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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Oct 25. 2024

챕터 32. 해방의 행방

    32. 해방의 행방




    프로페서 X가 어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내 가족도 아니었고 친구는 더더욱 아니었지만 그가 고해성사하듯 털어놓은 인생의 주마등을 간접 체험한 까닭인지 마냥 아무렇지 않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에게 들려준 회고는 흔히 사람이 죽기 전에 경험한다는 인생의 파노라마이자 생을 마무리 짓는 정리작업이었을까. 그가 죽고 나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물질적 재산들은 정리해 줄 대리자가 있었지만, 정신적인 재산들은 내가 유일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는 것으로 나름 그 최소한의 소임을 다했다고 믿고 있다.

    내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완전히 미친 소리라고 할 수 있었다. 하긴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도 다른 사람이 보면 완전히 미친 소리처럼 느껴지겠지.

    나보다 더한 격변의 삶을 살아온 그는 사고의 범위가 보통의 사람보다는 더 넓을 것이었다. 범위가 너무 넓다 보니 범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정상 범주를 벗어날 수 있었던 걸지도.

    문득 이번 경험 전까지는 임종에 가까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험해 보는 것이 점점 많아지는 걸 보니 나이를 먹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언젠가 530호 노인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이 될 수 있겠지? 나는 죽을 때 얼마나 기상천외한 생각을 해내고 죽게 될지 기대가 되었다.


    내가 그에게서 어떤 공통점을 찾았다 해도 여전히 우리가 가까운 사이라고는 할 수 없었기에 그의 죽음이 남긴 심란한 기분을 오래 가져갈 필요는 없었다. 그는 그이고 나는 나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침체되었던 기분은 실제로도 오래가지 않았다.

    예상대로 나의 의무실 근무는 프로페서 X의 죽음으로 종료되었다. 자유로워진 것이 다행인지, 아니면 갑작스러운 은퇴로 아쉬워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수습은 내 몫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나는 다시 백수 투숙객으로 돌아왔다. 내가 의무실에서 임시로 차지하고 있던 자리의 원 주인도 의무실에 무사히 합류를 마쳤다. 딱 봐도 잔뼈가 굵어 보이는 그녀는 경력을 잘 살려 본연의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고 했다.

    백수가 되니 원래도 많던 시간이 더 늘어났다. 그렇다면 다시 수영을 갈고닦는 루틴으로의 복귀를 도모해야 하나? 그러기에는 아직 알렉시스와의 거리 두기가 진행 중이었다. 얼마 전 미셸이 방해하기 전의 짧은 대화로 오해를 푸는 것으로 더 이상의 앙금은 쌓이지 않았지만, 그날의 대화가 어색하게 마무리된 이후로 아직 추가적인 대화는 없었다. 그냥 밝음 가득한 그녀의 미소가 보고 싶었다. 그녀는 내가 직장(이라기에는 무급이었지만)을 잃었지만 나를 여전히 좋아해 줄 것이다. 어쩌면 그녀에 대한 해답이 거의 나온 걸지도. 나는 그녀를 원한다.


    당장의 심심함을 털어내기 위해 방 밖으로 나왔다. 오래간만에 안젤리카의 털가죽 코트를 꺼내 입었다. 502호의 문은 닫혀 있었다. 혹시나 나는 다시금 문 앞에서 미셸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라도 한 걸까? 신출귀몰한 그녀를 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통 마주칠 수 없어 조용히 체크아웃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그녀는 어느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튀어나와 씨익 미소를 지어주고는 다시 제 갈 길을 가고는 했다. 처음 그녀가 등장했을 때는 비슷한 나이대의 새로운 친구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막상 그녀는 내 기대감을 충족시켜주지는 않았다.

    지금은 방에 있나?

    조용히 502호의 방문에 다가가 귀를 대보았다.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텅 빈 복도를 확인하고는 아쉬운 발을 움직여 로비로 향했다. 연말연시의 요양원은 직전 달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사람을 들뜨게 하는 연말 특유의 분위기는 요모조모로 심란했던 마음을 빠르게 진정시켜 주었다.

    나는 ‘냇 킹 콜’의 크리스마스 캐롤을 흥얼거리며 로비로 갔다. 늑대 가죽 문양의 인조가죽 담요가 있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안젤리카의 털코트와 털담요가 어우러졌다.

    그런데 일단 밖으로 나오기는 했다만 이제 뭘 하지?

    기분 좋게 온몸을 한껏 늘어뜨렸지만 공허함은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 한량 본능도 서서히 옅어져 가는 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끄떡없던 내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나 자신에 대한 고찰에 빠져들려고 할 때 로비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시코를 전란에 빠뜨렸던 마약 카르텔 모르싸의 리더가 사살되었습니다.”


    뭐라고?

    무심결에 들어버린 놀라운 소식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늑대 가죽을 어깨에 두르고 텔레비전 앞으로 가 섰다.


    ‘멕시코 내전의 카르텔 수괴 사살’


    화면 아래에 커다란 폰트로 적혀있는 헤드라인을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앵커가 말하는 소리가 웅웅 거리며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거 정말이야? 이게 사실일까?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안젤리카는 어떤 풍파에도 절대로 꺾이지 않을 여자였다. 내 속 깊숙이 각인된 그녀의 이미지는 밀실 컨테이너에 가두어 놓고 컨테이너를 통째로 폭파시키더라도 다음날 귀여운 짓을 꾸몄다는 듯이 웃으며 복수의 칼을 들고 나타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고 뚫어져라 화면을 쳐다봤다. 내 눈으로 그녀의 시체를 확인해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모르는 비밀 수단이 있었으니까. 사람들이 모르싸의 리더로 알고 있는 카타리나는 죽어도 다시금 부활하는 불사조 같은 존재였다.

    자료화면이 계속해서 지나갔다.


    “멕시코시티와 정부를 위기 끝까지 몰아갔던 전례 없는 규모의 카르텔 쿠데타도 결국에는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멕시코에서 가장 거대한 카르텔인 모르싸는 쿠데타 성공 직전에 전세가 역전된 후, 하루 전 미군 특수부대와 협력으로 진행된 것으로 알려진 특수작전으로 인해 수괴가 사살되었습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카르텔은 급히 무너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휘부 붕괴 소식이 전해진 이후에는 잔당들에 대한 소탕과 전국에 퍼져있는 모르싸의 거점에 국군과 연합군들의 동시다발적인 공격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오케이, 결국 쿠데타가 실패한 것은 알겠어.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빨리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안젤리카의 행방이었다.

    나는 눈을 떼지 않고 계속해서 뉴스를 주시했다. 드디어 앵커가 모르싸의 리더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카르텔의 리더로 알려진 카타리나 사파타는 이번 쿠데타로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었는데요. 그녀는 군의 특수작전 끝에 사살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번 작전은 2011년 미 해군 특수부대가 진행한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인 제로니모 작전과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


    다시금 귀가 막히고 모든 정신이 내 시신경으로 집중되었다. 앵커의 주제가 리더 사살로 바뀜에 따라 자료화면도 특수작전 현장의 것으로 바뀌어 나왔다. 헬기와 특수부대원들의 모습이 나오더니 곧 모자이크 처리가 부분적으로 된 작전 현장의 사진이 나타났다. 엉망이 된 실내의 모습은 온통 그을린 자국이 있었다. 폭발물이라도 사용한 건가? 사진이 몇 차례 바뀌었고 드디어 카타리나의 모습이 보였다. 세 번째 카타리나의 시신은 모자이크가 되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체형과 실루엣으로 미루어 카타리나가 맞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직 안젤리카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직 생존해 있는 것이라면 언젠가 다시 4대째의 카타리나를 내세워 모르싸의 부활을 이끌 것이었다. 나는 졸이는 마음으로 뉴스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아.”


    나는 짧은 탄식을 뱉었다. 그녀가 있었다. 나의 악마. 나의 주인. 나의…

    뒤이어 나온 현장 사진 하나에서 안젤리카가 엎드려 누워있었다. 사진에 노출된 그녀는 극히 일부분이었다. 아나운서의 멘트가 진행되는 동안 특수작전 현장의 사진 8장으로 이루어진 슬라이드쇼가 반복해서 재생되었는데, 마지막 한 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안젤리카는 사진의 한 귀퉁이에 상체만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사진의 중앙 포커스는 모르싸의 리더로 알려진 카타리나에게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젤리카의 강인했던 두 팔은 뒷골목에 버려진 백화점의 마네킹처럼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꺾여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여전히 스킨헤드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두개골 일부가 손상되었는지 짧은 머리카락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믿기지 않았다. 소리 없는 눈물이 주룩 흘렀다. 내가 왜 우는 거지? 안도의 눈물? 애도의 눈물?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자유를 되찾은 걸까? 애초에 저 뉴스가 정말 사실일까? 대업을 앞두고 이중 보안장치로 나도 몰래 카타리나가 아닌 안젤리카 자신의 대타도 구했다면? 그렇다면 그녀는 결국 아직 생존해 있는 것이 아닌가? 이건 너무 편집증 적인 생각일까?


    “당국은 쿠데타가 완전히 저지되고 중심 세력이 와해되더라도 전국에 퍼져 있는, 특히나 정글에 숨어있는 잔당들을 소탕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머릿속으로 질문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그러나 어느 것에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순간 로비 한복판의 이런 내 모습이 이상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들거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억지로 일어났다. 넘어지지 않고 겨우 소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뉴스는 다음 소식으로 넘어가 베를린의 크리스마스 시장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었다.

    잠깐 생각을 추슬렀다. 결론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였다. 나는 여기 내 의지로 온 것도 아니었고 그들과 소통할 창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조직의 생존자들이 있더라도 당장은 자기 생존에 온 힘을 쏟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자연스레 잊히지 않을까?

    히카르도는 무사할까? 마지막으로 본 모르싸인 히카르도를 포함해 그간 친분이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 중 몇 명이 무사할까? 아니면 이미 총탄과 포탄의 파편에 무자비하게 관통당했을까?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면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주던 그날처럼 그가 돌아와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줄까?

    그렇다,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지금 여기를 나가서 아무 비행기나 잡아탄다면?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여권으로 일반적인 민항기를 탈 수 있는 지의 여부도 모른다. 그때 요양원 숙박비를 대고 있는 안젤리카의 스위스 계좌가 떠올랐다. 그 계좌는 아직 유효한 걸까? 언제고 프란시스가 내게 체불된 청구서를 내밀며 돈 출금이 막혀 이만 요양원을 떠나라고 냉정하게 쫓아내는 모습이 그려졌다(“당장 나가시오. 당신에게 빚을 지우지 않는 것만으로도 평생 감사하시오.” 상상 속의 그가 싸늘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 프란시스! 그에게 찾아가서 내 계좌의 상태를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프란시스도 모르싸의 소식을 접했을 것이고 나보다 더 나은 방법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것까지 생각이 미쳤다. 내가 당장 이곳에서 이 문제에 대한 상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프란시스였다.


    “죄송해요, 미스터 정. 오늘 프란시스는 부재중입니다. 전하실 말이 있다면 메모 남겨서 복귀하면 바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면 혹시 개인 연락처를 아신다면 직접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뇨, 급한 건 아니라 내일까지 기다릴게요.”


    아뇨, 사실 너무 급해요. 그러나 내가 여기 머물며 그와 종종 직접 대화까지 하는 사이라고 해도 사적인 연락처를 알고 있지는 않았기에 사건과 무관한 직원을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당장 속이 답답하고 불안하지만 더 할 말이 없으니까. 쿠데타를 일으킨 세계적 명성의 카르텔과 내가 관련이 깊다는 이야기는 아무에게나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주제였다.



    심란한 마음에 옷을 제대로 챙겨 입고 2층의 테라스로 향했다. 따뜻한 햇볕과 차가운 바람으로 이런 마음을 조금 달래 보자는 의도였다. 겨울이 짙어지는 언젠가부터 직원이 알아서 하나씩 더 챙겨주는 담요를 돌돌 말아 베개로 삼고 선베드에 누웠다. 모처럼 작정하고 햇볕 아래에 들어와 있었지만 딱히 심적 진정 효과는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이런 마음을 치료하는 약이라면…

    나는 손을 들어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를 하나 주문했다. 차가운 칵테일의 알코올은 빠르게 나를 진정시켜 주었다. 엄밀히 말하면 치료약이기보다는 진통제에 가까웠지만 당장의 불편함을 없애주는 녀석의 효능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중독만 되지 않으면 술은 확실히 이런 쪽으로 좋은 수단이었다.

    나는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으로 가 기대어 섰다. 눈앞에 펼쳐진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비현실적인 풍광. 어느덧 접어든 겨울에 주변 풍경은 온통 흰색이 되어버렸다.


    “하려는 말이 뭔데?”


    어라, 알렉시스?

    내게는 멀리서도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겨 있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테라스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난간 밖 아래쪽에서 들려온 것 같았다.

    나는 난간에 다시 기대어 바깥을 살폈다. 정문의 원형 도로만 보일 뿐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부르기뇽의 도어맨은 체크인 예약이 없는 날에는 굳이 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23일인 내일에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는 거 알고 있어?”


    추격의 실마리를 놓친 나에게 다음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도 내가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재빨리 목소리를 쫓아 살금살금 움직였다.


    “잘 알고 있어.”


    알렉시스가 대답했다. 그들의 목소리를 쫓아 향한 곳은 테라스의 좌측면이었다. 작은 정원을 지나 나타난 난간에 다시 기대어 아래를 조심스레 내려다봤다. 이번에는 그들이 보였다. 둘의 정수리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자신의 두 팔을 교차해 팔짱을 낀 상태였다.

    역시 피트니스 그 자식이었군!

    이미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녀석의 느끼한 노란 머리카락이 괜스레 더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파티에 가보고 싶겠네? 내가 피트니스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여기 투숙객 하나를 구워삶아 초대권을 얻었거든?”


    저 녀석이!

    나는 침이 절로 넘어갔다. 그녀는 이미 내 초대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없었다. 최근의 내 행태에 충분히 그녀가 내게 서운함을 느꼈을 수도 있었다. 전번의 짧은 대화로 그녀의 마음이 충분히 풀어졌을지는 미지수였다. 잠깐 거리를 두자고 생각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다른 놈이 치고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그래도 본의 아니게 몰래 숨어서 내가 모르는 그녀의 다른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리를 옮겨버리기엔 내용이 너무 궁금했고, 내 모습을 드러내자니 그것도 그림이 이상했다.


    “미안해. 나 이미 파티에 초대받았어. 그것도 한참 전에.”


    아래로 비스듬히 보이는 녀석의 얼굴은 입을 떡 벌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도 똑같이 입이 벌어졌지만 기분의 방향은 녀석과 정반대였다.


    “뭐, 정말? 누구랑 가는데? 그 의사인가? 아니면 그 의무실 비실이? 아니지, 그 녀석이 파티에 갈 권한이 있을 리가 없지. 정말 초대받은 거 맞아?”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그럼 용건은 끝난 거지?”


    알렉시스는 쿨하게 돌아섰다.


    “파티장에서 네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난 정말로 실망할 거야! 네가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니까!”

    “내가 정말 파티에 가는지 아닌지는 내일 알 수 있겠지. 그럼 잘 찾아봐.”


    알렉시스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한마디 더 했다.


    “그리고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나에게 단순한 친구로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


    그대로 망설임 없이 걸어간 알렉시스가 건물 코너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자리에 벙쪄있는 녀석이 허망하게 외쳤다.


    “서, 설마 정말 그 자식이야?”


    물론 대답해 줄 알렉시스는 그 사이 멀리 사라진 이후였다. 놈이 말하는 그 자식이라면 나인가? 아니면 아까 언급한 닥터? 그녀의 요양원 생활에 내가 모르는 엄청난 반전이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나일 것 같았다.

    이것 참, 쑥스럽게 내가 대신 대답해 줄 수도 없고.

    나는 아까의 심란함을 모두 잊고 행복감이 나를 잠시 감싸는 것을 느꼈다. 알렉시스가 좋아하고 있는 남자라면 아무래도 나를 말하는 거겠지? 바닥에 주저앉아 난간에 등을 기댔다.

    그녀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일었다. 솔직히 내가 최근에 결정한 대처 방식은 훌륭한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녀와 상의했다면 몰라도 일방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은 상대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도 알렉시스는 그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미셸이 방해하기 전의 대화로 그녀의 불안이 거의 해소된 상태인 것 같았다.

    나도 물론 그녀를 원했다. 이 요양원의 누구보다도 강하게 원했다. 그러나 매번 그녀를 향한 내 진심이 느껴질 때면 안젤리카의 그림자가 나를 덮어 다시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 어둠에 삼켜진 나는 다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변화가 있다면 아까의 뉴스. 나는 정말로 안젤리카에게서 해방된 것일까? 여왕은 어딘가에 숨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지는 않을까? 그녀가 돌아온다면 나를 다시 찾아 그녀의 손아귀에 다시 집어넣을 것인가?

    두려웠다. 카타리나의 몸을 잃은 머리통이 아직도 선명했다. 안젤리카의 손에 들린 그녀의 핏기를 잃어가는 얼굴은 내 얼굴로 치환되어 꿈에 나오고는 했다. 내가 내 머리통을 바라보는 기분. 선명한 붉은색의 피. 끊임없이 내 정신을 갉아먹던 기억들. 그런 후유증을 알렉시스가 조금씩 치유해 주었다. 알렉시스를 처음 본 날 정신을 잃고 물에 빠져버렸지만 그 이후로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온통 치유의 시간이었다. 이전의 증상들이 눈에 띄게 나아졌다. 어쩌면 나는 여기서 정말로 요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 주치의는 알렉시스겠지.


    심란한 마음은 방으로 돌아와 저녁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안젤리카가 살아 돌아와 이번에는 알렉시스에게 해를 끼치는 상상을 벗어낼 수 없었다. 아직 그녀의 죽음을 확신할 수 없었다. 카타리나의 머리통에 이어 피가 쏙 빠진 알렉시스의 머리통을 보기는 싫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슈들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모르싸의 쇠퇴와 안젤리카의 사망 소식. 그리고 나의 거취와 알렉시스와의 관계.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문제들 사이에서도 알렉시스에 관한 문제에는 끝내 답을 정할 수 있었다. 알렉시스가 나를 바라고 있었다. 나도 그녀를 원했다. 용기를 낼 때였다. 나는 내일 그녀와 파티를 즐길 것이다.

    만약에 모르싸가 아직 건재했어도, 안젤리카의 사살 소식을 몰랐더라도 지금의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그렇게 질문한다면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본능을 지배하는 수준의 공포라는 것은 일반인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공포를 맛보면 사람은 그 앞에서 한 마리 짐승이 되어 똥오줌을 흘린다. 1년 전만 해도 나도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어쩐지 손이 저려 주먹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나는 용기를 낼 것이다. 다시금 용기를 다짐했다. 오늘은 늦은 저녁을 먹었다.



    답답함을 느꼈다. 나는 거위 털이 묵직하게 누벼진 흰 이불을 걷어찼다. 이불은 그 두꺼운 두께만큼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문득 이 녀석을 처음 봤을 때, 내가 얼마나 신나 했었는지가 떠올랐다. 우다다 달려가 그대로 점프해서 얼굴을 처박았었지 아마.

    걷어찬 이불 위로 한 다리를 턱 올렸다. 벌써 자정이 훨씬 지났음에도 잠은 전혀 오지 않았다. 오히려 눈앞의 천장은 어두운 밤 속에서 더욱 또렷했다.

    짙은 네이비 색 실크에 흰 자개단추가 빛나는 파자마 앞섬을 풀어헤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슬리퍼를 신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맨발로 침대를 벗어나 두꺼운 카펫을 건너 창가로 갔다. 머리 위의 거대한 샹들리에 크리스털 알 하나하나에 그 아래를 지나가는 내 모습이 잘게 나뉘어 비쳤다. 두꺼운 암막 커튼과 뒤에 겹친 옅은 시폰 커튼을 한꺼번에 잡고 단숨에 열었다. 커튼이 숨기고 있던 하얀 달빛이 내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아니, 이걸로 부족해.

    나는 새시를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고요한 알프스의 자태에 반사된 달빛이 시렸다. 그제서야 나는 만족할 수 있었다. 답답함이 조금은 풀렸다.

 금방 찬 공기가 내 속살을 파고들었다. 난간 아래 공터에 잔뜩 쌓여 있는 눈이 보였다. 만화적인 그림체로 저 눈더미에서 삐뚤빼둘한 선형의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와 하늘색 선으로 표현된 냉기들을 흩트려 날려버렸다. 슬슬 이곳의 냉랭함에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그러지 못했다.

하긴, 나는 그곳에서도 스페인어가 전혀 늘지 않았었지.

    역마살이 낀 한량의 본성이 이제 슬 이곳을 떠나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나는 그 목소리에 답을 하는 대신에 가만히 서서 호흡했다. 내 숨결을 따라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유독 짙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공중에 흩어지는 뿌연 입김을 스크린 삼아 그 속으로 이곳에 오기 전에 머물렀던 장소가 영사되는 듯했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 문을 바라보았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

    내가 잘못 들은 것일지도 몰랐다. 문과 정반대 편에 위치한 테라스에 나와 있으니 거리가 제법 있어 잘못 들을 법도 했다. 이 사치스러운 요양원의 객실들은 하나 같이 모두 거대했다.

    허상의 상대에게 '누구세요?'라고 답할 수는 없으니 대신 조용히 문을 바라봤다. 다행히 응답받지 못한 노크 소리는 다시금 들려오거나 하지 않았다. 가만히 문을 바라보다 어느 결에 집중력이 풀어진 내 머릿속은 순식간에 작년의 한 시점으로 돌아갔다.


    나는 하바나에서의 한순간을 거닐고 있었다.

    똑똑똑

    이번에는 확실히 들려온 노크 소리가 나를 하바나에서 다시 차가운 알프스로 끄집어냈다. 누군가가 있었다. 나는 결국 소리를 내 응답했다.


    “누구세요?”


    나는 그 자리에서 외쳤다. 그러다 테라스 밖에서 소리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방 안으로 들어와 재차 외쳤다.


    “거기 누구예요?”


    그러나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밖에 누군가가 확실히 있다. 노크 소리는 착각이 아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시기가 교묘했다. 안젤리카가 죽었다. 혹시 리더 자리가 비어버린 모르싸의 후계 자리를 탐내는 실력자가 나타나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그녀의 흔적 지우기에 나서기라도 했다면?

    꿀꺽

    문밖에 있는 자는 모르싸의 살수들 중 하나인가? 내가 문을 열기를 기다리며 검은 베일에 싸인 누군가가 총구를 문에 겨누고 있는 장면이 그려졌다. 그들을 멕시코 밖에서 만나는 일은 내가 절대로 원하지는 않는 것들 중에 하나였다. 다국적의 인종으로 이루어진 그들은 밖에서 마주친다 해도 그들이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절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문 앞에 섰다. 그러나 선뜻 문을 열 수 없었다. 이 문 하나가 나를 죽음의 마수로부터 지켜주는 유일한 방어막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노크소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던 소리로 치부하고 그대로 무시할까? 미지의 상대가 문을 억지로 부수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면 침대로 도망쳐 수면으로 지금 상황을 없던 것으로 돌리고 싶었다.

    숨죽이고 귀를 기울였지만 더 이상의 소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내가 정말로 잘못 들었던 것일까? 그러나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인생이었다.

    똑똑똑

    빌어먹을 노크 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젠장, 누구냐고요!”


    놀림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울분을 토하며 문을 벌컥 열었다. 문을 엶과 동시에 오금이 저려왔다. 다행히 열린 문틈으로 총구가 내 미간을 겨누고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루, 룸서비스 시킨 적 없어요!”


    나는 재빨리 문을 다시 닫으려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콱

    문과 벽 사이에 붉은 하이힐이 끼어들어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 아프지 않으려나? 내가 힘을 잔뜩 줘서 잡아당긴 문에 끼인 저 발이 멀쩡할 것 같지는 않았다. 긴박한 와중에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나,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래에서 올려 차는 발차기가 문손잡이를 잡고 있는 내 손과 팔을 차올렸다. 손잡이는 내 손에서 미끄러져 나갔고, 팔꿈치 근처를 맞아 관절 쪽에서 시작된 큰 통증이 내 척수를 타고 뇌로 전달되며 내 정신을 빼놓았다.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한 형체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소리를 질러야 해! 그러나 내 생각을 잃기라도 한 듯이 매끄러운 형체는 내 몸을 요리조리 타오르는 뱀처럼 감싸더니 나를 순식간에 바닥으로 제압했다.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작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간신히 알 수 있었다. 침입자는 당연히 숨통을 조여 내 입을 막아버린 것도 잊지 않았다. 통제를 벗어난 문은 단단히 설정된 힌지의 힘으로 저절로 닫혔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나는 얼굴이 도톰한 카페트의 바닥에 짓눌린 상태로 상대가 어떻게 움직여 나를 제압한 건지 떠올려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진짜 암살자인가? 나 이제 죽는 거야? 이 생각이 들자 방광 근육이 저려왔다. 다행히 그대로 실례를 하기 전에 몸의 통제권을 되찾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지킬 수 있었다.


    “쉬잇…”


    상대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얼굴이 잔뜩 짓눌린 상태로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내 볼이 부벼지며 카페트의 보풀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뭐지? 나와 대화하려는 건가?

    어쩌면 단순 암살이 아닌 내게서 듣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걸지도 몰랐다. 단순히 나의 제거가 목적이었다면 나는 이미 숨을 쉬지 않고 있었겠지. 안젤리카의 뒷정리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내가 모르싸에서 어떤 위치였는지 알고 있을 것이고, 그들이 모르는 안젤리카의 무언가를 내게 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뭐든지 다 말할 준비를 마쳤다. 숨통이 트이자마자 나는 다급하게 속삭였다.


    “살려주세요! 다 말할게요!”

    “뭐든지?”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입은 자유를 찾았지만 고개를 비롯한 다른 몸통은 여전히 억압된 상태였기에 상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혹여 얼굴을 보면 정말로 죽여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 안도했다.


    “뭐든지요.”

    “이름.”


    내가 순종 선언을 하자마자 곧바로 질문이 들어왔다.


    “정진.”

    “국적.”

    “한국입니다.”

    “모르싸의 일원인가?”

    “그게 조금…”

    “조금?”

    “애매해서요.”

    “최대한 덜 애매하게 말해봐.”

    “포로라고 할까요?”

    “왜 포로가 됐지?”

    “그것도 조금…”

    “또 조금? 혹시, 지금 장난치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제가 뭔가를 알게 된 것도 있고, 모르싸의 리더가 저를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 했던 것도 있습니다.”

    “뭘 알았기에 포로가 되셨을까?”


    순간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시험해 보려는 수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싸의 와해가 세계적인 뉴스화되었다고 해도 아직 모르싸라는 단체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쉽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나는 어쩌란 말인가! 울음이 날 것 같았다.


    “누구세요, 그런데.”

    “재미있네. 지금 질문을 할 처지라고 생각해?”

    “그건 정말 아닌데요. 제가 그걸 알면 대답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그것도 아주 큰 도움이요.”


    목소리는 잠깐 고민하는 것 같았다.


    “순종적인 것이 마음에 드는군. 모르싸의 리더가 개인적으로 좋아했다는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아.”

    “제가 포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정말이라고요.”


    목소리는 ‘푸후후’하고 웃었다. 조금 익숙한 목소리가 섞여 들린 것 같았다.


    “그래, 아주 사랑받는 포로였겠어. 어릴 적에 기르던 말티즈가 생각나게 만드는 군. 그럼 조금 편한 자세로 바꾸어 줄까? 네가 모르싸의 일원이 아니라는 건 잘 알겠어. 적어도 전투원은 아니겠지.”

    “당신, 모르싸가 아니군요?”


    순식간에 위에서 누르고 있던 압력이 사라지고 나는 얌전히 바닥에 누워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 부자연스러운 자유에 그대로 누워서 청각을 곤두세웠다. 주변은 조용했다. 혹시나 방금 제압당하는 꿈을 꾼 것은 아니지? 너무 피곤한 나머지 방에 들어가자마자 방바닥에 기절해 잠이 들었던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내 소망을 담아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나는 방금 몽유병을 동반한 악몽에서 깨어난 것이다.


    "하음, 잘 잤다."

    "꿈 아니야."


    여자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 희망을 짓밟았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대답을 하며 여자의 목소리를 향해 돌아보았다. 미셸이 옷장에 기대어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당신일 줄 알았어요. 중간에 목소리 변조 컨트롤을 잠깐 놓쳤던 것 같더군요."

    "어머, 그랬나요? 기계장치 없이 완전히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요."

    "평소에 목소리를 바꾸는 연습을 하나요? 당신 정체가 뭐죠? 인형극이나 더빙 성우를 하는 사람 같지는 않고."

    "이래저래 그런 잔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에 몸담고 있어서 말이죠. 그나저나 아까까지는 간이고 쓸개고 달라는 대로 다 꺼내줄 것 같더니 지금은 꽤나 당당해졌네요? 저인 것을 확인하고 안심이라도 되었나요? 아니면 저라는 것을 알게 되니 만만한 기분이 들기라도 한 건가."


    그녀는 상냥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나긋한 그녀의 목소리가 전한 메시지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의 발을 확인했다. 역시나 아까의 멋진 올려차기를 선보인 붉은 하이힐이었다. 형체를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내 혼을 빼놓고 바닥에 제압해 버린 것은 분명 눈앞의, 502호 이웃사촌 미셸이었다. 정리가 끝난 나는 다시 순종의 마스크를 착용했다.


    "무조건적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소속이 어디시죠?"


    그녀는 이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요, 당신이 걱정하는 것처럼 모르싸는 아니니까. 저는 CIA 요원입니다."

    "영국 억양을 쓰는데요?"

    "나서 자란 곳은 영국이니까요. 탬즈강이 보이는 카나리 와프의 고층 아파트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집이죠. 정문을 나서면 운하 앞에 아주 멋진 벚꽃나무가 심긴 녹지가 사랑스러운 곳이에요. 물론 미국 억양도 쓰려면 잘 쓰지만 오히려 편하게 말을 하고 다니는 것이 제 신분을 숨기는 데에는 도움이 되니까요. 영국과 미국 영어의 발음이 차이가 크다는 것이 이럴 땐 참 좋더라고요."


    순간 모르싸의 배에서 처음 정신을 차린 날이 떠올랐다. 그때 누군가가 CIA는 세계에서 온갖 인재들을 모아서 요원을 육성한다고 불평을 했었지. 그 요원 육성 방침의 산물이 내 눈앞에 있었다. 직접 만나보니 안토니 당신이 골칫거리라 여길 만하네요! 그런데 지금 살아는 계신 거지요, 안토니?


    "CIA 요원 미셸. 알겠어요, 믿을게요. 뭐가 궁금하죠?"

    "당신의 이야기요."

    "그전에 물어볼 것이 있어요. 당신네 정보력은 세계 최고겠지요?"

    "물어봐요."


    자신감이 묻어나는 반응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뭐든 물어보라는 태도. 그런 그녀의 모습에 괜히 엉뚱한 것을 묻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예를 들어 ‘지금 스타벅스 주식을 사도 될까요?’ 같은) 손쉽게 억누를 수 있었다. 지금은 더 급히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안젤리카는… 모르싸는 정말로 끝난 건가요?"

    "안젤리카라… 역시 무언가가 있었군요."

    "무언가 낌새를 채고 있었던가요?"

    "모르싸 전면에 나서서 활동하는 리더는 분명 카타리나 사파타. 그녀에게 올해 들어 수상한 변화가 생겼어요. 우리는 멕시코 내의 이상한 움직임에 대한 첩보를 기반으로 작년부터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어요. 모르싸의 사적인 군대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가져가고 있었죠. 가뜩이나 멕시코의 카르텔이 미국으로 밀반입하는 마약들은 갈수록 우리 사회에 큰 골칫덩이가 되고 있어서 말이죠. 자기들은 마약을 팔아 큰돈을 쓸어가는데 우리 도시들의 길거리는 더욱 지저분해지고 있으니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요?

    어쨌거나 모르싸가 카르텔들을 거의 통합해 버리는 바람에 우리 입장에서는 감시가 한결 수월해졌죠. 그러던 중에 올여름, 카타리나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의문이 제기되었어요."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대단한 정보력이었다. 그들은 2대 카타리나에서 3대 카타리나로 넘어가며 생긴 변화를 알아차린 것이다. 미국의 정보기관이나 이스라엘의 모사드의 무시무시한 괴담들이 실제를 기반으로 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는 모르싸의 리더에게 무언가 비밀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녀에 대한 첩보 활동은 틈틈이 진행 중이었어요. 요원이 업데이트한 첩보에 따르면 과거와 달리 그녀의 외관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고 했죠. 그게 살이 찌거나 빠지거나 하는 정도의 변화였다면 자연스러웠겠지만 골반의 골격이 미세하게 다르다는 내용이었죠. 요즘 할리우드에서 유행한다는 골반 성형 수술을 전투를 직접 뛰는 것으로 유명한 전투조직의 리더가 받았을 리는 만무하다는 추측이었어요. 물론 실제로는 성형수술이었을 수도 있지만. 카르텔의 리더라도 여자이기는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카타리나라는 인물이 그저 더미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가설을 세웠어요. 그리고 그녀에 대해 깊이 파면 팔수록 이 허무맹랑한 가설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확률이 높아졌죠."


    그녀는 거실로 걸어가 가장 편안한 소파에 앉았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따라가 옆의 의자에 앉았다(다행히 그녀는 ‘누가 앉아도 좋다고 했지?’ 등의 면박은 주지 않았다.)


    "카타리나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조사부터 시작했어요. 만약 카타리나라는 더미가 있다면 모르싸의 실체는 누구인가? 유력한 용의자들을 뽑으려 했죠. 그러나 진짜 리더의 성별, 나이, 모든 것이 불명이었어요. 그래서 우린 용의자들의 리스트를 모조리 분석해 그들이 한자리에 있을 때를 기다렸어요. 한 방에 모두를 잡으면 그중에는 진짜 리더가 있을 것이니까요. 그게 이번 뉴스에 보도된 소탕 작전입니다.

    작전은 성공이었어요. 그러나 이제 누가 진짜 리더였는지 알아내는 작업이 필요했죠. 사실을 확인해 줄 사람이 없었어요. 진짜 리더에 대해 아는 사람도 모르싸 내부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알고 있을 만한 사람들은 작전 중에 다 사살되었죠. 그나마 정보를 알고 있을 듯한 머리가 긴 남자 생존자도 회유를 해봤지만 그냥 자결해 버렸어요.

    하지만 우리의 레이더 망에는 당신이 걸려들어있던 상태였죠."

    "제, 제가요? 어쩌다가요?"

    "모르싸의 자금줄 추적 중에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거든요. 스위스 은행에 있는 계좌 중 하나였죠. 스위스 비밀금고가 몇 개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추적할 수 있었던 계좌 하나의 흐름이 바로 이 이상한 요양원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죠. 바로 당신이 여기서 써대고 있는 돈."

    "그래서 나를 조사하러 당신이 파견된 거군요. 옆방인 502호에."

    "맞아요, 일부러 당신 옆방을 달라고 했어요."

    "프란시스가 뭐라고 안 하던가요?"

    "아무것도요. 그냥 501호에 대한 약간의 정보를 가진 채로 체크인해서, 처음부터 502호를 콕 집어 달라고 했더니 순순히 내어줬어요. 그 사람도 특별히 관계가 있나요?"

    "아뇨, 그는 그저 이곳의 지배인일 뿐이에요."

    "좋아요. 그렇다면 이제 대답해요. 정진. 대한민국 출생의 30대 남성. 미국과 동맹국인 한국의 해군인 아버지의 파견 때문에 미국에서 장기간 체류했었죠. 그리고 별문제 없이 지내다가 돌아갔죠.

    당신의 행적을 조사했어요. 성인이 되고 세계를 이리저리 방랑자처럼 돌아다녔더군요? 최근에는 공산국가인 쿠바의 하바나에서 머물다가 갑자기 행적이 묘연해졌어요. 그리고 이곳에 다시 나타났죠.

    당신에 대한 몇 가지 가능성이 있었어요. 하나는 모르싸에 납치된다. 다른 하나는 모르싸의 이상에 동참하여 입단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공산주의의 전사가 되어 사상전파를 위한 테러를 위해 행방을 감췄다. 행방불명 전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 것은 수상한 징조였죠. 뒷세계의 브로커들이나 스파이들이 이렇게 움직이거든요.

    그러나 나는 당신을 만나보고 직감했죠. 이 사람은 혁명을 꿈꿀 인물은 못 된다는 걸요. 당신의 자신은 그저 모르싸의 포로라는 말을 믿어요.

    자, 그럼 다시 물을게요. 모르싸의 진짜 리더를 당신은 알고 있나요?"


    이제 더 이상 말을 돌릴 수도 없었다. 미셸이 이렇게 장황하게 자신의 카드를 보여준 후에 나를 겨눠 질문을 날렸다. 나를 믿는다는 그녀의 말이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어쩌면 CIA에서 요원들에게 가르치는 협상과 회유의 기술에 당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모르싸의 몰락도 확실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바다에 떠 있는 배에서도 커튼을 쳐서 지키려 했던 비밀을, 이제 용기 내서 말해도 될 때였다.

    미셸은 손바닥 만한 사이즈의 엽서들을 꺼냈다. 엽서에는 소탕 작전에서 사살된 시체들 개개인의 사진들이 촬영되어 있었다. 그녀는 내게 진짜 리더가 이중에 있는지를 물었고 나는 결국 처참한 몰골의 안젤리카의 사진을 확인했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흡족스러운 표정으로 사진을 추스른 미셸은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라고 말했다. 나는 하바나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말을 끊지 않고 모두 경청했다. 딱히 메모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보이지 않는 녹음기라도 켜놓고 있나?


    “그리고 방금 여기서 당신에게 걷어 차인 거죠.”


    미셸은 긴장을 완전히 푼 것처럼 보였다. 내 마지막 문장이 끝나고도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러지?

    내 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추임새나 중간에 떠오르는 질문을 할 법도 하지만 그녀는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난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내 이야기의 진위여부를 실시간으로 계속해서 판단하고 있는 건가? 어쩐지 CIA 요원이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스스로 이해시켜 버렸다. 살아있는 거짓말 탐지기.


    “당신이었군요.”

    “네?”


    갑자기 추궁하는 말을 듣게 되자 당황한 나는 재빨리 나를 변호했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충 모르싸와 같이 묶어서 사살 처리해 버리려는 건 아니겠지? 그게 장시간 걸렸던 그녀의 머릿속 연산의 결과물이 아니기를 바라며 간절히 어필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내 억장을 무너뜨렸다.


    “맞아요, 당신이었어요.”

    “젠장, 뭘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아니라니까요!”


    그나저나 지금 내가 뭐가 아니라고 말하는 거지? 일단 아니라고 박박 우기는데 미셸이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당신이에요. 모르싸를 무너뜨린 것 말이에요.”

    “저는 정말로 아니라… 네?”

    “모르겠어요? 이 모든 건 당신과 2대 카타리나 사이에 피었던 짧은 사랑이 불러온 나비효과였어요.”

    “아…”


    저들이 카타리나를 콕 집어 적출해 내는 것이 아닌 모르싸 수뇌부 일망타진을 결정한 것은 카타리나라는 존재에 의심을 가졌기 때문이고, 의심을 가진 이유는 나의 카타리나의 죽음에서 비롯된 외형 변화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의 카타리나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그녀의 죽음. 그리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제가 한 거군요.”

    “맞아요, 당신이 훗날 거대한 모르싸를 무너뜨리게 만드는 작은 실금을 낸 거예요.”

    “저였어요.”

    “그래요, 당신이었어요. 정말 드라마 같지 않나요? 폭력의 거악을 사랑으로 무너뜨리다니요.”


    나는 재차 미셸에게 물었고 그녀의 확인을 받았다. 하바나에서부터 시작되어 멕시코에서까지 당했던 일들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수많은 트라우마를 심겨준 기간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피만 보면 내 몸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내가 그들을 무너뜨렸다. 이게 내 복수인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정말로 내가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얼이 나가 있는 상태였지만 고양감에 혈압이 오르며 심장박동이 온몸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축하해요. 이제 자유의 몸이군요.”

    “감사해요. 미국에서는 저를 어떻게 처리할 예정인가요?”

    “말 그대로 자유의 몸이에요. 알아서 살아가세요. 지금처럼 떠돌아다녔던 것처럼 흘러 다녀도 되고요. 미국으로도 언제든지 돌아와도 좋아요.”

    “자유…”

    “이제 뭐 할 거예요? 아냐, 묻지 않을게요.”

    “그럼 미셸은 뭐 할 거예요?”

    “왜요, 같이 축배라도 들까요? 저는 할 일이 산더미예요. 이 모든 것을 정리해서 상부에 보고해야 하니까요.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CIA 요원이라면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이래 봬도 결국 회사원이나 다를 게 없거든요. 21세기 들어도 쓸데없는 서류 작업은 왜 이렇게 많은지.”

    “내일 미국으로 복귀하나요?”

    “사실 정리할 거리가 많아서 내일까지는 여기에 있을 것 같아요. 당신 일 말고도 여기 부르기뇽 요양원에 왔다가 추가로 얻어걸려버린 일이 하나 더 있었거든요. 그리고 내일은 크리스마스 파티잖아요? 이래 보여도 저도 투숙객이랍니다. 이 정도 휴식은 누릴 만하다고 생각해서 그것까지만 즐기고 갈 생각이에요. 이런 럭셔리 호텔은 사비보다 회사돈으로 즐겨야 제맛이거든요. 작은 복지랄까요.”

    “얻어걸린 일이라고요?”

    “여담이지만 530호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당신을 통해 들었잖아요? 조금 수상해서 남는 시간에 살짝 조사를 해 보니까 2차 세계 대전의 전범이더군요. 여태 이런 곳에 숨어서 지내고 있었다니 대단하죠. 그래도 평생을 떳떳하게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하고 여기에 처박혀 살아야 했던 것은 기존에 30년으로 설정되어 있던 나치 전범의 공소시효가 79년도에 사라진 덕분이겠죠. 어차피 이번에 죽어버렸지만.”


    그는 굳이 따지면 전범으로 묶일 대상은 아니었어요.

    마음속으로 그를 변호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이미 충분히 피곤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만 대화를 끝내고 그녀를 보내고 싶었다.


    “저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없나요?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죠?”


    그래도 방을 떠나려는 미셸에게 마지막 조언을 구했다.


    “자기 앞가림은 잘할 나이 아닌가요?”

    “모르싸에 시달려 자유와 자율에 대한 PTSD 같은 것이 생겼나 봐요. 그들을 떠나 여기서 보낸 시간이 꽤 되는데도 그들의 족쇄가 나를 옥죄고 있다는 느낌을 계속해서 받고 있어요. 고통스러워요. 그런데 갑자기 모르싸가 사라졌다고 말하니 세상에 나온 신생아가 된 것 같단 말이에요.”

    “조급해하지 말아요. 여기서 조금 더 쉬면서 생각해 봐요. 원래의 꿈은 뭐였어요?”


    꿈? 나는 꿈같은 건 없는 한량이었다. 그나마 비슷한 것이 있었다면 무려 유치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마 침대회사 연구원 같은 것이었다. 이것에 대해 지금까지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내가 큰 하자가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왜 이렇게 한심하게 살았지?


    “없었어요. 그래서 더 막막해요.”

    “하바나가 당신의 실종 전 마지막 행적이었잖아요. 그곳에서 끊어졌던 당신의 인생을 다시 이어가는 것은 어떨까요? 그쪽으로 다시 간다면 미국 여행은 조금 까다로워지겠지만. 아,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해요. 보아하니 여기서 새 여자친구도 만든 것 같던데?”

    “CIA는 심리상담 같은 것도 배우나요?”


    미셸은 피식 웃었다.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네요.”


    마지막 말을 마친 그녀는 휙 하니 돌아 문으로 향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배웅하러 따라 나갔다. 그녀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다 미셸은 손잡이를 돌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싶어 그녀에게 물었다.


    “문제라도 있나요?”


    미셸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마지막 질문이 있어요. CIA가 묻는 질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질문이에요. 당사자인 당신이 직접 느끼기에 말이에요. 안젤리카, 그녀의 당신에 대한 집착은… 사랑이었나요?”


    어려운 질문이었다. 나도 답을 알고 있지 않았다. 모른다는 대답대신 능글맞은 반문으로 돌려주었다. 


    “CIA도 그것은 알아낼 수 없었나요?”


    그녀는 피식 웃으며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졌다. 힌지의 힘을 받은 문이 스르르 닫혔다.


    ‘그렇다면 CIA 식 조사를 해보고 다시 알려드리죠.’


    미셸의 마지막 한마디가 아직 이 공간에 반향으로 남아 울리는 것 같았다. 그녀도 그저 농담으로 돌려준 것이길 바랐다. 그녀에게 제압당한 후 아직도 얼얼한 목 부근을 어루만지며 혼잣말을 했다.


    “조사결과고 뭐고 두 번 다시는 안 만났으면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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