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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심 Jan 11. 2021

나는 첫 줄을 기다린다

글이 써지지 않는 날

겨울 저녁은 누군가를 기다리기 좋은 계절이다. 밖에 나가서 이리저리 걸어본다.  그는 내게 무엇인가.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인지. 기다리면 오긴 하는 것인지. 혹시 내게 왔는데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차가운 공기에 머리가 맑아진다. 처연한 마음으로 시작해서 걷다 보니 초연한 마음이 생긴다. 내 기다림 끝에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나도 시인이나 되었으면."
"제가 시인이면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할 수 있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대?"
"바로 그게 문제라니까요. 시인이 아니라서 그것조차 말할 수 없는걸요." (...)
"시인이 되고 싶으면 걸으면서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난 첫 줄을 기다린다. 뭘 해도 글이 써지지 않는 날이다. 그래서 무작정 걸어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기다림이다.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기분이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것들이 있다.


영화《시네마 천국》에서 나오는 알프레도가 토토에게 들려준 공주와 병사 이야기. 공주는 병사에게 100일 밤낮을 발코니 밑에서 기다려준다면 그의 사랑을 받아주겠다고 한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기다렸고 눈이 와도 기다렸다. 공주는 그를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99일이 되는 날 병사는 자리에 일어나 가버렸다. 남은 하루는 그에게 기다림의 긍정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롤랑 바르트의《사랑의 단상》에 보면, 긍정(AFFIRMATION)은 "모든 것을 향해 모든 것에 맞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가치로 긍정한다." 사랑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 사람을 만났을 때 느끼는 즉각적인 긍정 하지만 그 뒤를 잇는 긴 터널. 첫 번째 긍정이 의혹으로 찢기고, 사랑의 가치가 끊임없이 평가절하될 위험에 처한다. 하지만 이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사랑의 긍정은 지나간 일을 추억하고 반복하는 긍정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긍정하는 일이다. "긍정 자체를 긍정하는 일"이다.


롤랑 바르트의《사랑의 단상》은 사랑을 하는 사람의 머릿속에 스쳐갔던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그의 담론에는  우연하고도 하찮은 기회에 그에게 다가오는 언어의 번득임으로 존재한다. 며칠 동안 읽었는데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늘 걷다 보니 조금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느껴진다.


뭘 쓸까 고민으로 시작된 걷기에서 잠시나마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도 느껴보고, 몇 가지 아이디어도 생각이 났고, 내 마음도 토닥토닥해 준 시간이었다.


오늘도 그 어려운 걸 해냅니다.

잘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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