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색빛 황량한 비행장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활주로는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지 않은지 여기저기 지저분했다. 아스팔트를 비집고 듬성듬성 자라난 잡초의 녹색은 오히려 이곳의 잿빛을 더 부각시키고 있었다. 바닥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회색 가루들이 불어오는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흩날렸다. 그 모습이 과거에 보았던 사막의 모래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계속해서 감상에 빠져 있을 여유는 없었다. 사정없이 속을 파고드는 찬바람에 몸이 발작적으로 떨렸다. 영상 15도 정도의 기온이 생명에 치명적일 정도로 낮은 것은 아니었지만 건강에는 영향을 끼칠 정도였다. 근 2년간 이렇게 저온의 공간에 들어온 적이 없는 내 몸에게는 충분히 거친 환경이었다. 거기다 바람이 많이 불고 있어 체감 온도는 훨씬 더 낮을 것이 뻔했다.
활주로와 같은 회색빛을 띤 안젤리카의 두꺼운 토끼털 코트를 어깨 위에 걸치고 있었지만, 그 한 꺼풀 속은 열대의 반소매와 반바지 차림이었다. 기내에서는 너무 두꺼워 입을 엄두도 못 냈던 코트의 단추를 재빨리 채웠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바람이 불면 코트 아랫단이 펄럭 열리며 한기가 사정없이 다리를 휘감으며 올라왔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강하게 불 때면 한기가 한 번에 낭심까지 올라와 오금이 짜릿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지금 발에 신고 있는 것이 슬리퍼가 아닌 제대로 된 신발인 것에 감사했다. 만약 멕시코에서처럼 샌들을 신고 있었다면, 사지 중에 심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발가락은 필시 지금처럼 안온한 상태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그럼 이렇게 가만히 서 있을 여유도 없었겠지.
나를 내려놓은 비행기가 잠깐의 신호대기 이후에 다시금 활주로로 진입했다. 그대로 날렵하게 이륙한 회색의 비행기는 거친 바람의 벽을 뚫고 회색의 산맥을 넘어 회색의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나를 이 낯설고 차가운 공간에 유기한 비행기를 덤덤하게 배웅하고는 캐리어 가방을 끌며 간이 비행장의 건물로 들어갔다. 비행장 곳곳에 보이는 격납고를 제외하고는 유일한 건물인 저곳도 역시나 회색이었다.
어딘가 한국의 산골에 있을 것 같은 열차 간이역을 연상시키는 건물은 그 내부도 굉장히 단출했다. 있을 것만 딱 있는 느낌이랄까.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은 자동으로 한쪽 벽에 걸린 낡고 둥근 벽걸이 시계를 확인했다. 하얀 판에 검은색 숫자와 눈금만이 있는 기본적인 디자인의 시계는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약 9시간의 비행이 꿈만 같았다. 실제로 이륙하자마자 샴페인을 들이켠 후, 대부분의 비행시간을 잠으로 보냈기에 꿈만 같았다는 표현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꿈을 꾸기는 했던가? 가물가물했지만 별로 중요한 기억은 아니었기에 더 이상 비행기에서 꾼 꿈을 찾는데 몰두하지 않기로 했다.
오래된 교회에 빼곡히 들어차 있을 법한 낡고 협소한 벤치에 앉았다. 다른 손님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오늘의 첫 손님일지도 몰랐다. 물론 손님 말고도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이 고요한 공간에 나라는 이물질이 들어왔음에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 호출용 종이라도 울려야 하나?
물론 종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대합실 한쪽에 다른 사무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문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나는 안젤리카의 개인 제트기에서 내리기 직전에 히카르도가 다시 상기시켜 준 지시사항들을 떠올렸다.
' 비행장에 내리면 건물로 들어가.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나올 거야.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해. 모든 절차가 끝나면 비행장 정문으로 나가서 도로에서 기다려. 곧 차량이 한 대 마중을 올 거야.'
생각할 필요 없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지극히 수동적인 지시사항이었다. 그러나 히카르도의 말과는 달리 지금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으로 보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모르싸의 사람이 히카르도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는 멕시코에서 나를 버티게 해 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모든 일이 끝나면 서로 살아서 보자고.'
그는 무시무시한 인사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쾌활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다운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작별의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 머리에 잔상처럼 남았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연두색과 오렌지색이 어지럽게 섞인 하와이안 셔츠 차림이었다.
그때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이 비행장에는 딱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명은 40대의 원양어선 선장처럼 보이는 남자였고, 나머지는 그의 조수로 보이는 멀끔한 사무직에 종사할 것 같은 30대 남자였다. 그들은 관제탑 용도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이는 사무실에서 나오더니 나를 맞이했다.
"반갑네, 나는 윌리엄이네."
덥수룩한 수염의 윌리엄이 털모자를 벗으며 악수를 건넸다. 뒤이어 윌리엄에 대조되는 깔끔한 차림의 조수가 말없이 악수를 이어받았다. 그는 딱히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다. 대신에 내게 손을 펼쳐 무언가를 요구하는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여권 말이네."
말없는 조수 대신에 윌리엄이 옆에서 알려주었다.
아, 여권.
나는 짐 가방을 열고 이번에 멕시코에서 새로 얻게 된 여권을 찾았다. 일단 한국 여권이기는 했지만 모르싸가 이 여권을 정식 절차를 밟아서 만들었을까 의문을 가져본다면 확답할 수 없었다. 다만 죄 없는 한국인이 분실하거나 강탈당한 여권이 아니기를 바랐다. 여권을 가방 내부의 보조 주머니에 따로 보관했던 터라 헤매지 않고 금방 찾아 꺼낼 수 있었다.
그는 내가 건넨 여권을 펼쳤다. 새로 발급 후에 처음 사용되는 여권이라 내부는 깨끗했다. 이전 여권에 여러 나라를 누비며 모아두었던 출입국 도장들을 일종의 컬렉팅 요소로 여겼었기에 텅 빈 새 여권을 바라보고 있자니 전 재산을 날린 듯 속이 쓰라렸다. 나중에 하바나의 차메로에게 찾아갈 일이 생기게 된다면 꼭 여권을 되찾아오리라. 내가 원양어선을 타는 동안(적어도 그가 알고 있기로는) 내 짐을 그대로 보관해 두겠다는 차메로의 약속을 믿어보기로 했다. 만약 방 정리를 하던 차메로가 내 여권을 발견한다면 내 행보에 의문(‘원양어선을 타는데 여권도 안 챙겼다고?’)을 품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여권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발견했더라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은 것 같았다.
그나저나 지금 나 밀입국자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
누가 봐도 이곳은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보통의 공항들과는 모습이 달랐다. 유럽 대륙에서 버스를 타고 인접 국가의 국경을 넘을 때도 종종 간소하게나마 공무원들이 입국과 출국 수속을 진행하던 것과 달리 이곳에는 출입국 심사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이 비행장의 전경도 너무나 투박해서 일반적인 여객용 공항이라기보다는 군용 비행장에 가깝게 느껴졌다. 게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유일한 사람처럼 보이는 이 둘에게서 통일된 유니폼이나 명찰이라든지 소속을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고,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는 공무원의 낌새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윌리엄은 여권 검사를 마친 조수가 건네준 여권을 자신의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여권은 처리가 끝나면 이번 주 내로 거기로 보내주겠네. 얌전히 기다리면 알아서 일 처리를 끝내놓지."
볼일을 마친 그들은 내게 대충 이제 가봐도 된다는 말을 남기고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게 끝이야?
나는 활주로에서처럼 또다시 혼자 남겨졌다.
자, 이제 어쩐담?
'난로 위에 주전자가 있으니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으면 그걸로 마시면 되네.'
사무실로 돌아가던 윌리엄이 발걸음을 잠깐 멈춰서 작별 인사 대신에 해준 말이 떠올랐다. 지금의 내 꼴은 확실히 따뜻한 차를 권하고 싶어지는 모습이었다. 대합실 한쪽에는 주전자가 올려진 등유 난로가 있긴 했었는데 혼자서 이 텅 빈 공간을 감당하기에 그 크기가 조금 작아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기름 난로 특유의 기름 냄새가 확 올라왔다. 그 냄새와 함께 군대에서 유류 창고 관리를 했던 기억이 확 올라와 자동으로 몸이 진저리 쳐졌다. 나는 재빨리 난로에서 멀리 떨어진 다음, 그냥 밖으로 나가 곧 오기로 되어 있다는 차량을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커다란 캐리어 가방과 함께 도로가에서 나를 태우러 올 차량을 기다렸다. 공수래, 공수거. 그전까지 거주하고 있던 하바나를 조금 과격하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떠나게 된 나에게 개인 짐이랄 것도 딱히 없었던 터라 이 거대한 캐리어는 비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안에는 멕시코에서 신고 다니던 해진 비치 샌들 한 짝뿐이었다), 그래도 녀석의 거대한 존재감 덕분에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크게 외롭지는 않았다.
히카르도의 말에 따르면 이 비행장으로 내 비행 도착 시간에 맞춰 나를 픽업할 리무진이 온다고 했다. 비행기는 오후 2시, 제시간에 착륙했었다. 그 이후에 수속 같지 않은 수속을 마치고 여기 도로가로 나오기까지 적당히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를 태울 차량은커녕 쓰레기 수거 차량이나 지나다니는 버스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엉뚱한 비행장에 내렸다거나…
비행장 건물 앞으로 다시가 이곳의 명칭을 다시 확인했다.
[아쁘레몽 비행장]
분명히 이곳이 맞았다.
하, 슬슬 체온이 떨어지는데 그냥 안에서 기다릴까? 바람은 왜 이렇게 많이 부는 거야?
무엇보다 지금 맨몸에 이불 하나만 걸친 것과 같은 상태라 찬바람에 계속 노출되고 있는 발목이 조금 시리기 시작했다. 오후가 꺾이기 시작한 시간이 되자 점차 기온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발목을 기점으로 종아리까지에 간질간질하는 심상치 않은 신호가 오는 것이 이 상태를 좀 더 유지하다가는 가벼운 동상에 걸릴 것이라는 경보를 보내고 있었다. 상체는 코트 때문에 따뜻한데 하체는 오들오들 떨리는 불균형한 느낌이 오묘했다.
아까는 무시했던 윌리엄의 마지막 말이 다시 떠올랐다. 대합실 안에서 체온 보존을 위한 핫팩 용도로 뜨거운 물이라도 한 주전자 들고 나올 걸 그랬나? 그러나 펄펄 끓는 물도 이 정도의 바람 앞에서는 금방 온도를 빼앗길 것 같았다.
어마어마한 비주얼의 털 코트가 무색하게 내 하체의 모든 체모가 긴장하다 못해 바짝 일어섰다. 나는 결국 비행장 안으로 잠깐 들어가 있기로 했다. 바람이 갈수록 강해졌다. 녹슨 로봇의 관절처럼 삐걱거리기 시작한 발목을 돌려 다시 대합실 정문으로 향하고 있는데 드디어 도로 저편에서 커다랗고 검은색의 벤츠 밴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 황량한 길가에서 20분 정도를 기다리며 차는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필시 저 밴이 나를 픽업하러 오기로 한 그 차가 분명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나는 다시 캐리어를 세워두었던 도롯가로 달려갔다.
내 간절한 바람대로 밴은 딱 내 앞에 섰다. 밴에 딱히 소속을 유추할 수 있는 상호 같은 것이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운전석 문을 열고 내린 운전기사의 옷차림에서 옳게 만났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유니폼인 듯한 코트의 가슴팍에 명찰이 달린 운전기사가 내 신원을 확인했다.
"미스터 정 맞으십니까?"
"네, 맞아요."
"안에 타시지요. 요양원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아, 짐은 제게 주십시오."
내가 굳은 몸으로 삐걱거리며 캐리어를 밴에 직접 실으려 하자 기사가 그런 나를 만류했다. 그는 정중한 손짓으로 짐은 자신에게 맡기고 차에 탑승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내 가방을 대신 집어 들었다. 그러다 그 거대한 크기에 비해 너무나도 가볍게 들려 올라오는 가방에 몸이 기우뚱하며 잠시 당황하는 듯했지만, 이내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연결하여 밴의 트렁크에 가방을 실었다. 나는 훈련받은 듯 반듯한 그의 동작에서 정체 모를 품격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밴의 열린 문으로 너무나 매혹적인 온기가 나오는 것도 느껴졌다. 체온 보존을 부르짖는 내 생존본능의 외침을 따라 나는 재빨리 차량에 탑승했다. 나는 차 내부를 훑어봤다. 밴은 운전석 뒤로 총 3열의 좌석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천장은 내가 허리를 거의 펴고 일어설 수 있을 만큼 높았다. 시트는 붉은 가죽에 금색 자수 퀼팅이 두툼하게 들어가 쿠션감이 굉장히 좋았는데, 좌우로 날개가 살짝 나와 있어 앉은 사람을 감싸주는 형태였다.
트렁크가 닫히고 기사가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여정은 40분 정도가 걸립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호출해 주십시오."
"아, 감사합니다."
딱히 그를 부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과하게 고급스러운 시트에 그대로 몸을 기댔다. 차량 히터가 뿜어대는 가열된 공기에 차갑게 식었던 발목의 피부가 녹아 풀어지기 시작했다.
코트를 들쳐 확인해 보니 다리가 조금 빨갛게 변해있었다. 신발을 벗고 의자에 웅크려 앉아 발목을 손으로 열심히 비볐다.
아, 아까 기다릴 때도 웅크려 앉아 온몸을 코트 속으로 집어넣을걸. 소라게처럼 코트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왜 떠올리지 못했나.
늦었지만 한 마리 소라게가 되어 다리를 코트 안으로 접어 넣고 양손으로 양발을 열심히 비볐다. 그사이에 텅 빈 도로를 달리는 차의 창문 밖으로 중남미의 그것과는 너무 다른 9월 후반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나도 정반대네…"
"네? 필요한 것 있으신가요?"
내 혼잣말에 내가 무슨 부탁이라도 하기만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기사가 바로 반응했다. 마치 나무 막대기를 입에 물고 와 내 발 앞에 내려놓고서는 제발 던져주기를 바라는 강아지 같았다. 그를 위해서라도 무엇 하나 시켜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그에게 아무 일 아니었다는 사과를 하고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지금쯤 모르싸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으려나. 그리고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누군가가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미래를 알고 싶거든 과거를 돌이켜 보라는 뜻이었다. 한적한 도로를 매끄럽게 달리는 밴 안에 쪼그린 채 멕시코에서의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카타리나의 목이 떨어진 그날 밤 몇 번이고 나를 겁탈하는 안젤리카의 손에서는 여전히 진한 피 냄새가 났다. 다음 날 아침에 안젤리카는 짧았던 잠에서 깨어나 선실 밖으로 나갔다.
나도 그녀의 움직임에 번쩍 눈이 떠졌다. 몇 시간 못 잔 터라 정신없이 피곤한 상태였지만 한 번 깬 잠은 그녀가 방을 나가고 혼자가 되어서도 다시 오지 않았다. 잠은커녕 어젯밤의 충격적인 경험이 다시 떠올라 본능적인 패닉상태에 빠졌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 떨었다. 눈물이 났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일 중에 가장 정신적으로 학대당한 순간이었다. 나름 또래와 비교하면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자부심을 가지며 살고 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헛되고 오만한 생각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얼마나 좋은 나라, 좋은 부모 밑에서 팔자 좋게 자라 온 것인가. 동화책을 본 적이 없다는 카타리나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는 한바탕 소리 없는 울음을 터트린 후에야 진정할 수 있었다. 눈물이 빠져나간 곳에는 새로운 마음가짐이 자리 잡았다. 속절없는 무기력함은 사라지고 다시금 생존본능이 나를 지배했다.
살아남아야 한다. 다음에 썰리는 목이 내 것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 잠들 수 있었다. 카타리나의 사후 바로 다음 날 밤에 우리는 베라크루즈에 도착했다.
밴이 T자 교차로에서 좌회전했다. 내내 직진만 하던 차량이 큰 커브를 틀자 발생한 원심력의 이질감이 나를 회상에서 끄집어냈다. 주변의 풍경은 어느새 많이 바뀌어 있었다. 분지 지형의 비행장 인근을 벗어났는지 주변 풍경은 이제 삼림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도로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잎이 빼곡한 침엽수림이, 오른쪽에는 잎들을 일부 떨쳐 내버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모처럼 겨울이 느껴지는 풍경을 보니 반가웠다. 하바나나 멕시코나 한동안은 1년 내내 겨울이 없는 곳에만 머물렀었다.
"10분 남았습니다."
도착이 임박했는지 기사가 목적지까지의 시간을 알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가는 곳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그냥 이곳을 '요양원'이라고만 불렀다.
'요양원에 가면 자기가 정말 좋아할 거야.'
안젤리카가 나를 찐하게 끌어안고 난 다음에 나를 보며 말했다. 내가 보는 그녀의 눈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그녀가 보는 내 눈에는 무엇이 가득할까?
'거기가 어딘데?'
'가보면 알 거야.'
나는 거기서 더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겉으로는 그녀의 연인으로서 그녀를 편하게 대했지만, 그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는 그녀에 대한 압도적인 공포와 무조건적인 복종이 깔려 있었다.
밴의 왼편에 다시 산이 사라지고 평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저 멀리에 거대한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저기가 목적지임을 알 수 있었다. 저곳 말고는 10분 이내 거리에 갈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목적지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나는 그 규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평범한 저택이라기보다, 옛 프랑스 왕족들의 별장으로 쓰일 법한 작은 성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실제로 그 형태도 성과 맨션의 사이에 있었다. 이 넓은 들판이 모두 요양원의 부지라도 되는 듯 건물 주변으로 가꿔진 수목들이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밴은 다시 좌회전해서 요양원의 메인게이트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도로 양옆으로 겨울에도 푸른 가로수들이 아기자기하게 심겨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또 어디로 보내지는 것일까. 이곳이 과연 평범한 요양원이기는 한 걸까. 알고 보니 지하에서 마약 정제 시설이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겠지? 가능성이 없는 말은 아닌 것 같아. 남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한 다음 유럽으로도 마약 사업을 진출하려는 모르싸 야망의 전초기지라든지?
내가 범죄집단의 사고방식으로 최악의 상황들을 그려보고 있을 때, 거대한 게이트를 통과한 리무진은 도로를 따라 둥그런 분수대를 반 바퀴 돈 다음 요양원의 정문에 정차했다.
"손님, 고생하셨습니다."
운전기사가 주차 기어를 넣으며 말했다.
"아, 수고하셨어요."
나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인사했다. 인사를 받으면 인사로 돌려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그때 밴의 문이 드르륵하고 열렸다. 테일러 코트를 멋들어지게 입은 다른 직원이 문을 열고는 내가 나올 수 있게 비켜섰다. 내가 여자였다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돕기 위해 정중히 손을 건넸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 나는 수줍게 그 손을 잡고 한 발씩 내려서겠지. 그런 장면을 영화에서 본 적 있거든.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도 자동으로 인사를 하며 차에서 내렸다. 어느새 차에서 내린 운전기사가 트렁크에서 내 가방을 꺼내어 내 옆에 내려놓았다. 생긴 것과 다르게 가벼운 슈트케이스는 바닥에 ‘통’하고 가볍게 퉁겼다.
"미스터 정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본분을 마친 기사는 차를 몰고 다시 원형 도로를 따라 주차장이 있는 요양원 뒤편으로 사라졌다. 잽싸게 튀어나온 빨간 제복의 벨보이가 운전기사에게서 내 짐을 인계받고는 그의 옆에 섰다. 벨보이 역시 가벼운 가방에 잠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흰 피부에 주근깨투성이인 벨보이는 상사의 신호만 떨어진다면 튀어 나가 어느 장소에라도 내 짐을 가져다 놓을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사냥꾼의 신호를 기다리는 사냥개 같았다.
나는 벨보이에게서 눈을 떼고 내 앞의 코트를 입은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내 신원이 확인되자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이곳의 지배인 프란시스입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희 '기품 있는 귀빈들을 위한 부르기뇽 요양원'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