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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심 Aug 08. 2020

나의 어제, 오늘, 내일이 있는 서가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독서모임에서 자신의 서가를 사진으로 찍어 공유한 적이 있다. 각자의 서가에 꽂힌 책들이 달라서 보는 즐거움이 있었고, 그 사람의 취향과 관심사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무수한 책은 내 삶에 녹아있다. 나는 가끔 서가에 꽂혀있는 책들을 본다. 책 제목을 보고 있노라면 책을 읽던 한 사람의 상황, 고민, 결심이 떠오른다. 방황하는 나를 보듬어 주었던 책, 좌절과 포기의 순간에 용기를 주었던 책. 또 어떤 책은 나의 무지함을 일깨워주었다. 내 서가는 나의 어제이고, 오늘이며 내일이다.     


중학생 때 서점은 친구들과 만남의 장소였다. 서점 입구에는 범우사 세계문학 문고판이 진열되어 있었다. 톨스토이의 『부활』을 시작으로 문고판 뒤에 적혀있는 책 목록을 보면서 한 개씩 사서 읽는 취미가 생겼다. 가장 좋아했던 책은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미국 남부 대농장의 딸, 스칼렛 오하라는 예쁘고 당당하다.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고, 그녀는 누구보다 강인하다. 그녀를 사랑한 레트 버틀러는 매력적이고 한동안 소녀 마음을 설레게 했다. 이 책은 문고판이지만 총 5권으로, 분량이 1,000여 페이지가 넘는다. 책을 다 읽었다는 뿌듯함. 더구나 1권은 대부분이 오하라 집안의 역사가 담겨있어 엄청 지루했다. 레트 버틀러가 언제 나오는지 뒤 페이지를 확인하면서 끈기 있게 읽었다. “스칼렛은 자신이 사랑한 사람이 레트였다는 것을 왜 알지 못했을까?”. 그들의 이별이 너무 안타깝다. 책을 덮고 나서도 그 생각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기억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되돌아보면 나의 사춘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친구들과 관계도 소원해지고, 학교 공부도 하기 싫었다. 그냥 외로웠고, 지금 여기 말고 그 어떤 곳을 꿈꾸었다. 방황 속에서 나는 우연히 대하소설의 세계에 빠졌다. 책 속에 담겨있는 내용은 단편·장편 소설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다양한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 각자가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좋았다. 그리고 인생의 전환점을 준 책을 만났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 책은 이념에 대해 ‘좋다’ ‘나쁘다’라는 단순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닌 내 생각을 깨부수었다. 그들이 선택한 사상에 대한 고민과 민중들의 삶 그리고 그 무대가 된 벌교, 남도 사투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태백산맥 10권을 읽는 동안 나는 그 소설 속에서 인물들과 함께 살았고, 하루하루가 기대되었다. 그리고 내 삶도 변화되었다. 반 친구들의 추천으로 교내 1호 독서왕에 뽑혔고, 수능시험의 긴 지문이 어렵지 않게 느껴지면서 성적도 올랐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었고,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했다. 내 인생의 고마운 책, 『태백산맥』을 이따금 다시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때 그 추억이 너무 소중해서 첫 마음 그대로 간직하기로 했다.     


성공한 사람은 자기 월급에 20%를 자기 계발에 쓴다고 한다. 직장 생활하면서 일을 잘하고 싶었고, 그 분야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한동안 경제·경영·자기 계발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자기 계발서를 읽고 있으면 나도 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와 열심히 살고 있다는 자긍심이 생긴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 금세 그 마음이 사라지고, 나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맥켄지(McKinsey)의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다루고 있는 『로지컬 씽킹』이라는 책이 있다. 보고서를 잘 쓰고 싶어서 이 책을 시작으로 관련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아직도 보고서 쓰는 것은 어렵다. 한때 재테크 책에 심취해서 책을 보고 몇 가지 실천해 보고, 돈을 모으는 재미도 느껴 본 적이 있다. 경제·경영 책은 읽으면서도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한 권 한 권 책이 쌓이고 책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경제·경영 책을 읽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다. 누구나 자기 계발서에 빠지는 시기가 있을 듯하다. 여러 책을 읽다 보면 지금 읽은 책과 과거의 읽은 책이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시간을 충실하게 살았고, 이해를 다 못했어도 그 책들은 나의 배경지식이 되었다.


나의 고전 읽기는 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시대적으로 인문고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아득하게 느껴졌다. 고전이 궁금했고,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다. 마침 서울시민대학에 그리스 문학 강좌가 있었다. 대학교 교수님과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매주 한 번 만나 넉 달 동안 함께 읽었다. 일을 마치고 즐기는 그리스 문학은 지루한 일상의 새로운 활력이었다. 교수님이 주요 부분을 읽어주시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강의를 들으면서 잠시나마 학문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영웅 아킬레우스의 모습을 담고 있다면, 『오뒷세이아』는 지혜로운 인간, 오뒷세우스의 이야기이다. 트로이 전쟁은 끝났지만, 신들의 방해로 그의 귀향은 쉽지 않다. 그는 집에 돌아가기 위해 스스로 모험과 고난을 견뎌낸다. 마침내 그는 고향을 떠난 지 20년 만에 돌아갈 수 있었다. 트로이 전쟁 10년을 겪었고, 집에 돌아가는 여정이 10년이 걸렸다. 그 시절 나에게도 힘든 상황이 있었다. 아이를 갖기 위해 병원에 다녔고, 이미 몇 번의 실패가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마치 시시포스가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에 다시 올리는 과정이었고, 나는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한 상태였다. 그날을 기억한다. 결과를 기다리는 1시간 동안 카페에 앉아서, 『오뒷세이아』를 읽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 실패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도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마음속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이 사랑한 오뒷세우스도 고난이 있었다. 신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고난을 주고, 그 고난은 인간을 성숙하게 한다. 의연해지자.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자. 결과는 성공이었다. 지금 나는 아이를 키우며 한층 성숙해지고 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다시 읽었다. 이번에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마스크’이다. 랑베르는 타루에게 마스크가 도움이 되느냐고 묻는다. 타루는 “그렇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준다”라고 대답한다. “말을 할 때마다 가제 마스크가 불룩해지면서 입이 닿은 부분이 축축해졌다. 마치 동상들까지 대화하는 것처럼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내가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책에서 와 닿는 부분이 다를 수 있다는 거에 새삼 놀랐다. 『페스트』에는 여러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그중에서 내가 주목하는 인물은 시청 비정규직 그랑이다. 그는 페스트의 한가운데 서 있는 선의의 인물로 자신의 자리에서 조용한 미덕을 베푼다. 그는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글을 쓴다. 단어 하나하나를 고심해서 몇 문장 나아가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답답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을 잘 표현할 방법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이 순수하게 느껴진다. 읽기가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한다면 쓰기는 새로운 ‘나’로 거듭나게 한다. 최근에 나는 글을 자주 쓰고 계속 고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랑이 그러했듯이 단어 하나하나를 생각하고,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자주 읽고 자주 쓰는 삶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나’다워지는 순수의 길이다.  

   

나는 매일 조금씩 나의 길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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