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터의 컴퓨터를 두드려 빠르게 내 방 번호를 확인한 여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식당 내부로 안내했다.
“미스터 정, 반갑습니다. 처음 뵙네요?”
내 신원을 확인한 직원이 곧바로 친근한 척 이름으로 인사하자 조금 놀랐다. 아무래도 이 정도 급의 고급 숙박시설에는 머물러본 적이 없던 터라 이런 밀접한 호스피탈리티는 익숙지 않았다. 그래도 체크인하는 날과 마찬가지로 확실히 대접받는 기분이 들어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대접이라면 멕시코에서도 받긴 했는데…
대접이라기엔 ‘대접’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것들과 조금 다른 결의 대접이었지만, 안젤리카의 총애를 받는 나는 모르싸 중심부에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다만 나는 원하는 게 많지 않았을뿐더러, 실상 대개는 내가 아닌 안젤리카가 원했던 것들이었다. 그녀가 내게 가끔 원하는 것을 말하면 그녀가 일을 하는 동안 내가 요청해서 준비를 해두어야 했다. 줄에 묶인 꼭두각시 인형극이자, 갑자기 왕이 되어버린 어린 세자의 수렴청정.
모르싸와 엮인 이후로의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기간이었기에 지금 당장은 멕시코와 모르싸를 벗어났다 하더라도 자꾸만 그때가 떠오르고, 무엇이든지 그때와 비교하게 되는 것을 스스로도 멈출 수 없었다. 이러다가는 요양원의 의료반에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가야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병명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줄여서 ‘PTSD’. 여기에 정신과 전문의도 있겠지?
“네, 며칠간 몸이 좀 안 좋았거든요.”
“오늘은 좋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그렇죠, 이곳 의사 선생님이 실력이 좋으시더라고요.”
“아, 닥터 쿠퍼 말이죠?”
“네, 맞아요.”
대화는 이어졌지만 사실 식당 내부를 구경하느라 대화에 집중을 못 하고 있었다. 식당은 작지 않은 규모로 내부로 들어서자 역시나 부르기뇽 요양원다운 높은 층고와 엔틱 한 무드의 인테리어가 나를 맞이했다. 화려한 양식의 의자와 테이블 위에는 하얀 식탁보가 펼쳐져 있었다. 식탁보는 정말 하얗다고 표현할 수 있었는데, 세상에 갓 태어난 천사의 순백색으로 우리 라바나에서 쓰던 식탁보와는 때깔부터가 달랐다.
평소에 내가 그렇게 강력한 표백제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 라바나에서의 기억은 자연스레 차메로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졌고,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까지 이어지자 그리움에 작게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혹여나 소식이 뜸한 내게 신경을 끄라는 당부를 무시하고 나를 찾지는 않을는지.
식당 왼편에는 내부가 보이는 개방형 주방이 길게 있었다.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안쪽 공간은 넓은 것 같았고, 온갖 스테인리스 조리도구와 조리대가 반사하는 은빛 반사광이 가득했다. 그 앞으로 역시나 주방을 따라 길게 나와 있는 진열대에 뷔페식의 아침 식사를 위한 요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옮겨 테이블 구역 가운데를 보면 커다란 네모 모양의 아일랜드 진열대가 있었고, 그 사각형 음식의 섬 각 변에는 요리사들의 손길이 비교적 덜 필요한 베이커리들과 과일들, 콜드푸드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식당 안쪽 실내 공간에서 식사를 원하시나요 아니면 통창으로 되어있는 창가 자리를 원하시나요?”
우리가 식당 중간까지 걸어 들어왔을 때 직원이 나의 좌석 선택 기호를 물었다.
“딱히 상관은 없… 아, 창가 자리로 할게요.”
그래도 나름 차메로의 식당에서 오래 일했다고 식사하는 테이블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에 대해서는 무덤덤해진 나였다. 먹기만 할 수 있다면 자리는 어디든 상관없다는 주의라 그렇게 대답하려는데, 식당 안쪽 벽면이 전체가 창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높은 층고임에도 바닥부터 천장까지 뚫린 유리를 통해 밝은 햇빛이 들어오고 있어 내 시선을 확 끌었다. 어쩐지 저 밝은 햇살들이 며칠을 침대에 박혀 있는다고 꿉꿉해진 내 몸을 소독시켜 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군대에서 질리도록 했던 일광소독. 선크림을 바르지 않은 상태였지만 과감히 창가 자리로 결정했다. 여기는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게 내 피부가 조금 탔다고 성을 낼 안젤리카가 없었다.
식당의 전체적인 구조는 테이블 구역이 ‘ㄱ’ 자 모양으로 배치된 구조로, 넓은 오픈 키친을 왼쪽으로 끼고 좌로 꺾인 모양새였다. 식당 안쪽의 가로 방향 구역에는 시원하게 뚫린 통창을 따라 입구에서는 키친에 가려 보이지 않던 테이블들이 또 잔뜩 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가로 방향의 구역은 세로 방향의 실내 구역과 다르게 모던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입구 근처의 세로 구역에는 클래식한 색감인 갈색, 금색, 붉은색이 주를 이뤘다면, 주방이 끝나는 경계를 기준으로 바깥쪽 가로 구역은 검은색, 흰색, 회색의 색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공간을 디자인한 사람은 두 가지 시대의 인테리어를 한 공간에 섞고 싶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침 식사 시간의 끄트머리에 가까운 9시 40분이 다 되어 내려온 탓인지,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손님들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나를 제외하고는 다섯 테이블 정도에 손님들이 있었는데 한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모두 혼자 식사하는 1인 손님들이었다. 요양원이라는 특성상 그런 것인지 2인석의 손님도 나이 지긋한 노부부였다. 멀리서도 그들에게서 여유와 소위 말하는 ‘부티’를 느낄 수 있었다.
여하튼 식당에 전체적으로 손님이 적은 덕분에 나는 내가 원하는 자리 어디에든 앉을 수 있었다. 내가 자리를 정하고 테이블 앞으로 가자 직원이 내가 바로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빼주었다.
아니, 이럴 것까지는…
처음 받아보는 친절에 과하게 황송한 느낌이었다. 모르싸에서의 나는 귀빈이라기보다는 요주의 인물 취급이었지. 연신 감사의 표현을 하고 앞을 보니 테이블 위에는 식기와 냅킨이 단정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라바나 오픈 준비를 하면서 테이블 세팅을 도맡아 하던 때가 떠올라 다시 울컥했다. 여기와는 다른 느낌이지만 내가 미적 감각을 십분 발휘해 세팅한 테이블도 나름 고즈넉한 맛이 있었다고 자부했다.
요동치는 내 속마음을 모르는 직원은 그들의 임무 완수를 위해서 음료 주문을 받았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가볍게 시원한 탄산수로 주문했다. 커피는 방에서도 잔뜩 마실 수 있으니까. 그녀는 간단한 내 주문에 금방 얼음 잔과 산펠레그리노 한 병을 가져왔다.
“추가로 음료를 주문하시거나 따로 단품 메뉴를 주문하고 싶으시면 언제든 저희를 불러주세요.”
직원이 떠나고 자리에서 몸을 틀어 천천히 식당을 둘러봤다. 수십 가지가 되어 보이는 음식들이 모락모락 김을 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기가 확 돌며 슬펐던 감정은 사라지고 갑자기 휴가를 왔다는 느낌으로 치환되었다.
이건 오랜 시간 감금되어 있던 것에 대한 보상인가? 이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정말로 주변에 나를 감시하고 있는 모르싸 놈들도 없는 거지? 그렇다면… 자유다!
위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완전한 공복이었지만 에너지가 단전에서부터 끓어올라 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 뷔페 음식을 담기 위해 접시를 찾아 나섰다.
모든 음식이 맛있었다. 특히 베이커리류가 상당한 풍미를 뽐냈기에 이미 두 접시를 비워 배가 부른 상태에서도 자꾸만 손이 갔다. 그러나 애초에 대식가가 아니었던 나는 네 접시 째서 결국 포기를 선언했다. 위에서 뇌로 다급하게 보내는 만복의 신호를 억지로 무시하며 몇 조각 더 먹어보는 기염을 토했지만, 그래도 결국은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주위에 이 항복선언을 들어줄 사람은 없었지만, 대신에 뱃속에는 대신해서 선언을 들어줄 음식물들이 가득했다. 가뜩이나 비좁은 위장에 비정상적으로 가득 들어찬 음식물들에게는 더 이상의 경쟁자가 투입되지 않는다는 것은 희소식이었다.
그나저나 여기 조식은 한 끼 식사권 가격이 얼마일까? 모르긴 몰라도 7만 원 돈보다는 비싸지 않을까? 아무리 용을 써도 네 접시를 넘기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들은 뷔페 형식의 식당은 늘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지금 여기 부르기뇽의 식당들에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손해를 보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투숙비를 대는 안젤리카니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묘한 감정이 떠올랐다. 어쩌면 모르싸를 향한 소소한 복수를 가할 기회가 생긴 걸지도 몰랐다. 첫날 체크인을 하며 나의 비용결제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는 계좌가 바닥나 요양원에서 맨몸으로 쫓겨나는 민망하고 곤란한 상황을 걱정했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그 걱정이 안젤리카에게 재정적 타격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발칙한 발상으로 바뀌었다. 나의 무분별한 룸서비스 공격이 과연 그녀 대단하신 가문과 그들이 축적한 재산에 얼마나 타격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 스스로 어떠한 움직임이라도 가져갔다는 위안이 되어줄 것 같았다.
옛말에는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낙숫물이 주춧돌을 뚫는다’ 같은 작은 것들의 위험함을 알려주는 말들이 많다.
그래, 결심했어! 어디 한 번 해보자. 작은 룸 차지가 거대한 계좌 전체를 녹이는 그날까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목숨이 위험에 처해질지도 모르는 거사를 진행 중인 안젤리카에게 작더라도 이런 짓을 해도 되나 싶은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 마음을 느끼자 혼란스러움이 일었다.
내가 왜 그녀를 걱정해주고 있지? 나에게 그녀란 존재는 대체 뭘까? 원수? 보호자? 아니면 그녀의 말마따나… 애인?
분명히 안젤리카는 나를 납치하고 장기간 억류를 했다. 이 문장만 보면 당장에 경찰특공대를 파견해 사살해버려야 할 것 같은 중범죄자이지만, 그녀에게서 종종 느껴진 것은… 확실한 애정이었다.
물론 카타리나의 처형일 이후로 상냥하고 부드러운 기억만 있지는 않았다. 더 잦아진 학대와 겁박. 그렇게 많이 뒤틀려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확실한 것은 중간중간 그녀의 애정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내 생활부문만 돌아보자면 자유롭지만 않았지 먹고살만한 환경이었다.
완전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져버린 것 아냐?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잇는 일본의 영화 ‘완전한 사육’이 떠올랐다. 그러다 ‘사육’이란 단어에 애완견처럼 지냈던 지난 세월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 소름이 돋아오는 양팔을 벅벅 긁으며 부정했다. 진짜 내 얘기 같잖아! 인간 애완견이라니.
“식사는 다 하셨나요? 접시를 치워드릴까요?”
처음에 자리를 안내해 줬던 직원이 어느새 다가와 여전한 상냥함으로 물었다. 나는 심오한 내면의 대화를 나누고 있던 터라 직원이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덕분에 한 박자 늦었지만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로 무안해지기 전에 답을 할 수 있었다.
“아, 정말 맛있었어요. 정리 부탁드릴게요.”
“디저트는 드셔보셨나요? 음료는 어떠세요? 한 잔 더 드릴까요?”
나는 웃으며 사양했다. 오전 업무 마감이 가까워진 직원에게 추가로 일을 더 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사실 지금 내 위장에 물 한 모금도 더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는 점이 더 컸다. 직원이 자리를 뜨고 정신을 차려보니 식당에 남은 손님이 나 혼자뿐이었다. 가장 늦게 온 손님이기도 했지만, 너무 오래 앉아 있기도 했다. 내가 적당히 일어나 줘야 식당의 인부들도 조금의 휴식을 가진 다음 오후 장사를 또 시작할 수 있을 것이었다. 부른 배를 부여잡고 일어나 식당을 나섰다. 작은 움직임에도 위장의 음식물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방으로 돌아가 낮잠을 더 잘까 했었다. 아무 계획이 없을 때는 낮잠이 최고다. 뜨거운 하바나에서 몸에 익은 생활방식이었다. 하바나뿐만 아니라 사람을 질리게 할 정도의 더위를 가진 나라들의 공통적인 특성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하바나가 아닌 알프스였고, 지금 내 몸 상태는 낮잠에 적합한 상태가 아니었다. 며칠간 잠을 몰아 잔 나머지 몸에는 충분한 수면 마일리지가 누적되어 잠이 올 것 같은 기미 따위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이 만복의 상태로 침대에 누웠다가는 숨을 내쉴 때마다 음식들이 옹달샘처럼 퐁퐁퐁 입으로 거꾸로 솟아 나오려 할 것 같았다.
결론은 자연스럽게 나왔다. 나는 가까운 엘리베이터로 가려는 발걸음을 틀어 낮의 요양원을 탐방해 보기로 했다. 아침을 먹은 식당은 메인 로비의 체크인 카운터 뒤편 복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로비 쪽으로 걷다 보니 어느덧 머리 위의 천장이 높아지면서 널찍한 로비에 도착했다. 내 오른쪽으로 첫날에 시선을 끌었던 고풍스러운 엘리베이터와 독수리 동상이 지나갔다. 그 아래의 메인 카운터 직원이 나를 발견하고는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프란시스 씨를 따라 처음 요양원에 들어왔을 때도 저곳에 서서 내게 인사를 했던 사람이었다. 비록 대화 한 번 해본 적 없었지만, 그래도 전에 본 적이 있다는 내적 친밀감에 괜히 반가움이 일었다.
아침의 로비는 사람은 많이 없었지만 어딘가 활기찬 구석이 있었다. 얼마 없는 사람들이 바쁘게, 그리고 에너지가 넘치는 동작으로 움직이고 있어서일까. 어쩌면 이 장면이 부르기뇽 요양원의 일상을 나타내는 모습일지도 몰랐다. 하긴 아직 내가 본 것이라고는 정신없는 체크인 당시의 모습 잠깐과 어제 밤늦게 탐험을 나왔을 때 본 모습뿐이니까.
어젯밤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그 노인이 생각났다. 정말 이상한 노인이었다.
아침 식사는 챙기셨을까?
노인의 식사여부를 챙기는 내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한창 외국을 떠돌아도 뿌리는 동방예의지국의 한국인이라는 건가? 어제 한밤중임에도 나보다 늦게 방에 돌아갔을 걸 보면 거의 아침이 되어서 잠자리에 들었을 텐데 그럼 아직 한창 자고 있을지도 몰랐다. 나이가 들면 밤잠이 늘고 아침잠이 없어진다던데, 정확히 그 반대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시선을 돌려 어제의 난로 구역으로 향했다. 어두운 로비 구석에 따뜻한 온기를 비추며 활활 타오르던 난로의 불은 생명을 잃고 냉기만이 맴돌고 있었다. 검정색 난로 속에는 검은 잿더미가 장작과 불길을 대신해서 자리하고 있었다. 마침 직원이 빗자루와 자루를 들고 난로 주변과 난로를 치우고 있었다. 어젯밤 온기의 흔적은 모두 빗자루에 쓸리고 자루에 담겨 밖으로 반출되었다. 노인과 있었던 일이 꿈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시 어제의 자리로 돌아가 노인이 앉았던 소파와 난로를 한 프레임에 담아보았다. 역시 주인공이 빠진 그림은 어제만큼의 감흥이 없었다.
막상 로비로 오긴 했는데… 이제 어디로 간담?
난로에 관심이 떨어진 나는 다음 행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발걸음 걷는 대로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것도 좋아했지만 조금만 두리번거리다 보니 정문 입구 옆 벽에 붙어있는 동판 건물 안내도가 보여 다가갔다.
우선 전체적인 이곳의 구조를 살폈다. 요양원은 밴을 타고 오면서 봤던 모습처럼 역시나 ‘ㄷ’ 자(‘U’ 자) 모양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 건물의 가운데에 있는 메인 입구를 기준으로 내 방이 있는 윙은 ‘우측 윙’, 반대편 윙은 ‘좌측 윙’으로 불리고 있었다. 노인의 말대로라면 노인은 좌측 윙에 있다는 거겠지. ‘맞은편’이라는 단어와 노인의 잔뜩 올라간 미간이 떠올랐다.
검지 손가락으로 나도 모르게 기억을 따라 올라간 미간을 눌러 내리면서 다시 안내판을 탐독했다. 병동 층은 3층부터로, 그 아래인 1층과 2층에는 주로 로비, 식당, 체육시설, 의료시설, 행사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래로는 지하도 한층 있었는데, 그곳의 일부는 아케이드로 몇몇 럭셔리 부띠끄 매장들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떤 요양원이 명품을 팔아?
내가 머무는 우측 윙과 달리 좌측 윙은 객실들이 복도 양쪽이 아닌 건물 바깥쪽 방면에만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고, 건물 안쪽 방향, 즉 우측 윙을 바라보는 안쪽이 깎여나간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깎여나간 공간을 활용해 좌측 윙의 2층 옥상에 작은 야외 수영장과 길쭉한 야외 테라스를 만들어 놓았다. 다시 말해 좌측 윙의 3층으로 가면 야외 수영장에 갈 수 있었다.
야외 테라스는 건물 중앙의 메인동 2층 옥상에도 하나 더 조성되어 있었다. 요양원의 객실은 양쪽 윙에만 몰려있었으므로 윙 사이의 메인동 3층부터 해서 그 위로는 복도와 스태프 룸을 제외하면 많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좌측 윙과 같이 복도 바깥쪽의 많은 면적을 깎아내어 2층 위의 옥상에 상당히 넓은 야외공간을 마련해 놓을 수 있었다.
그래, 우선 가장 넓은 메인동 위의 야외 테라스로 나가보자.
그렇게 정해진 목적지 메인동 루프탑 테라스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홀로 들어섰다. 창문을 통해 햇볕이 강하게 들어서 자연스레 손으로 빛을 가렸다. 아까 식사하며 당당하게 햇볕을 받아낸 얼굴의 피부에 자극이 누적되었는지 조금 근질근질한 느낌이 있었다. 지금 내 상태를 고려하면 바로 테라스로 가기보다는, 우선 방으로 돌아가 세면을 한 뒤 선크림을 바르고 다시 움직이는 것으로 목표를 변경했다. 이미 아침 식사를 하며 과감하게 창가 테이블에 앉은 것으로 오늘 치 자외선을 모두 받아놓았다. 더 이상의 광합성은 비타민D의 과잉으로 이어진다고.
내가 방을 다시 나왔을 때는 오후 1시로 통상적인 점심 식사 시간으로 볼 수 있는 구간이었다. 내가 점심을 먹으러 이 시간에 나왔냐고? 그럴 리가!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던 과식의 불편함은 사라졌지만 아침 식사로 점심치의 음식물까지 섭취한 내 위장은 여전히 더 이상의 음식물을 거부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세면만 하고 다시 나오겠다는 다짐을 하며 방으로 돌아갔었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푹신한 침대 근처로 가자마자 그대로 블랙홀 같은 마력에 이끌려 게으르게 퍼질러있다가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나온 것이다.
나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복도를 걸었다. 복도에 깔린 도톰한 카펫 때문에 실제로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캐리비안에 살면서 슬리퍼와 플립플랍이 일상이었던 내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들리는 듯했다.
옷차림은 여전히 입고 온 반소매, 반바지에 위에는 가운을 걸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곳에 정말 몸만 덩그러니 보내졌기에 다른 옷가지라고는 없는, 문자 그대로 단벌 신사기 때문이었다. 지금 걸치고 있는 것 말고는 방의 옷장에 걸린 안젤리카의 털코트뿐이었다. 개인 소지품도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발라서 지니고 있는 선크림 한 통이 전부였다.
처음에는 방을 나서기 전에 털코트를 걸쳤었지만 잠깐의 고민 후에 다시 요양원의 가운으로 바꿔 걸치고 나왔다. 안젤리카의 털코트는 여성복 치고는 거친 야수 같은 느낌(안젤리카의 모든 것에는 중성적인 매력이 있었다)을 내뿜고 있었기에 내가 입기에 너무 여성스럽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다만 이 코트가 다른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줄 수도 있겠다는 우려에서였다.
이 코트가 너무 비싸 보일까 봐? 여기서 말하는 위화감이라는 것은 코트의 가격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식당에서 본 사람들도 어디까지나 편안한 실내용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다른 투숙객들의 외출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들이 가지고 온 옷가지가 얼마나 비싸 보이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비교를 할 수 없었다. 투숙 비용이 비싼 곳인 만큼 이 털코트가 평범해 보일 정도로의 놀라운 가격의 옷차림을 하고 온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
다시 말하지만 이건 가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과 상관없이 코트가 뿜어대는 야수성이 문제였다. 이 거친 텍스처에서는 짐승의 기운이 묻어났다. 슬리퍼를 끌며 반소매와 반바지를 입었지만, 그 위에는 회색늑대라도 직접 잡아서 만들었을 것 같은 코트를 입고 다니는 동양인이라니. 야쿠자나 삼합회의 일원으로 보인다 해도 무리가 없었다(그러고 보니 사실 내가 멕시코 제1 카르텔에서 오기는 했다.) 무엇보다 이 코트는 늑대 한 그룹을 모조리 뜯어내어 만든 건지 의심될 정도로 엄청나게 크고 무거웠다. 덕분에 비행장에서부터 여기에 오기까지는 요긴하게 사용되긴 했지만 이 코트를 보고 로비로 나갔다간 내가 어디 순록 사냥이라도 나가는 줄 알고 직원들이 사냥용 엽총과 사냥개를 준비해서 쫓아올 것 같았다.
그럴 수야 없지.
내가 원하는 건 피 튀기는 곰사냥이 아니라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노니는 평화로운 산책이자 요양원 탐사니까.
호출한 엘리베이터는 금방 도착했다. 나는 3층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5층에서 3층으로, 단 두 층만 이동하라 명령받은 엘리베이터는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홀에서 나와 메인 동으로 이동했다.
3층의 메인동은 5층의 메인동보다 훨씬 밝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5층의 것보다 채도가 조금 빠지고 밝기를 올린 인테리어와 테라스의 큰 창과 문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볕의 시너지 때문인 것 같았다. 창 너머로는 생각보다 더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상아색 석조 바닥과 난간, 그 사이에 놓인 선베드와 파라솔들이 보였다. 이미 소수의 몇 손님들이 선베드 몇 개에 자리를 잡고 누워 일찍이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나도 밖으로 나가보기 위해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찬 공기가 내 얼굴을 한번 쓸며 지나갔다. 다행히 문을 바로 열었을 때 순간적으로 생기는 기압 차에 의한 잠깐의 돌풍을 제외하고는 바람이 크게 없는 조용한 날씨였다. 찬 공기를 뚫고 나에게 닿는 따뜻한 햇볕이 느껴져 시원함과 따뜻함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자연적인 기분 좋음이 있었다. 한겨울 홋카이도 노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는 기분이랄까. 사람들이 왜 이곳에 나와 있는지와 왜 이곳이 비싸게 돈을 받는지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주변에 다른 건물이라고는 하나 없는 탁 트인 시야로 알프스의 어마어마한 대자연이 눈에 들어왔다. 새로운 광경의 매력에 빠져 있는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남자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자리 안내해 드릴까요?”
깜짝 놀라 그를 돌아봤다. 그의 뒤로 문 귀퉁이의 사각지대에 등받이 없는 하얀 작은 의자가 보였다. 저런 사각에 앉아있으니 복도에서는 직원의 존재를 볼 수가 없었다. 그의 손에는 밤색의 도톰해 보이는 담요와 메뉴판이 들려있었다.
메뉴판?
자세히 보니 손님 몇은 선베드 옆의 테이블에 음료를 두고 있었다.
“아뇨, 그냥 잠깐 둘러보고 있어요.”
“네,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직원은 내 대답을 듣고는 다시 본인의 작은 의자로 돌아갔다. 식사를 배불리 하고 여기에 늘어져 일광욕한다면… 기분이 꽤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선베드들을 지나쳐 난간으로 향했다. 난간 아래로 공항에서부터 벤츠 밴을 타고 들어온 게이트와 정문으로 이어진 도로가 보였다. 정문에서부터 거꾸로 길을 거슬러 왔던 길을 되짚어보았다. 길은 금방 숲 사이로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까치발을 들고 뭐가 더 보이지 않을까 하는데 슬슬 찬 공기에 내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공기 중에 노출된 발가락이 아려오며 먼저 춥다는 신호를 보냈다. 빨리 옷을 좀 사야 했다. 겉옷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속옷도 갈아입을 여분이 없었다.
아까의 직원에게 돌아가 물었다.
“혹시 여기 머물 동안의 생활용품들과 옷을 좀 사고 싶은데 살 수 있을 만한 곳이 여기 있을까요?”
“1층 로비에서 컨시어지 데스크나 메인 데스크에 문의하시면 성심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테라스에는 선베드가 놓인 데크 좌우로 복도에서는 보이지 않던 작은 정원들이 더 조성되어 있었다. 한번 구경 가보고 싶었지만, 밖에 더 있다가는 또다시 몸살감기로 앓아누울 수 있다는 불안한 생각에 서둘러 실내로 들어갔다. 구경할 시간은 앞으로도 많았다. 내 체류의 끝은 아직 기약이 없었다.
3층에는 이 테라스를 제외하면 5층처럼 전부 객실뿐이었기에 더는 둘러볼 곳이 없었다. 다음은 아래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목표는 1층 컨시어지. 방금의 추위로 쇼핑의 절실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이용객이 없었는지 내가 타고 왔던 엘리베이터가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3층에서 1층으로, 또다시 총 두 칸의 움직임을 지시받았다. 컨시어지로 가려면 다시 메인 로비로 가야 했다. 돌아온 메인 로비는 오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 체크아웃하는 투숙객이 있는지 프란시스가 직접 문 앞에서 떠나는 손님들과 짧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옆에는 짐을 나르는 벨보이가 어마어마한 크기와 양의 가방들을 카트에 담아두고 대기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오늘 아침 식당에서 보았던 노부부였다. 두꺼운 외출복을 입은 그들의 모습은 아까보다 더 똥똥해 보였고, 겉모습은 역시나 부티가 났다. 그러나 안젤리카의 늑대코트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비싼지 알 수 없었다. 가격표나 영수증을 확인해보지 않는 이상 럭셔리에 문외한인 내가 알 리 없지.
노부부가 요양원의 단골손님이라도 되는지 프란시스는 연신 밝은 표정으로 그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바빠 보였기에 그를 그냥 지나쳐 체크인을 진행했던 컨시어지 데스크로 향했다. 열린 문의 사무실에는 첫날 자리에 앉아있다 프란시스에게 자리를 빼앗긴 직원이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 미스터 정!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며 직원이 밝은 인사로 화답했다.
“사실 제가 사야 할 것이 많아서요. 정말 맨손으로 체크인해서 기본적인 것들도 없어요. 당장 속옷 같은 것들이요. 위층 테라스의 다른 직원이 컨시어지에서 도와줄 거라고 들어서 여기로 왔어요.”
“잘 찾아오셨습니다. 생필품 쪽은 다양한 물품들이 준비되어 있지는 않지만, 일부 의류나 기념품들은 지금 당장 저희 지하 아케이드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곳에 없는 품목은 저희 컨시어지가 근처 마을인 그르노블에서 구매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필요하신 물품의 리스트를 작성해 주시면 저희가 마을에서 구매해 배달해 드립니다. 배달 완료 후에 물품 구매 영수증과 서비스 수수료가 합산되어 청구됩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저희가 제공하는 리무진 쇼퍼 서비스로 마을로 직접 쇼핑을 하러 가실 수도 있습니다.”
직원은 컴퓨터를 잠깐 두드리더니 이어서 설명했다.
“지금 확인해 보니 오늘 오후에 아직 개설된 밴 서비스 일정이 없네요. 새로 개설하신다면 빠르면 오후 두 시 반에 출발하는 밴이 대기할 겁니다. 다른 투숙객들도 볼일이 있다면 함께 탑승하시고, 만약 추가되는 인원이 없다면 개인 밴처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긴 설명을 한 호흡에 뱉어낸 직원은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어요?’라는 표정으로 내 의사를 물었다.
“아, 그럼 이번에는 구매대행 부탁드릴게요. 마을 구경도 가보고 싶긴 한데 아직 여기 내부 구경도 못 해봐서요.”
사실은 마을 구경을 나가기에 적합한 외출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직원이 펜과 종이를 내밀었다.
“작성 부탁드립니다.”
나는 열심히 품목 리스트를 작성하며 습관처럼 나오려던 ‘가능하면 저렴한 것들로 부탁드려요’라는 서민계층의 말을 삼켰다. 모르싸를 향한 내 소심한 복수를 잊어버릴 뻔했다. 지금 나에게는 한도 없는 법인카드가 있으니까. 나는 평생 해본 적 없는 말을 해보았다.
“가능하면 비싼 걸로 부탁드려요.”
“네, 고객님의 품격에 맞는 것들로 구매하라 전달하겠습니다.”
“네, 부르기뇽의 급에 어울리는 것들로만 부탁드립니다.”
안젤리카, 각오하라고!
나는 직원의 맞장구에 신이 나서 펜을 놀렸다. 막힘없이 리스트를 작성하는 내 손놀림이 더욱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