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2000만 원 만으로 다시 살아난 박노은 호접란 명인
"Ladies and gentlemen, we have technology"("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에겐 기술이 있습니다")
1970,80년 대에 방영돼 큰 인기를 끌었던 '600만불의 사나이' 초반 에피소드에 나왔던 대사다. 공군 조종사이던 주인공 스티브 오스틴은 비행기 사고를 겪으며 온몸이 망신창이가 되면서 의식 불명의 상태에 빠진다. 주인공을 구해낸 건 어느 공학자였다. 스티브의 생사를 걱정하던 이들에게 이 공학자는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에겐 기술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던지고 수술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스티브는 신체의 대부분을 첨단 기계로 대체한 사이보그가 되어 돌아온 뒤 초인적인 힘을 바탕으로 각종 활약을 펼친다.
대한민국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에 사는 호접란(서양란으로도 불리는 난초. 꽃잎이 나비를 닮았다) 명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70년대 미국 드라마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드라마 속 공학자의 대사가 한때 자신이 일궈온 모든 걸 잃었지만 기술력 하나만으로 재기할 수 있었던 박노은 상미원 대표(70)의 인생을 요약해해 주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신만의 독보적인 기술이 있다면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기술력에 대한 투자가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서도.
지난 18일 태안군에 내려가 박노은 명인을 만나고 왔다. 1979년부터 화훼농사를 지어온 그는 1986년부터 지금까지 30년간 호접란을 키워오고 있다. 호접란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게 1980년대 중반 즈음이니 당시로선 낯선 신생 식물을 선택한 것이다. "육종이 잘 돼 얼마든지 새로운 품종을 키워낼 수 있는 호접란의 매력에 빠졌다"고 박 대표는 설명했다. 박 대표는 2014년 농촌진흥청이 선정하는 대한민국 최고농업기술명인 화훼분야 명인으로 뽑힌 국내 호접란 재배의 일인자다. 노무현 정부 당시 받았던 대통령 포장을 비롯해 그동안 화훼 재배 기술을 발전시킨 공으로 여러 상을 받았다.
올해 일흔 살이 된 박 대표는 최근 몇 년 동안 아프리카 잠비아, 러시아, 베트남을 방문해 현지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자신의 기술을 나누고 있다. 자비를 들여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는 "외국의 가난한 농부들에게 내 기술을 가르쳐주면 그 사람들이 힘들게 살지 않고 잘 살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시간 반을 훌쩍 넘긴 인터뷰 동안 참 많은 걸 배웠다. 네이버FARM판에 와서 많은 농민을 만났지만 박 대표처럼 큰 감동을 준 분은 없었다. 박 대표의 살아온 인생과 외국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자신의 기술과 노하우를 전파하려는 열정에 대해선 네이버FARM판에 실은 인터뷰에 충실히 다뤘다.
오늘은 박 대표가 겪었던 좌절의 순간과 실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그의 기술력에 대해 집중해보자.
2004년 박 대표는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잃었다. 1988년 태안에 내려왔을 때부터 일궈온 화훼 온실을 비롯해 농장과 집까지 전재산을 모두 압류당했다. 박 대표가 전재산을 잃고 빚더미에 앉은 건 원예 영농조합사업이 실패해서다. 그는 2000년대 초반 다른 농민들과 함께 영농조합법인을 만들고 대표가 됐다. 1만 2800평 대지에 유리온실만 6000평 넓이인 대규모 원예농장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 "목표대로 됐으면 국내 최대 규모의 원예농장이 됐을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18년간 농사만 지어오던 그가 대규모 사업에 뛰어든 건 중간 유통상인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호접란 화분 하나를 키우는 데 들이는 시간은 4년이다. 2년 반 가량의 조직배양 과정과 호접란이 꽃을 피우도록 키우는 데 걸리는 1년 반 가량의 기간을 합치면 호접란 화분 하나를 내놓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다. 4년 동안 호접란을 키워 시장에 내놓지만 화훼 도매시장 경매인들이 매기는 가격은 그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수준이었다. 경매가가 예상보다 적게 나왔을 때는 당장 적자 걱정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화훼농가가 경매인들에게 싼값에 넘긴 호접란이 소비자들에게 팔리 땐 가격이 몇 배나 뛴다. 박 대표는 수년간 호접란을 키워온 자신은 매번 손해 볼 걱정을 해야 하는 데 중간 유통상인들은 호접란을 팔아 큰 이익을 챙기는 건 결국 농민에게 소비자와 직접 만날 통로가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다른 화훼농가들과 힘을 합쳐 대규모 온실을 지어 대량 생산을 하면 마트와 꽃가게에 직접 판매할 수도 있고 중간 유통상인과의 협상에서도 가격 협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업은 실패했다. 박 대표는 실패의 원인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의 말을 비추어 동업자들과의 마찰이 큰 원인 중 하나였음을 짐작해볼 뿐이다. 사업이 실패로 끝나면서 법인의 대표였던 그는 빚더미에 앉았다. 농장과 집을 포함해 모든 재산이 넘어갔다.
전재산을 잃은 박 대표는 어떻게 재기할 수 있었을까? 농장이 다른 이에게 넘어가던 날 박 대표는 자신의 농장을 사가는 농민에게 물었다. "농장 한 편에 있는 조직배양실을 쓰지 않을 거면 그것만 자신에게 되팔 수 있느냐?"고. 조직배양 기술이 없었던 새로운 주인에겐 조직배양실이 별 쓸모가 없었다. 박 대표는 직장생활을 하던 아들에게 2000만 원을 빌려 새로운 주인에게 건네고 조직배양실을 되찾았다.
이쯤 해서 호접란 재배에 쓰이는 조직배양 기술에 대해 잠깐 설명하겠다. 육종을 통해 새로운 품종의 호접란을 개발하더라도 새 품종에서 거둔 씨앗을 그대로 사용할 순 없다. 씨앗을 심어 키우면 씨앗마다 조금씩 색상과 모습, 크기가 다른 꽃이 나오기 때문이다. 똑같은 부모 밑에서도 서로 다른 자식이 나오는 것과 같다. 동일한 특성의 꽃을 재배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기술이 조직배양 기술이다. 호접란의 세포를 떼어 유리병 안에서 키워내면 동일한 품종의 꽃이 나온다. 생명공학 기술을 이용해 겉모습이 똑같은 동물을 복제해내는 것과 비슷하다.
온실을 잃었기에 직접 호접란을 키워 시장에 내놓을 수 없었던 박 대표는 조직배양에만 집중한다. 조직배양을 마친 호접란 묘를 외국과 국내 화훼농가에 납품했다. 박 대표는 "농장을 잃고 나선 미친 듯이 호접란 묘를 생산했다"며 "그때는 특히 미국에만 한 해에 50만~60만 본의 호접란 묘를 수출했다"고 회상했다. 다시 농장을 꾸리기 위해 호접란 묘 생산에 전념했다. 그 결과 다시 온실 600평, 조직배양실 100평, 순화실(옮겨 심을 묘목을 자연광에 적응시키는 공간) 100평 규모로 농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지금도 상미원에선 한 해에 10만 본 가량의 호접란 묘를 국내 농가에 판매한다. 국내에 호접란 조직배양 기술을 갖춘 농가는 몇 곳 되지 않는다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B2B 방식으로 호접란 묘를 다른 농가들에게 판매하기 때문에 화훼시장에서 낙찰되는 경매가에 따라 수입이 크게 달라지는 일반적인 화훼농가들보단 안정적인 수익구조를 갖췄다.
박 대표는 그동안 소비자와의 직거래망을 갖추기 위한 시도를 계속해서 해왔다. 일반 소비자들이 좀 더 쉽게 호접란을 일상에서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호접란 크기를 3분의 1~절반 크기로 줄인 꼬마란을 개발하기도 했다. 크기가 작아지면 사람들이 호접란을 회사 사무실 책상이나 식탁 테이블에 올려놓기도 편해지고 결국 소비도 늘어날 거란 생각에서다. 꼬마란이란 이름으로 상표를 등록하고 마트 납품과 직거래 택배 등을 통해 판매에 나섰다.
박 대표가 소비자와의 직거래를 시도하면서 겪게 된 어려움은 컸다. 박 대표는 "내가 자꾸만 경매 외에 다른 방식으로 소비자들에게 직거래를 하려 하자 경매인들에게 밉보이게 됐다. 상미원에서 나온 호접란이라고 하면 품질과는 상관없이 경매인들이 낮은 가격을 매겨서 한동안 계속해서 적자를 보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몇 년 전부터 농장은 아들 박진규 씨(40)가 맡아서 운영하고 있다. 진규 씨는 학부에선 유전공학을 배우고 대학원에선 원예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으며 농장을 이어받을 준비를 해왔다. 진규 씨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소비자와 직접 만날 수 있는 직거래망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홈페이지를 통해 호접란을 택배로 판매하고 있으며 레스토랑과 카페 등을 상대로 정기 꽃배달 서비스를 하고 있다.
홍선표 한국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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