동 건물에 살고 있지.”


    노인의 목소리는 의미심장했다. 그는 ‘맞은편’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눈썹을 치켜올려 비언어적 강조를 두었다. 마치 그가 내포한 뜻을 알아들으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노인에게는 불행하게도 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음… 그런데요?”


    나도 ‘그런데요’라는 단어를 말할 때 눈썹을 치켜올려 비언어적 강조를 해주었다. 내가 지금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는 뜻을 내포한 움직임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노인 쪽이 당황했는지 눈동자가 잠깐 흔들리고는 몸을 앞으로 조금 더 기울이며 다시금 말했다.


    “‘맞은편’이라네.”


    이번에도 한껏 올라간 노인의 눈썹은 직전과 다르게 다시 내려오지 않았다. 내 대답을 듣기 전까지 계속해서 올라가 있을 심산인 듯했다. 나도 그런 노인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답했다.


    “그런데요?”


    나도 눈썹을 잔뜩 올리고 노인을 따라 다시 내리지 않았다. 나의 이번 대답도 노인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했는지 하얗게 늙은 눈썹은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그 상태로 두 올림 눈썹들의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노인의 지긋한 나이를 말해주는 이마 주름이 눈썹을 올리자 더욱 깊게 파였다. 난로의 빛 때문인지 주름의 굴곡이 더욱 도드라져 사구 가득한 사막의 항공사진이 떠올랐다. 그 상태로 4초 정도가 지나자 눈썹을 들어 올리는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하는지 노인의 미간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 상태를 더 유지하기 힘들었던 노인은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먼저 원상복구시키며 원상태로 돌아갔다.


    “자네, 아직 이 요양원에 대해 잘 모르나 보구먼.”


    그제야 나도 눈썹을 내리고 몸을 다시 세웠다.


    “예, 체크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이것도 이미 알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인은 내 대답에 혼잣말로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지…’라고 중얼거리더니 아주 맨 처음의 자세로 돌아가 우수에 빠진 눈으로 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몇 초의 정적 후에 나지막이 그가 읊조렸다.


    “이 난로가 있는 여기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지.”

    “...”


    이제 와서 처음의 자세로 돌아가 분위기 있는 말을 한다 해도 처음에 느껴졌던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는 돌아오지 않았다. 감흥을 잃어버리니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내게서 돌아오는 대꾸가 없자 노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히 우수에 빠져 있는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난로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 어머니가 난롯가에서 감자를 구워주시던 것이 내가 가장 좋아하던 음식이었거든.”

    “...”


    역시나 답을 하지 않았다. 침묵은 어떤 말보다 강한 소리를 내기도 한다. 나의 연이은 침묵에 노인은 곁눈질로 내 동태를 확인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황급히 다시 시선을 난로로 돌리는 모습까지 보였다.

    순간 살면서 마주했던 몇 번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보통의 사람은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대화할 상대가 적어지곤 한다. 그렇게 되면 대화라는 행위 자체가 그리워진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로 단절의 확장은 곧 외로움의 증폭으로 이어지고, 이는 말이 적던 사람도 점차 말이 많아지기 시작하게 한다. 그들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고, 나도 언젠가 그들의 길을 걷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여유가 있으면 그들의 말 상대가 되어 주고는 했다. 그러다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 노인들 때문에 몇 번 난감한 상황에 부닥쳐본 나는 무조건적인 호의보다는 적절한 선에서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런 상황 중 하나이리라.


    “사실은 제가 열쇠 없이 나왔다가 방문이 그대로 잠겨버려서요. 먼저 해결할 일이 있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아이고, 멍청하구먼… 그래, 잘 가게. 잘 해결되기를 빌겠네.”

    “네, 그럼…”


    예의 바른 몸에 밴 습관대로 고개를 꾸벅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의 아쉬워하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카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측은함을 느낀 이후로는 불쌍한 사람을 남겨두고 가는 기분이라 기분이 썩 개운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의 말동무가 되어주기 위해서 이 야밤에 몇 시간이고 붙잡혀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잠깐만, ‘멍청’ 뭐요?

    기어들어 가는 늙은 목소리로 애처롭게 건넨 마지막 인사말이라 말에 포함된 모든 내용이 절절한 작별 인사처럼 들렸었나 보다. 나는 뒤늦게 노인의 마지막 인사말 분석을 마치고 인상을 팍 찌푸리며 뒤를 돌았다. 회전축 역할을 하는 발끝에 힘이 잔뜩 들어가며 몸이 180도 빠르게 회전했다. 눈에는 다시 처음의 모습으로 불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이 들어왔다. 멀리서 바라보니 다시 처음에 느꼈던 경외감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한 프레임에 담긴 노인과 난로의 모습은 신비한 무언가가 있었다. 왠지 언제까지고 저 자리에 저 모습 그대로 있을 것 같은, 오래된 동화 속 장면 같은 느낌에 발끈했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노인에게 성내는 것을 포기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카운터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주저하지 않고 종을 울렸다. 짧은 시간 사이에 노인에게 기가 다 빨렸는지 이제는 빨리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땡

    맑은 금속음의 울림과 함께 저쪽에서 직원이 빠른 걸음으로 나타났다. 저기 당직 사무실이 있는 것 같았다. 마법처럼 소환된 직원은 야간 당직이 조금 피곤한지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종을 울리고 몇 초 안 되어 나타난 것을 보면, 만약 용무가 없는 동안 당직실에서 선잠을 자고 있지 않았다 해도 엄청난 반응속도였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직원은 친절한 미소를 띄웠지만, 피로한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약간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제가 실수로 문을 잠가버렸어요. 열쇠를 방 안에 두고 나왔거든요.”

    “아, 그랬군요. 그런 일은 자주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마스터키로 금방 해결해 드릴게요.”


    직원은 품속에서 마스터키 카드를 꺼내며 나를 따라 방으로 걸어갔다.


    “여기 처음이시지요? 처음엔 조금 헷갈릴 수 있죠.”

    “네, 어제 도착했어요. 그래서 아직 익숙하지 않네요.”

    “방이 자동으로 잠기는 것 외에도 이 호텔은 구조도 조금 복잡하긴 해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프런트 데스크에 말씀해 주세요.”

    “덕분에 살았어요.”

    “아닙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또 필요하신 건 없나요?”


    그는 여전히 친절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와 움직이면서 조금 잠도 깼는지 정신도 아까보다 또렷해 보였다.


    “아뇨, 이제 괜찮아요.”

    “네, 편안한 밤 되십시오. 참고로 저희는 24시간 룸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심야 시간에도 간단한 음식을 주문하실 수 있으니 야식이 필요하시면 이용해 주세요. 방에 비치된 메뉴판의 가장 뒤 파트가 심야 시간 메뉴들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좋은 밤 보내세요.” 


    나는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전했고, 직원도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뒤돌아 떠나가는 직원을 확인하고 문을 조용히 닫았다. 방 밖에 고작해야 30분 나가 있었지만 일주일 만에 집에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긴 모험이었어.

    외출용으로 걸쳤던 가운을 벗어 길쭉한 데이베드에 던졌다. 짧은 거리를 날아가 잔뜩 흐트러진 가운의 모습이 마치 내 모습 같았다.

    요양원에서 직원 아닌 사람을 만나는 건 처음이었는데 그게 하필 이상한 노인네였다니! 혹시 여기에 주요 고객들이 전부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알고 보니 내가 머물게 된 이곳이 정신병원이었고, 안젤리카가 나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렸다는 문장을 떠올리자 무서운 상상이 들었다. 아까도 언급한 디즈니의 만화영화 ‘미녀와 야수’에서 악당 개스톤 일당이 주인공 벨의 아버지 모리스를 억지로 정신병자 취급하며 감금해 버렸었지 아마.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투숙객들 모두 정신이상자들이라 그곳에 뚝 떨어진 내가 겪게 되는 에피소드들이 가득한 소설을 써볼까? 그나저나 정말 안젤리카가 나를 정신병원에 보내 버린 것이라면 내 병명은 어떤 것으로 해서 입원시켰으려나? 흠, 나를 늘 애완견 대하듯이 했으니 ‘분리불안장애’려나?

    사실 따지자면 나는 훌륭한 애완견이었다. 분변도 잘 가리고, 혼자서도 잘 지내서 분리불안과는 거리가 멀었다. 몸과 정신 모두 건강해서 기르기에는 아주 최고였을 것이다.

    잠깐만, 왜 내가 지금 애완견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거지?

    침대 앞에 서서 똥 같은 이야기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내 뺨을 가볍게 톡톡 쳤다.

정신 차리라고.


    침대 속으로 돌아온 나는 아까 만난 그 노인에 대해 이런저런 추리를 해보았다. 그 영감이 내가 501호에 사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것은 아직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까 올라오는 길에 직원에게 물어봤으면 답을 알 수 있었을까? 노인은 아직도 그 자리에 그 자세로 있을까? 진짜 사람이기는 했던 걸까?

    나는 눈을 감고 오늘 노인과 나눴던 대화들을 곱씹어 보았다. 잠깐 생각해 보니, 내가 받은 임팩트에 비해 실제로 둘 사이에 오고 간 대화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다 어느덧 사고의 흐름은 삼천포로 빠져 과거의 추억들로 이어졌고, 노인과 대화를 했던 장소와 비슷한 배경의 20살 가을 무렵의 기억을 헤엄치다가 어느 순간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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