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베테랑 기자는 왜 갑자기 소백산 산기슭로 훌훌 떠났을까.
협객(俠客). 이제는 듣기 힘든 단어. 낄 협(夾) 자에 사람 인(人) 자를 더했다. 약한 사람을 끼고도는 의협심 강한 인물을 칭하는 말이다. 중국 서한 시대의 역사가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는 유협열전(遊俠列傳)이란 제목으로 당대 협객들의 활약을 전하고 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칼 한자루 맨 채 천하를 주유하다 불의를 보면 과감히 칼을 뽑아 들었던 사람들. 백성을 감시하고 통제해 체제를 유지하는 게 최우선 과제였던 과거 국가 공권력들로선 딱히 반가울 게 없는 유형의 인물들이다.
처음 기자가 되기로 결심한 건 기자야말로 이 시대의 얼마 남지 않은 협객의 야성을 간직한 직업이란 생각에서였다. 입사 자기소개서에도 그렇게 써냈다. 오늘로 기자 생활을 시작한 지 4년 8개월 하고도 3일이 지났다. 잘 하고 있는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열심히 하려곤 한다.
협객 이야기로 글을 시작했다. 오늘 소개할 김판수님이 이 시대 몇 남지 않은 협객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지난 3월 초. 기사가 나온 뒤에도 세네 차례 더 만나 동태탕에 소주를 나눴다. 사실 판수 형님과 나는 생각이 다른 점이 많다. 판수 형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때론 토종 식물에 대한 애정이 지나치게 과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육종과 유전공학 등 일체의 식물 개량을 용납하지 않으려 하는 말을 들으면 답답한 느낌이 들 때도 많다.
그래도 판수 형님과 술 한잔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하면 즐겁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많은 걸 버리고 소백산 산기슭에 들어가 수 만 그루의 정향나무를 기르는 그의 모습을 보면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생각의 차이보다 더 중요한 건 삶에 대한 태도인 거 같다. 나는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려는 사람이 좋다.
판수 형님은 1991년부터 2007년까지 경향신문에서 기자로 일했다. 내가 일하는 네이버FARM판 대표님과 같은 해에 언론사에 입사했다. 지금까지 회사에 있었다면 부국장~국장급으로 일할 연배다.
그는 1996년 한 해에만 한국기자협회가 주관하는 '이달의 기자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는 등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이달의 기자상'을 받은 베테랑 기자다. 동시에 시인 신동문 평전을 비롯한 세 권의 책도 써낸 작가다.
지금은 소백산 자락에 자리 잡은 충북 단양군 금곡리 산기슭에서 3만 여 그루가 넘는 나무를 키운다. 멸종위기에 처한 정향나무 2만 6000여 그루와 꽃개회나무, 섬개회나무 등 다른 토종 라일락 6종, 4000여 그루가 그의 농장에서 자란다.
해발 1300m 이상에서 주로 서식하는 정향나무 등 토종 라일락을 해발 200m 높이 남짓의 야트막한 산기슭에서 대량으로 재배하는 데 성공해 토종 라일락을 멸종 위기에서 구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왜 2007년 회사를 그만둔 뒤 퇴직금을 털어 아무런 연고도 없던 소백산 산기슭에 2000평 넓이의 농장을 꾸린 걸까?
그는 자신에 대해 '역마살이 낀 인생'이라고 말한다. 2007년 무렵 그는 신문사에서 부장 진급을 앞두고 있었다. 신문사에선 부장이 되면 데스크라고 해서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에 머물며 어떤 기사를 신문 지면에 앉힐지 결정하는 회의에 참가하고, 후배 기자들이 써서 보낸 기자를 고쳐야 한다. 판수 형님은 "내가 원래 역마살이 낀 놈이라서 20대부터 낚시한다고 전국을 돌아다니고 한 군데에서만 못 사는 체질이야. 평기자 때야 취재한다고 여기저기 쏘다니니까 괜찮지만 부장이 된 다음부턴 책상에만 앉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못 견디겠더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소백산 기슭에 내려와 정향나무를 심겠단 생각을 한 걸까? 그는 기자 시절 환경 담당 기자로 꽤 오랫동안 일했다. 1990년대만 해도 오늘날과 같이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지 못했을 때다. 취재를 하며 멸종했거나 사라져 가고 있는 한국 식물들에 대해 알게 됐다. 언젠가는 그런 식물들을 지켜내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정향나무는 사연이 기구하다. 원산지인 한국에선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돼 있다. 하지만 정향나무 종자를 가져다가 미국에서 개량한 '미스킴 라일락'은 전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 관상수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미스킴 라일락'은 국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47년 미국인 식물학자가 서울 북한산에서 자라던 정향나무 종자를 가져다가 키가 작아지도록 품종을 개량한 게 '미스킴 라일락'이다. 정향나무는 다 자라면 키가 2m가 넘지만 '미스킴 라일락'은 다 자라도 높이가 1m를 넘지 않는다. 원예 식물로 키우기 위해선 화분에서 재배할 수 있을 정도로만 자라야 하기 때문이다.
판수 형님은 1990년대 중반 정향나무에 얽힌 사연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원종인 한국 정향나무는 멸종위기에 처했는데 정향나무를 개량한 미스킴 라일락은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갔다는 사실에 화가 나고 안타까웠다.
그러던 중 환경 기자로서 취재차 방문했던 어느 높은 산에서 정향나무 군락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구한 정향나무 씨앗을 평소 자주 다니던 충북 제천 낚시터 인근에 뿌려놓은 게 정향나무 재배의 시작이었다. 원래 높은 산지에서만 자라는 특성 탓에 싹이 난 씨앗은 몇 개 안됐지만 일단 자라기 시작한 묘목은 생각보다 잘 자라줬다. 지금 그의 농장에서 자라는 수 만 그루가 넘는 정향나무는 모두 그때 싹을 틔운 씨앗에서부터 퍼져 나왔다.
"홍 기자, 원래 정향나무는 높은 산에서만 자라는 아고산식물이야. 그 씨앗을 받아다가 이런 평지에 심으면 열 놈 중에 한놈도 씨가 안나. 그래도 이십 년 동안 옮겨 심었더니 이젠 발아율을 삼, 사십 퍼센트까지 끌어올렸어. 근데 이거 정부가 특허내서 가져가겠다면 그냥 줄 거야. 대신 누구든 이 씨앗을 갖다가 자유롭게 쓸 수만 있게 해주면 돼. 나한테 아무것도 주지 말라고 그래. 그냥 정향나무가 많이 퍼지기만 하면 돼. 다 자연에서 난 종자인데 특허내서 누군 쓰고 누군 못쓰게 하는 게 나는 이해가 안 돼"
둘이 만나 술이 거나하게 취할 때면 판수 형님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홍 기자는 나중에 정향나무, 토종 라일락을 알린 기자로 기억될 거야. 정향나무를 키운 건 김판수지만 세상에 알린 건 홍선표야"
내가 일하는 네이버FARM판에 정향나무가 소개된 덕분에 정향나무를 키워보고 싶단 사람과 단체들이 늘어났다는 말이다. 과분한 말이다. 기자의 역할은 세상에 알려야 할 일들을 알릴 뿐. 모든 건 10년째 소백산에 틀업박혀 가뭄, 폭우와 싸우며 정향나무 묘목을 지켜낸 판수 형님 덕분이다. 기자는 그저 기록할 뿐이니까.
홍선표 한국경제신문 기자
rickeyg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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