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2월 23일. 이 시기의 당신이 파리나 런던, 뉴욕 같은 메가시티에 머물고 있지 않더라도 슬퍼 말라. 유럽에 있다면 이 산골 속에서도 서양 최대의 홀리데이 시즌의 분위기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으니. 크리스마스를 코 앞에 둔 지금, 세상은 마치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대 같았다.
부르기뇽의 식당과 로비, 엘리베이터에서는 연신 캐롤이 들려왔다. 그나마 조용한 것은 객실 안이나 복도였는데, 자세히 귀를 기울이면 멀리서부터 벽과 천장,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캐롤이 귀를 살살 간지럽혔다. 거기다 듣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도록 재즈, 오케스트라, 팝송 등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장르의 캐롤들이 재생되고 있었다. 프로페서 X의 마지막 길도 경쾌한 성탄절의 종소리와 함께 외롭지 않기를 바랐다.
더욱이 오늘은 이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절정을 느낄 수 있는 날로, 바로 요양원에서 큰 마음먹고 기획한 크리스마스 전야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파티 전날인 어제부터 초대된 인사들이 하나둘씩 요양원에 도착했다.
화려한 성탄 장식 아래에 평소보다 한결 더 우글거리는 인파는 캐롤 말고도 요양원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요소였는데, 이곳에 럭셔리함의 콘테스트라도 열린 것처럼 제각각의 방식으로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사치스러운 그들의 모습에 새삼 나 자신이 그들과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었나 자각할 수 있었다. 나도 이 요양원 안에서 만은 돈 걱정 없이 살고 있다지만 아직은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는 품격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언젠가 한국에서 들었던 졸부와 부자는 다르다는 말이 새삼 와닿았다. 요양원 지하의 아케이드에 입점한 럭셔리 편집숍에서 그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브랜드인 쇼파드의 시계를 차고 있다고 해서 내가 뿜어대는 아우라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그 시계의 구매도 사실은 수 천만 원이 하는 물건을 사버리면 안젤리카 계좌의 바닥이 드러날까 싶은 탐구심에 한 것이었는데, 어림없다는 듯 대금의 결제는 잔액 부족으로 거절되지 않았고 문제없이 승인되었다. 이놈의 계좌는 어떻게 돼 먹은 계좌인지는 모르겠으나 밑을 알 수 없는 항아리처럼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았다.
계좌에 대한 의문은 정오에 언질도 없이 요양원에 방문한 변호사로 인해 해결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앞두고 이런 오지에 출장을 나오게 된 변호사는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프로의 자세로 업무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그는 안젤리카 가문의 스위스 계좌를 함께 관리하는 변호사로 유언장 집행을 맡았다고 했다. 그로써 나는 다시금 안젤리카의 죽음을 공증받을 수 있었다. 정말 끝이었다.
“뭐라구요?”
“저희 고객님의 스위스 계좌 두 개가 본인 사망이 확인된다면 정진 씨에게 양도되게 됩니다. 그것이 고객님의 최종 유언입니다.”
“상속인 이름이 제 이름인 거 확실해요? 왜 저에게요?”
그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 자꾸 되물어대는 나를 맥도날드 셀프 주문 키오스크처럼 대했다. 그러니까 기계처럼 같은 대답을 반복적으로 했다는 뜻이다.
“네, 맞습니다.”
“제, 제가 뭘 해야 하나요?”
“오늘은 정진 씨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확인 차 방문한 것입니다. 정진 씨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연락을 할 수가 없어서요. 유언의 최종 집행은 연휴가 끝나고 새해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나요?”
“새로 발급받은 여권이 있어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다시 만날 때 서류 작업과 본인 확인 절차를 거치면 모든 것이 마무리될 겁니다. 유산을 받으시는 방식은 계좌를 그대로 승계받는 방법과 전액 원하시는 다른 계좌로 이체하는 방법이 있는데 어떤 방식을 원하시나요?”
“지금은 너무 놀라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황이거든요. 천천히 생각해도 되나요?”
“네, 가능합니다. 그럼 다음에 두 가지 상황의 서류를 모두 준비해서 만나죠. 연휴 동안 천천히 생각해서 답을 주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을 공손하게 했다. 변호사는 어두운 갈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살바토레 페레가모 서류 가방에서 서류와 누런 천 꾸러미 하나를 꺼내어 내게 건넸다.
“여기 주머니 안에는 일의 처리가 완료될 때까지 저희가 대여해 드리는 전화기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다음 약속과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질문해 주시면 됩니다. 전화기의 연락처를 보시면 저장된 세 개의 번호가 있는데, 어느 번호로의 연락도 모두 가능합니다.”
“세심하시군요. 그럼 이 서류들은 뭔가요?”
나는 그가 들고 온 두 장의 출력물을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정진 씨가 받게 되는 두 계좌의 정보입니다. 물론 잔액도 나타나 있고 예치금은 전액 미국 달러입니다. 지금 열어보셔도 됩니다.”
변호사의 설명과 허락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부리나케 종이를 집어 내용을 살폈다. 손이 벌벌 떨렸다. 요즘 감정의 요동이 너무 급격하고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 이러다 심장에 무리가 가는 거 아냐? 종이에 적힌 잔액을 한 자리씩 세어가는 내 손가락이 중간에 멈추어 섰다. 내가, 아니 정진 10명이 평생 써도 다 쓸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녀가 이, 이렇게 많은 돈을 왜 저에게?”
이제는 목소리까지 떨렸다. 그러나 변호사는 내 상태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며 다시 맥도날드 키오스크 답변을 했다. 이번 답변 뒤에는 작별 인사도 덧붙였다.
“그건 저도 모르죠. 그럼 좋은 연말 되시고 내년에 뵙죠.”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변호사는 전형적인 연말 인사를 남기고 훌쩍 떠나갔다. 남겨진 나는 여전히 서류를 붙들고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안젤리카는 왜 유언을 이렇게 고쳤는가? 안젤리카에게 나는 무엇이었나? 안젤리카는 정말로 나를…
문득 어제 미셸이 던졌던 마지막 질문이 떠올랐다.
‘안젤리카, 그녀의 당신에 대한 집착은…. 사랑이었나요?’
그녀의 삐뚤어진 사랑 두 장이 내 손에 들려있었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오후 5시. 사람들은 속속들이 파티의 주 무대인 로비와 연회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저녁에 다시 이곳에 모여 상류층의 파티란 어떤 모습인지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낮과 동일한 장식의 로비였지만 어쩐지 이곳을 꾸미는 데에 사용된 자재들 값이 반나절 사이에 더욱 비싸진 것 같았다.
이 화려한 인사들 사이에서 내가 아는 얼굴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바로 나의 사랑스러운 프랑스 중견 여배우. 나는 반가움에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올 크리스마스 장식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빵으로 된 대형 트리 아래로 나를 끌고 갔다.
“이거 진짜 먹을 수 있는 거야?”
“저보다 이 빵 트리가 더 반가운가 봐요?”
“무슨 소리야! 자기가 이깟 빵나무보다는 더 반갑지. 그래서 먹을 수 있어? 없어?”
“일단은 음식으로 만들었긴 해요. 그런데 사실 진짜로 먹으라고 만든 건 아니라 먹고 배탈 나도 몰라요.”
“흠, 그렇군. 그저 컨셉일 뿐이었나. 결국 가짜로군. 유일하게 좋아하는 영국 작가의 상상 속 세계가 실현되었나 기대했건만.”
“셰익스피어요?”
엠마는 어림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당연히 로알드 달이지.”
“그렇다면 ‘찰리와 초콜릿 공장’ 말이군요?”
엠마는 두 팔을 교차로 팔짱을 끼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론상 먹을 수 있는 침엽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머리 위로는 화이트 초콜릿 볼로 된 겨우살이들이 늘어져 있었다. 그녀의 머리 근처에 있으니 꼭 진주가 박힌 티아라처럼 보였다. 문득 내 왼손목의 쇼파드 시계를 보았다. 분명 7천만 원가량을 지불하고 산 시계지만 그녀 앞에서는 20만 원짜리 티쏘의 시계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아니, 지금 많이 배고파요? 어차피 원하면 산해진미를 바로 먹을 수 있잖아요. 조금 있으면 파티 음식들도 가득할 테고요.”
“맞아, 그래서 그런 건 아니야. 여기에 그냥 도착하자마자 에스코트하는 직원의 이 초대형 식용 트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쭉 들었던 의문이었던 거지. 모처럼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나 기대했는데 먹을 수 없다니. 실망인걸?”
뭘 또 실망하실 것까지야. 이것만 먹으러 온 것도 아닐 텐데. 나는 이 프로젝트의 비공식 공동 기획자(홈페이지나 유인물, 기자들의 기사에 내 이름이 들어가지 않았다)로 빵 트리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그래서 조금 있다 파티의 중간에 따로 제작된 식용 트리가 나올 테니까요. 크기는 이것보다야 작겠지만.”
“어머, 정말?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
“정말로 제가 그냥 단순한 투숙객으로 보이시나요?”
“그래, 자기에겐 늘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지. 그래서 내가 바로 알아본 거고.”
“처음에는 분명 나를 고기 구워주는 일개 직원으로 착각하지 않았었나요?”
“민망한 얘기를 뭣 하러 다시 꺼내.”
“하하하, 장난이에요. 아까 보니까 이번 파티에 동행을 데리고 오신 것 같던데?”
“내 새로운 애인이지.”
“꽤나 젊어 보이던데요?”
“젊은 언론인이야. 그냥 파리의 작은 신생 가십지 소속인데. 글 실력은 몰라도 밤에 침대에서는 꽤나 쓸만해.”
“가십지 기자요? 여배우의 연애 상대치고는 너무 리스크가 큰 것 아닌가요?”
“나야 뭐 산전수전 다 겪었으니까. 더 다칠 것도 없어. 기대도 안 하고 있고. 아직 나에 대해 구글링 안 해봤구나?”
“아시잖아요. 웹이랑 먼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거.”
“언젠가는 그 동굴 생활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길 바라.”
“네, 엠마도 식용 트리가 나오면 어릴 적에 못 이뤘던 헨젤과 그레텔의 꿈을 이루길 바라요. 나뭇가지 하나 꺾어서 남자친구에게 선물도 하고요.”
그녀는 주름진 미소로 우아함의 가루를 뿌려대며 유유히 인파와 그들이 보내는 시선들 속으로 퇴장했다. 그녀를 보내고 눈을 열심히 굴렸다.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퇴근한 지 한참 됐을 텐데…”
나는 로비 이곳저곳을 누비며 그녀를 찾아 헤맸다. 나의 그녀 알렉시스. 그녀가 오늘 오전 근무를 마치고 그르노블로 드레스 쇼핑을 다녀올 수 있게끔 쇼퍼 서비스를 요청했었다. 원래는 쇼핑에 동행하려고 했으나 그녀 혼자서 다녀오는 것으로 변경했다. 알렉시스의 요청에서였다. 미리 그녀의 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결혼식 전에 모습을 보이기 싫은 신부와 비슷한 이유일까? 그렇게 그녀는 홀로 벤츠 S클래스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녀와 따로 연락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답답할 줄은 몰랐다. 방에 던져둔 변호사가 준 전화기를 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려나?
프런트 데스크 위의 독수리상에 올라가서 범선 돛대의 장루에서 주변을 살피는 것처럼 로비 사방을 둘러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움직였다. 실제로 독수리 위에 올라타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 2층 난간에 기대어 한 마리 독수리처럼 아래를 훑었다.
“누구 찾아요?”
“악, 깜짝이야!”
내가 찾던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알렉시스는 장난스럽게 내 옆의 난간에 기대어 열심히 아래층을 함께 훑는 시늉을 했다. 나는 그녀의 모습에 얼어붙었다. 그녀는 로비에서 눈을 떼고 나를 돌아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 요양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
“혹시 그 사람이 바로 저인가요?”
오후 시간 내내 내 마음을 졸이게 만들던 알렉시스는 눈부신 모습으로 내 옆에 있었다. 짙은 남색과 짙은 붉은색이 어우러진 그녀의 드레스는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있어 소녀다운 면이 있었지만 그녀의 완벽한 몸매의 선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어 여성스러움도 한껏 과시하고 있었다.
“이 드레스 얼마였었죠?”
“자라에서 세일 조금 받고 50유로였죠, 아마?”
“저 아래에 5000유로짜리 드레스가 있다고 해도 지금 이 옷보다는 아름답지 않을 것 같아요.”
내 과장된 칭찬에 알렉시스는 얼굴을 붉혔다. 농담이었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그녀가 단순히 농담으로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도 파리의 옷장에 500유로짜리 드레스는 가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 옷을 입으면 50000유로짜리 드레스도 이길 수 있겠는걸요?”
“하하하, 세상에 50000유로짜리 옷이 어디 있어요? 아 유명 디자이너의 맞춤 드레스라면 그 정도까지 가려나? 그나저나 그쪽도 오늘 멋진데요?”
그녀는 팔짱을 끼고 나를 위아래로 장난스레 훑어봤다.
“오늘을 위해서 지하에서 맞췄어요. 처음 듣는 브랜드인데 ‘제냐’인가 하는 곳이었어요.”
“딱 어울려요. 이리 와요.”
그녀는 자연스레 내 팔짱을 꼈다. 우리는 나선형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며 이 공간을 음미했다. 파티를 위해 초대된 재즈 콰르텟의 라이브 연주와 성대한 크리스마스 장식들. 따뜻한 조명이 비추는 화려한 로비의 인테리어와 화려한 복장으로 웃고 떠들기 시작한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이 완벽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며 모든 것을 음미했다. 그중에 가장 맛있는 것은 내 옆에 나와 발을 맞추고 있는 여인이었다. 파티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하는 느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짜릿함이 있었다.
“내가 진작에 했어야 하는 말을 지금 해도 될까요?”
그녀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뻔뻔한 표정으로 거만하게 허락했다. 물론 나에게는 큰 결심이 필요한 선택이었지만 그녀는 모르겠지. 미셸이 내게 확인받았던 사살된 안젤리카의 사진이 아직도 어른거렸다.
“어디 한 번 들어볼까요?”
“제 여자친구 할래요?”
알렉시스는 여전히 뻔뻔한 미소로 물었다.
“한국에서는 시작할 때 보통 그렇게 말하나 봐요?”
“조금 이상했나요?”
“아니요, 그래도 귀여워서 제 마음에는 쏙 들었어요.”
“후아.”
나는 걸음을 멈추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나의 과장된 동작에 내가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많이 긴장했어요?”
“조금요. 손이 좀 떨리는데요? 그럼 정식으로 손을 잡아 볼까요 우리?”
“좋아요. 제가 좀 진정시켜 드릴게요.”
나는 정중히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녀도 배시시 웃으며 내 손 위에 그녀의 손을 사뿐히 올렸다. 그리고 내게 엄숙하게 말했다.
“자, 그럼 우리의 관계를 축복해 주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위해 손을 흔들어 주자고요.”
우리는 파티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며 로비의 많은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감사 인사를 보냈다. 물론 자기들끼리 떠들고 마시기 바쁜 파티 인파 중에 우리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파티의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할 때, 연회장에서 파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프란시스의 스피치가 있었다. 스피치가 있음을 알리는 안내 방송에 따라 사람들은 연회장으로 모여들었고, 단상 위에 선 프란시스는 사람들의 박수 속에 입을 열었다. 으레 이런 파티에서 나올 법한 주최자 스피치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 내용에는 은근히 요양원이 앞으로 변할 거라는 암시가 담겨 있었다.
그의 변화된 경영 방식에 뿌듯함인지 부담감인지 모를 묘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부추긴 결과물이었다. 내가 여기서 어떤 영향들을 미치고 있는 건가? 왜 이렇게 된 거야?
나는 찬찬히 파티장의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프란시스의 연설 내용을 곱씹었다. 모두 다 나의 관여가 있었던 것들이었다. 나의 본성이라 생각했던 한량의 정체성과 이런 행보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 내가 바꾼 것들을 보니 이런 결실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정체성에 대한 잠깐의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나를 깨우는 것은 역시나 내 옆에 착 붙어있는 알렉시스였다.
“프란시스 씨 저렇게 보니까 완전 멋있는데요?”
“그러니까요. 우아하다는 말이 어울려요.”
“우아함이라… 정진 씨랑은 거리가 좀 먼 단어려나?”
“제 우아함을 아직 잘 모르시나 본데요. 한번 보여줘요?”
“오늘은 사양할게요.”
“오늘같이 우아함을 뽐내기 좋은 시기와 장소가 어디 있다고…”
장난스레 토라진 표정을 짓는데 누군가 우리의 어깨를 동시에 잡고 흔들었다.
“자네들 여기 있었구만!”
바로 오늘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브라운 씨였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를 보자마자 찬사를 보냈다.
“여기 장식 너무 멋진데요?”
“정말 너무 성공적이에요! 너무 예뻐요!”
브라운 씨는 흐뭇한 표정에 상기된 목소리로 우리에게 좋은 소식들을 알렸다.
“다 자네들 덕분이지! 아까 낮에는 단독으로 매거진 인터뷰도 했었다네! 요양원에서 인터뷰를 위해 근사한 미팅룸을 대여해 주었다니까!”
“인터뷰는 어땠어요? 너무 긴장하신 건 아니었죠?”
“하하, 이제 나에게 인터뷰 따위야 아무것도 아니지. 아주 기가 막히게 해냈다고! 기자에게 선물할 빵과 함께 실을 자신 있는 빵들을 챙겨가서 사진도 찍고 시식도 진행했다네. 내 실력을 맛보고는 아주 눈이 휘둥그레지더군.”
“정말 축하해요! 이제 시작이네요?”
“그래, 갈 길이 멀지. 그래도 이제 가야 할 방향과 방법을 찾은 느낌이야.”
“언젠가 파리에 아저씨 브랜드의 플래그십 파티세리가 열리면 꼭 초대해주셔야 해요!”
“그렇게만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꼭 둘을 초대함세. 이제 식용 트리 두 개가 등장할 거니까 자네들도 다른 사람들이 먼저 다 뜯어먹기 전에 달려들라고!”
아저씨는 평소보다 가벼운 뒤뚱거림으로 자신의 오늘 밤 마지막 미션을 챙기기 위해 식당 방향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만화 캐릭터 같이 움직이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며 같은 감상을 남겼다.
“여전히 귀여우시다니까요.”
“귀여워라.”
그리웠던 그녀와의 아이컨택.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매 순간이 너무나 소중한 시간으로 남겨졌다. 이 마음을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아, 거기 있었구나!”
내 로맨틱한 감상을 깨버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피트니스 그 녀석이었다. 그는 요양원의 투숙객으로 보이는 노부인을 옆에 끼고 그녀를 끌고 다니다시피 하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알렉시스, 정말로 파티에 초대받았었군.”
“내가 말했잖아.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그리고 아마 내가 마지막으로 한 부탁도 기억하고 있을 텐데. 그 사이 잊어버릴 만큼 머리가 나쁘진 않잖아?”
알렉시스는 차가운 인사를 하며 불쌍한 노부인에게 목례를 했다.
그녀의 부탁이라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거였지 아마?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와 같은 말과 함께였었다. 다시 생각해도 간질간질 해지는 말이었다.
알렉시스가 대놓고 주는 핀잔에 녀석은 얼굴을 붉히더니 나를 노려보면서 그 자리에서 멀어졌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저렇게 노려봐? 우락부락한 녀석을 내가 한 대 쥐어박을 순 없겠지만, 그것보다 훨씬 강력한 알렉시스라는 존재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나였다.
“어후, 끝인가? 이제 더 이상 귀찮게 안 하겠죠?”
“정말 끝을 내러 가볼래요?”
“음? 어떻게요?”
알렉시스는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며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그녀를 호텔 로비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프란시스의 스피치가 끝나고 다시 로비로 돌아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우리는 그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쳐 요양원 정문으로 향했다.
“도대체 뭔데 그래요?”
“하하, 지금 말해주면 안 되는 거예요.”
도어맨이 다가오는 우리를 보고 아무 말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열리자 찬바람이 확 불어왔다. 밖에는 파티를 축복하듯이 흰 눈송이가 날리고 있었다.
너무 춥진 않을까?
슬쩍 알렉시스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녀는 다행히 여전한 미소와 함께였다.
정문을 나온 우리는 벽을 따라 왼쪽으로 향했다. 어제 그놈과 알렉시스의 대화가 있었던 그 구석으로 가 섰다.
“여기예요.”
“여기가 왜요?”
“위를 봐요.”
알렉시스는 내 말을 따라 고개를 번쩍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그녀의 고운 흰 피부에 눈이 내려앉았다.
“어, 예쁜 게 있네요?”
“맞아요, 하루살이예요. 브라운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식용 트리 장식용 가지 하나를 몰래 받아왔죠.”
나는 위로 손을 뻗어 벽 장식에 어설프게 걸려있던 가지를 잡아 내렸다. 꽃다발을 건네는 것처럼 그녀에게 겨우살이 가지를 내밀었다.
“아름다운 꽃다발은 아니지만… 받아줄래요?”
“겨우살이가 어때서요? 크리스마스에 이만큼 로맨틱한 식물이 있을까요? 5월의 장미도 부럽지 않아요. 그리고 이건 맛있기도 하잖아요.”
“그렇죠, 브라운 슈거 특제 하루살이니까요.”
그녀는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우리는 서로 가까이 다가갔다. 추위에 빨개진 그녀의 얼굴이 사랑스럽다. 드러난 이마, 완벽한 곡선을 가진 그녀의 두 볼이 블러셔를 한 것처럼 붉었다. 그리고 더욱 빨간 두 입술과 그녀의 숨결을 따라 뿜어져 나오는 흰 입김이 대비되었다. 많은 것을 담은 우리의 눈빛 교환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겨우살이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요?”
“물론이죠. 저 이래 봬도 미국에서 자랐잖아요.”
“잘됐네요! 자, 그럼.”
그녀는 말을 마치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로비 창문의 커튼 틈새에서 따뜻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푸른 달빛이 내려와 두 색이 은은히 섞였다. 눈앞에 그 빛을 받은 그녀가 코로 숨을 약하게 쉬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한 발 더 다가가 그녀를 감쌌다. 우리는 겨우살이의 축복을 나누었다. 그것은 부드럽고 촉촉한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