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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심 Jan 06. 2021

아날로그 감성, 책 언박싱

영화, 84번가의 연인


영화 《만추》의 탕웨이는 참 예뻤다. 트렌치코트가 잘 어울리고, 중저음 목소리와 청아한 얼굴이 좋다. 현빈을 좋아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탕웨이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탕웨이가 출연한 영화를 찾아보다가《시절 인연》을 거쳐서 최근에는 《북 오브 러브》를 봤다. 마카오에 사는 카지노 딜러 지아오(탕웨이 역)와 LA에 사는 부동산 중개인 다니엘(오수파 역)은 편지로 티격태격 싸우다가 서로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결국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소설책《채링크로스 84번지》로 인연이 시작된다. 자신의 주변에서 걸리적거리던 책을 지아오와 다니엘은 엉뚱하게도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며 런던의 채링크로스 84번지 주소로 보낸다. 두 사람의 책이 바뀌어 반송되고 그때부터 편지가 오고 간다.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채링크로스 84번지》는 뉴욕의 가난한 작가 헬렌 헨프와 영국의 중고 서점상인 프랭크 도엘이 20년 동안 책을 매개로 나눈 편지들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을 아끼는 팬들은 또 다른 ‘헬렌과 프랭크’를 꿈꾸며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북 오브 러브》에서도  카페에서 다니엘이 이 책을 들고 있으니, 한 여자가 다가와서 자신도 이 책을 좋아한다며 호감을 표시하는 장면이 있다.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다. 며칠 전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찾아보다가《84번가의 연인》을 발견했다. 짧은 영화 소개지만 단박에 소설《채링크로스 84번지》를 영화화한 작품임을 알았다. 1987년작으로 50대 프랭크에 안소니 홉킨스가 나오고, 그의 부인으로는 007의 M역할로 나온 주디 덴치로 젊은 시절의 두 사람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다.


헬렌은 영문학을 좋아하는데 뉴욕에서는 저렴한 중고책을 구하기 어렵다. 어느 날 토요문평지에서 절판된 책을 취급한다는 서점 광고를 보고, 런던 채링크로스 84번지 마크스 상회에 편지를 보낸다. 책 목록과 함께 그중에서 5달러 이하의 책을 보내달라는 내용이다.


그녀는 어느 날 책꾸러미를 받게 되고 환호한다. 뉴욕에서 페이퍼북만 보다가 양장의 귀한 책을 받아보니 자신의 책장이 너무 초라해서 부끄럽다며 감사의 편지를 보낸다. 이후에도 편지는 뉴욕에서 런던으로 오고 가고, 프랭크는 헬렌이 읽고 싶은 책을 구해서 보내준다. 그녀는 책 목록뿐 아니라 읽은 책 소감도 가감 없이 표현하고, 서점 직원들과도 정을 나눈다. 헬렌이 서점 직원들에게 통조림을 보내주기도 하고, 서점 직원이 요크셔푸딩 레시피를 알려주거나, 예쁘게 수놓은 식탁보를 선물하면서 그들은 책을 매개로 우정을 쌓는다.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책 영화다. 책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내 마음에도 스며든다. 그녀는 가난하지만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기보다는 구매해서 읽는다. 책 여백에 생각을 적어보기도 하고, 초라하지만 푹신한 의자에 앉아 술과 담배와 함께 책을 읽어야 제맛이라고 얘기한다. 중고책의 매력은 누군가 읽었던 책장을 넘기는 기분이라면서 책 여백에 쓰인 글귀들을 좋아한다. 존 던의 책은 크게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며 거실을 거닐며 소리 내어 읽는다. 영국 문학을 좋아한 그녀는 영국의 거리를 걷고 싶어 한다. 또한 언박싱의 재미를 제대로 보여준다. 우편물의 봉투를 열어서 어떤 책인지 기대를 한다. 포장지를 조심히 풀고, 표지부터 조심스럽게 펼친다. 헬렌은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지금은 책을 기다리지 않고 언제든지 바로 읽을 수 있는 시대이다. 하지만 나는 한 달에 한번 우편함을 열어본다. 작년부터 월간 문예지를 구독하고 있다. 우편봉투를 열어 책을 꺼낸다. 책을 펼치면 인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종이에 온기가 남아 있다. 잉크 냄새도 난다. 갓 구운 빵을 받은 기분이다.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 상단 이미지: 《84번가의 연인》의 장면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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