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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Oct 25. 2024

에필로그

    에필로그


    코가 가려운 느낌에 검지 손가락으로 연신 콧등을 긁으며 눈을 떴다. 언제 잠들어버렸담? 잠에서 깬 나는 습관처럼 양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러다 선크림 일부가 눈에 들어가며 눈 비빔의 개운함보다 오히려 눈물이 핑하고 돌았다.

    금방 안정된 눈을 껌뻑이며 하품했다. 어젯밤에 늦게 자버린 탓에 오전 내내를 수면 부족 상태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몸에 착 감기는 빈백을 만나니 순식간에 잠들어 버린 것 같았다.

    이번에는 발을 앞으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발끝이 살짝 아래쪽을 향하며 흰 설탕 같은 백사장의 모래가 플립플롭 앞코와 발가락 사이로 밀려들어 왔다. 그늘에 있던 모래들이라 너무 뜨겁지 않고 기분 좋게 따뜻했다.

    그대로 오른쪽을 돌아보니 거대 코코넛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긴 야자수 파라솔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내게서 가장 가까운 파라솔 밑의 선베드에는 어젯밤 수면 부족의 원인이 누워서 해변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녀의 늘씬한 다리와 멋들어지게 구부러진 무릎이 만드는 기하학적인 라인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내가 얼마나 잔 거지?

    시계도, 전화기도 들고 오지 않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림자의 이동 정도로 보면 엄청 짧지도, 엄청나게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던 것 같았다. 거기다 내가 이쪽으로 올 때의 모습 그대로 꼼짝없이 누워있는 알렉시스가 이 추측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내 단잠을 깨운 주범은 바로 햇빛이었다. 꾸준히 미세하게 움직이는 태양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내 얼굴을 가려주던 야자수의 그림자를 옆으로 살짝 이동시켜 버린 것이다. 그늘에 걸쳐 있던 얼굴은 햇볕에 노출되었고, 그 뜨거운 기운에 자극받은 피부가 간질간질 해졌으리라.

    처음에는 우리가 둥지를 튼 선베드에 누워 있었다. 그러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해먹을 발견했다. 야자수 나무 사이에 걸려있는 흰 천의 해먹은 내 호기심을 끌었다. 가까이 가보니 이 포인트는 야자수 군집이었고, 나무 사이사이에 해먹 두어 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해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옆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빈백들도 있었는데, 포근해 보이는 모습을 보자 도저히 안 누워 보고 갈 수가 없었다. 그 결과는 방금의 단잠으로 이어졌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파란색 계열의 무늬가 농도별로 얼룩덜룩한 하와이안 셔츠를 휘날리며 우리의 파라솔로 돌아갔다. 그늘 밖으로 나오니 눈이 부셔 저절로 눈이 약간 찡그려졌다. 어서 돌아가서 벗어둔 선글라스를 코에 걸쳐야지.

    열대의 자연 소재로 만들어진 파라솔은 기둥 부분에 테이블로 쓸 수 있는 원형 나무판자가 달려 있어 이용하기에 편했다. 테이블에는 이미 잡지 한 권과 음료 두 잔, 그리고 내 선글라스로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알렉시스도 그새 잠들었는지 내가 와도 별다른 반응 없이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누워있었다. 그녀의 하얀 피부는 선크림을 발랐음에도 햇볕에 그을려 온통 붉은빛을 띠고 있었는데, 마치 잘 익은 백도 복숭아가 떠올랐다. 나는 괜히 입맛을 다셨다. 아까 잠깐 물놀이하고 나와 젖어있었던 비치 타월이 선베드 위에서 바짝 말라 있었다. 청량한 색 조합인 흰색과 파란색 굵은 줄무늬로 이루어진 비치 타월은 이 해변의 분위기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나는 그녀를 깨우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용히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내가 등을 등받이에 붙이자마자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나 잠깐 잠들었었나 봐. 해먹은 어땠어?”

    “해먹 보러 갔다가 빈백이 보여서 빈백에서 잠깐 쉬고 왔어. 나도 거기서 잠깐 잠들었지 뭐야.”

    “자기도? 어제 확실히 잘못 자긴 했나 봐.”

    “그래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밤이었어.”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했다. 알렉시스의 뒤로 대머리 아저씨와 그의 아내가 파라솔 그늘 밖으로 선베드를 끄집어내어 헐벗은 채로 일광욕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한 덩이의 스팸처럼 잘 익어가고 있었다. 서양인들은 햇빛이 무섭지도 않나?

    나는 다시 자세를 바로 고쳐 누웠다. 두 손으로 팔베개를 만들어 머리를 받쳤다. 앞에는 인도양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바다뿐만 아니라 그 위를 가득 채우는 하늘도 감탄을 자아냈다. 초록빛의 바다와 달리 하늘은 파란색의 푸르름이었는데, 구름마저도 인상파 화가의 작품처럼 점점이 명도를 달리하며 입체감을 뽐내고 있었다. 머리 위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고 수평선 근처의 하늘에만 구름이 있다는 점도 여백의 미가 잘 살아있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잠깐의 낮잠으로 피로가 한결 가신 개운한 컨디션으로 인도양을 만끽하고 있는데 알렉시스가 나를 불렀다.


    “우리 카바나에도 누워볼래?”

    “아, 카바나 이용도 공짜랬나?”

    “응, 가보자!”

    “그러시죠.”


    우리가 해변에 도착했을 때 선베드 행렬의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아 프라이빗함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만큼 추가로 음료 주문을 하거나 다른 서비스를 받기에는 직원과 거리가 있어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다. 리조트의 프라이빗 해변의 가운데에는 제법 큰 규모의 비치 하우스가 있었고, 뒤로는 야외 수영장이, 그 앞으로는 해변의 카바나와 선베드가 있었다. 오는 길에 본 카바나가 마음속에 남아있었는데 알렉시스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제트스키에 매달린 수상스키어 하나가 우리 앞을 지나갔다. 수상스키가 튀겨대는 시원한 물보라를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걸음을 옮겼다. 코코넛 파라솔을 떠나 몇 걸음 옮기자 이동하는 우리를 발견한 직원이 우리를 마중 나왔다.


    “해변은 어떠셨나요? 이제 떠나시는 건가요?”

    “너무 좋았어요. 아뇨, 떠나는 건 아니고 카바나로 이동하려고요. 혹시 지금 빈자리가 있을까요?”

    “아, 그러시군요. 제가 이동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민머리에 티파니 앤 코를 떠올리게 하는 민트색 반소매 유니폼의 중년 흑인 직원은 상냥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우리를 도왔다. 그의 동굴음 같은 저음도 우리에게 상당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는 멀리 있는 다른 직원에게 손짓으로 먼저 가서 카바나 세팅을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덕분에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새로운 비치타월이 빈틈없이 깔린 카바나가 완성되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떠나고 우리는 서비스에 대한 감상을 공유했다. 알렉시스가 먼저 감탄했다.


    “세상에, 너무 친절하지 않아요?”

    “정말 너무 친절해요. 그래서 가끔 궁금해요.”

    “뭐가요?”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절함과 표정, 말투인지. 아니면 속으로는 억지로 친절함을 유지하느라 힘이 들고 있는지 말이에요. 뒤에서 우리 욕을 한다거나.”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주제라 알기는 쉽지 않겠어요.”

    “우리 그냥 전자라고 생각하죠.”

    “그래요, 긍정적으로. 굳이 피할 수 있는 불편함은 지나가게 둡시다.”


    우리는 다시 해변의 커플 중 하나가 되어 그늘 아래에 축 늘어졌다. 침대에 늘어진 서로의 손끝이 작게 닿아 있었다. 옆에는 나무로 된 사각 트레이에 새로 서빙된 얼음 음료가 땀을 주르륵 흘렸다.


    여기에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그녀와 휴양지를 고르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열대의 휴양섬이었다. 부르기뇽 요양원도 훌륭한 휴양지였지만 그림 같은 산맥과 설경은 반년 동안 질리도록 봐왔다는 것이 문제였다. 미슐랭 쓰리 스타 셰프의 음식도 반년을 계속 먹다 보면 질리는 것이 사람이었다.

첫 번째 후보는 몰디브였다. 그러나 알렉시스가 예전에 가본 적이 있다는 점과 조금 흔한 여행지라는 것에 탈락하고 말았다. 대신에 몰디브가 인도양에 있다는 점에서 실마리를 얻어 인도양을 접하는 휴양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온 것이 이 모리셔스 섬. 휴양을 좀 즐긴다고 하는 마니아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한 휴양지였지만, 내게 이 동아프리카의 휴양섬은 생소했다. 그래서 더 좋았다. 구글에서 찾아본 마다가스카르에서 더 동쪽 바다에 있는 모리셔스의 사진들은 지상낙원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정한 곳이 이곳 ‘원 앤 온리 르 생 제랑’이었다.  모리셔스에는 1박 평균 50만 원대의 리조트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1박에 300만 원에 육박하는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나는 원래 금전적 여유가 있을 때라도 사치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예전과 달랐다.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좋은 것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럴 여유가 되었다. 자신의 유산을 다른 여자에게 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안젤리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간담이 서늘했지만, 뭐, 그런 건 사후 세계에서 만나서 잘 풀어보자고. 지금까지는 후회가 없었다.



    정신없는 연말이 지나 새해가 되었고, 약속한 시간에 칼 같이 찾아온 변호사와 진행한 유산 상속의 모든 절차가 끝난 다음에야 정말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어느 누구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고,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내심 히카르도나 다른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는 편을 더 바라고 있었다.

    프란시스도 돈만 체불이 되지 않으면 요양원에 언제든지 머물러도 된다고 했다. 마음의 안정을 찾은 나는 자유의 몸이 된 다음에도 부르기뇽 요양원과 론알프 지방을 급히 떠나지 않았다. 근무 기간을 모두 채운 알렉시스에게 수영을 배우고, 함께 알프스 여기저기로 스키를 타러 다녔다. 스키 때문에 부르기뇽에 왔다는 알렉시스는 수영은 물론이고 스키도 선수급으로 탈 수 있었는데, 그녀를 스승 삼아 나도 열심히 수련에 매진하다 보니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따라 탈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다시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했다. 새로 휴대폰을 장만했으며, 노트북도 구매했다. 인터넷에 접속해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했다. 그들은 내가 처음 전했던 것(원양어선 장기계약) 보다 빨리 돌아왔다며 놀랐다. 일부는 그 힘든 일을 오래 못 버티리라고 예상했다는 사람도 있었고, 아파서 그만둔 것이냐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차메로는 둘 다 아니었다. 그는 그저 수고했다면서 언제든지 돌아오라는 말을 남겼다. 그 누구도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상상도 못 하겠지.

    처음에는 이 어마어마한 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프로페서 X의 생각이 났다. 그가 아직 곁에 있었더라면 많은 조언을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났고, 나는 한량 정진이었다. 나이가 들며 한량 기가 줄어들고 건실해지는 느낌이 있긴 했었지만 아직은 한량이라고 자신을 소개할 수 있었다.

    나는 돈을 그대로 스위스 계좌에 묻었다. 그리고 일부를 용돈으로 나와 알렉시스의 행복을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다사다난한 1년이었다. 남반구에 위치한 모리셔스는 북위 37도의 내 고향과 달리 2월인 지금에야 한여름을 지나고 있었다. 최고온도는 섭씨 32도 정도로 서울의 여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녁이 된 지금은 20도 정도로 상당히 쾌적했다.

    나는 우리가 묵고 있는 해변의 풀빌라 발코니와 연결된 모래사장에 나와 있었다. 새시를 열고 발코니로 나오면 좁고 짧은 프라이빗한 숲길을 통해 바로 해변으로 걸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발코니의 우드덱을 벗어나 손에 샌들을 들고 맨발로 모래를 밟으며 조금 걸어 나갔다. 맨발을 부드럽게 감싸는 건조한 모래의 느낌이 좋았다. 저녁의 모래는 시원하게 식어 낮과는 다른 기분을 선사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모래 위에 털썩 앉았다. 셋업으로 구매한 베이지색 면 소재의 반바지와 셔츠가 모래와 제법 어울렸다. 손바닥으로 모래를 이리저리 쓸었다. 살랑 불어오는 저녁 바람이 좋았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바람의 그림을 모래 위에 그려보았다. 샌드아트를 흉내 내 봤는데 완전 엉망은 아닌 느낌이었다.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을 따라 그려지는 선들이 모래 위에 물결치며 부드러운 바람의 형태가 되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대로 쭈그려 앉은 채 뒤돌아보았다. 알렉시스는 검은색 이브닝드레스 차림이었다. 오프숄더 스타일의 검정 원피스는 흰 목과 어깨 위로 감각적인 곡선을 그리는 같은 색의 검은 끈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어깨 아래로 툭 떨어진 편안한 라인의 옷으로 전체적으로 하늘하늘하면서 우아한 느낌이 있었다. 고혹적이었다.

    나는 말없이 일어나 그녀를 마중 나갔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팔짱을 끼었다. 우리는 해변을 걸었다. 그 걸음의 끝에는 대양을 배경으로 백사장 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특별한 테이블이 있었다. 우리만을 위한 해변의 저녁. 직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았다. 그가 빼주는 의자에 앉았다. 내 앞에는 그녀가 있었다.


    “식전주입니다.”


    직원은 옆의 카트에서 샴페인을 꺼내어 따라주었다. 영롱한 색의 샴페인 잔을 들었다. 그녀도 잔을 들었다. 샴페인의 작은 기포들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차가운 폭죽 같았다.

    차가운 폭죽이 터지고 있는 잔을 조금 더 높이 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있는 하늘은 여러 색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도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하늘의 남색, 테이블 위 촛불의 주황색. 그녀가 따라 들어 올린 샴페인의 금색. 반짝이는 두 눈의 마주침. 크리스털 잔의 부딪침. 우리에게 이 색감이 오래 기억되기를. 영원히, 아름답고, 다채롭게.

    나는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아름답네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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