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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선표 Jan 02. 2020

메르켈, 35세 물리학자가 권력을 장악한 3단계 전략

  동독 출신 여성 과학자를  통일 독일의 15년 집권 총리로 만든 비결

메르켈. 평소 국제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으신 분들이더라도 어디선가 몇 번은 들어보셨을 그리 낯설지 않은 이름인데요. 2005년 독일 총리 자리에 오른 그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독일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2020년 1월 1일 기준 그는 독일 역사상 두 번째로 오래 자리를 지킨 총리입니다. 그의 정치적 아버지로 불리는 헬무트 콜 총리에 이어 역대 두 번째 장수 총리이죠.


  2005년부터 2020년까지 한국에는 모두 네 명의 대통령이 있었는데요. 이처럼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계속해서 독일이라는 강대국을 이끌어온 인물이기 때문에 메르켈이란 이름은 많은 분들에게 익숙하게 느껴집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더라도 말이죠. 그의 이름이 앙겔라이고 그가 35살이 될 때까지 공산주의 독재 국가인 동독에서 살았었고,


그가 원래는 <양자 화학의 분석적 방법에 기반한 속도상수 계산과 단수 결합 파열의 방사성 붕괴 반응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물리학자, 과학자라는 사실은 잘 모르시더라도 말입니다.


  오늘날에는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독일 뿐 아니라 유럽연합(EU)을 이끌면서 ‘유럽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그가 처음에는 그저 구색 맞추기용으로 임명된 장관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시절의 앙겔라 메르켈


  이번 글에서는 내성적이고 수줍은 많은 35살의 과학자 메르켈이 독일 통일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 어떻게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갔고, 어떻게 동독 출신 여성이라는 약점을 이겨내며 권력을 장악 해나갔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실험실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던 30대 중반의 물리학 박사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역사상, 아니 유럽연합 역사상 가장 강력한 리더가 될 수 있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독자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가 권력을 틀어쥐는 과정을 3단계로 나눠서 살펴봤는데요. 각 단계에서 활용했던 전략들을 쉽게 설명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애송이일 때는 먼저 거물에게 다가가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라.


  둘째, 사람들의 비웃음은 신경 쓰지 말아라. 조용히 힘을 키우며 성과로 자신을 증명하라.


  셋째, 게임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자만이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기습적으로 치고 나가라.



메르켈, 타고난 마키아벨리스트


  많은 분들이 메르켈이라고 하면 2015년에 시작된 유럽 난민 위기 당시 100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이는 대담한 결정을 내린 진보적 정치인이자 트럼프, 시진핑, 푸틴 같은 다른 강대국들의 거친 남성 지도자들과는 달리 부드럽고, 친화력 좋으며, 순박한 이미지의 정치인을 떠올리시는데요.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들은 물론 독일 사회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타고난 마키아벨리스트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군주론>의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말했듯 권력을 손에 넣고 유지하기 위해서 비정하고 냉혹한 결정을 내리고, 온갖 책략을 사용하는 걸 망설이지 않는 인물이란 뜻이죠.


그렇지 않았다면 칼부림과 배신이 일상인 정치 세계에서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 순 없었겠죠.


  이번 글에서는 그가 처음 정치권에 발을 들인 1989년 동독 붕괴 무렵부터 시작해 총리직의 발판이 되는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의 당수 자리에 오르는 2000년까지의 기간 동안에 초점을 맞춰보겠습니다. 누구도 그 이름을 모르던 무명의 과학자가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해가며 권력을 장악해나갔던 11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3단계 전략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 먼저 그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 어떻게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그리고 성인이 돼서 과학자로 일했던 35세 무렵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청소년기 시절의 메르켈 (왼쪽)


공산주의 국가에서 목사의 딸로 보낸 35년의 삶 


메르켈이 오늘날 서구권의 지도자, 자유진영의 지도자들과 가장 구분되는 특징은 인생의 절반을 공산주의 독재체제 아래서 보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메르켈이 태어난 곳은 동독이 아닌 서독의 함부르크였습니다. 원래대로라면 공산주의 독재국가인 동독이 아니라 서독에서 자랄 수 있었는데요.


  하지만 개신교의 일파인 루터교 목사이자 원래 동독 출신이던 그의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가 동독에서의 선교 활동을 위해 동독행을 택하면서 메르켈은 태어난 지 8주 만에 요람에 담겨 공산주의 독일로 떠나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원래 공산주의 국가는 종교의 자유는 물론, 종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데요. 하지만 150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독교 문화가 이어져 내려온 유럽에서는 아무리 공산당이 철권통치를 한다고 해도 기독교 자체를 금지시킬 순 없었습니다. 동독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메르켈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그렇기 때문에 메르켈의 아버지 같은 개신교 목사들도 형식적으로나마 교회를 열고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교리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에겐 언제나 동독 비밀경찰인 슈타지의 집요한 감시가 따라붙었죠. 메르켈의 아버지 역시 그의 사소한 행동과 가벼운 대화까지 슈타지에 의해 일일이 감시당하는 건 마찬가지였고요.


  이처럼 메르켈은 어린 시절을 공산주의 국가에서 불온한 사상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는 기독교 목사의 딸로서 보내게 되는데요. 청소년기 시절의 메르켈은 수학과 러시아어 성적이 매우 뛰어난 학생이었습니다.


특히 러시아어는 전국 러시아어 올림피아드에 출전해 금메달을 받았을 정도였습니다. 덕분에 당시 소련의 모스크바에도 견학을 갈 수 있었죠.


  이 같은 뛰어난 러시아어 능력은 이후 메르켈이 동독이 붕괴되고 통일을 앞뒀던 혼란스러운 시기에 자신의 가치를 크게 높일 수 있는 발판이 됐죠.



  우수한 성적의 모범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메르켈은 이후 동독 남부의 대도시 라이프치히에 있는 카를마르크스대학에 가서 물리학을 전공하게 됩니다. 메르켈은 훗날 “내가 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이유는 동독 체제가 기본적인 연산 규칙과 물리학 법칙은 억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공산당과 공산주의가 사상과 학문을 통제하는 독재사회에서 자연과학이야말로 그러한 억압으로부터 그나마 자유로운 안식처였다는 설명인데요.


  그녀는 1978년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동독 과학학술원의 연구원으로 채용됩니다. 이때 메르켈의 나이는 24세였는데요. 이후 1989년 동독이 무너질 때까지 그는 과학자로서 살아갑니다.


대학 시절에 만났던 첫 남편과 이혼을 하고 1986년에는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는 등 개인적으로는 여러 일들이 있었던 시기이지만 이후 통일 독일의 최고 지도자가 될 인물 치고는 조용하게 보냈던 젊은 시절이죠.


  그리고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걸 계기로 서독과 동독, 두 개의 동독이 통일의 급물살 위에 올라타게 되면서부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정치인 메르켈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는데요.


트럼프 미국 대통령(좌)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우) 사이에 앉은 메르켈


정치 입문 1년 만에 통일 독일의 장관이 되다


  그럼 지금부터 메르켈이 권력을 장악한 첫 번째 전략인 ‘애송이일 때는 먼저 거물에게 다가가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라’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면서 동독에선 수십 년 만에 진정한 의미의 선거가 치러지게 됩니다. 서독과의 통일을 위해선 동독에서도 국민들의 자유로운 투표에 따라 선출된 정부가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죠. 이에 따라 여러 신생 정당들이 새롭게 창당됐는데요. 메르켈은 이런 정당들 중 하나인 민주개혁에 입당함으로써 정치 경력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민주개혁은 몇 달 뒤 치러진 동독 국회의원 선거에서 겨우 0.92%라는 보잘것없는 득표율을 기록하며 처참하게 패배하고 마는데요.


  하지만 메르켈은 이 신생정당에 입당한 지 불과 1년도 안돼서 통일 독일의 장관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자기가 몸담았던 당이 동독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1%의 지지도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독과 동독이 합쳐진 통일 독일의 내각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자신의 당이 선거에서 참패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선거일 저녁, 메르켈은 결과를 접하자마자 40.8%의 지지율로 선거의 승자가 된 동독 기독교민주연합의 승리 축하 파티가 열리고 있던 레스토랑으로 향합니다.


  동독 기민련의 승리를 만들어낸 인물이자 통일이 되기 전까지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동독을 이끌어갈 로타어 데메지에르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읽고 계신 메르켈을 비롯해 손정의, 빌 게이츠, 윈스턴 처칠, 레이 달리오, 필립 피셔, 사카모토 료마 등 탁월한 기업인들과 위대한 리더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낸 그들만의 전략과 노하우를 분석한 <내게 유리한 판을 만들라>를 만나보세요)

(예스24)


젊은 시절의 메르켈과 그의 정치적 아버지로 불리는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


  ‘승자를 만나야만 기회가 생긴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초대장도 없었던 메르켈은 파티장에 들어가지 못한 채 쓸쓸히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요.

  

  하지만 곧 놀라운 일이 찾아옵니다. 자신이 그토록 만나고 깊었던 데메지에르가 신임 총리의 취임 인사를 겸해 민주개혁 당원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 찾아온 것이죠. 그리고 메르켈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가 자신에 대해 소개합니다.


  이런 식으로 신임 총리는 물론 그와 함께 찾아온 동독 기민련 지도부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선거 당일뿐 아니라 그 이전에도 메르켈은 자신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을만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는데 적극적이었는데요. 동독에서 치러질 선거를 돕기 위해 서독 개발부에서 파견 나와 있던 보좌관 한 명도 메르켈과 만난 뒤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동독의 신임 총리인 데메지에르 그리고 당 지도부 인사들, 서독에서 온 보좌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메르켈이 새로운 정부에서 괜찮은 역할을 할 수 있을만한 유능한 인재라는데 동의했습니다.


  덕분에 메르켈은 새로운 동독 정부의 부대변인으로 임명될 수 있었습니다. 신생 정당의 당원으로 입당한 지 몇 달 만에 정부 부대변인이 된 것이니 초고속 승진이었죠.


메르켈에 대한 평전

    

  그리고 메르켈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절대 놓치는 인물이 아니었는데요. 독일 통일 과정을 취재하기 위해 독일 전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찾아온 기자들을 상대하며 부대변인의 일을 착실하게 해 나가는 동시에 통일을 위한 다른 강대국들과의 협상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합니다.


  서독과 독일의 통일은 그저 두 나라의 의지만으로 이뤄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자 독일을 둘로 나눠놓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이 네 강대국들의 협조 혹은 허락 없이는 통일이 이뤄질 수 없었죠. 그렇기 때문에 통일 과정에 대해 논의하는 회담은 2(서독, 동독) + 4(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사실상 소련에게 지배받았던 동독이었던 만큼 특히 소련과의 협상 결과가 중요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동독 총리는 모스크바로 날아가 소련 공산당 간부들과 협상을 벌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동독의 총리인 데메지에르의 러시아어 실력은 협상 테이블에서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옆에 있으면서 복잡하고 민감한 내용을 정확하게 통역해줄 인물이 필요했었는데요. 그 역할을 했던 게 바로 메르켈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메르켈은 전국 러시아어 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땄을 정도로 러시아어를 자유롭게 말했는데요. 영어 실력도 러시아어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외국어 실력은 강대국들과의 통일 협상 과정에서 빛을 나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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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식 직위는 정부 부대변인이었지만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과학자로서의 냉철한 분석능력을 바탕으로 총리를 바로 옆에서 도우며 주변 강대국들과의 협상에도 깊숙이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메르켈의 활약은 당시 동독 지도부는 물론 서독 정부의 고위급 인물들에게도 큰 인상을 남겼죠. 메르켈이 독일이 통일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위로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고요.


구색맞추기용으로 임면된 최연소 장관


  지금부터는 메르켈의 두 번째 전략인 ‘사람들의 비웃음은 신경 쓰지 말아라. 조용히 힘을 키우며 성과로 자신을 증명하라’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통일을 이뤄냈고요. 메르켈은 곧바로 통일 독일의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임명됩니다. 36살의 나이에 임명된 역대 최연소 장관이었습니다.


  메르켈이 장관에 임명된 데는 지금껏 설명드렸던 뛰어난 능력과 인맥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장관 자리는 그저 능력과 인맥만으로 임명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는데요.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 따라 정부가 구성되고 의원들이 장관을 맡아 책임지고 행정을 이끌어나가는 의원내각제 국가인 독일에서 장관에 임명됐다는 건 앞으로 국가를 이끌어나갈 지도자 후보군에 들어갔다는 걸 의미하는 데요. 하지만 메르켈은 장관에 임명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실 메르켈의 장관 임명은 능력에 대한 고려보다는 구색을 맞추는 성격이 강한 결정이었습니다. 30대 중반의 젊은 여성이자 동독 출신인 메르켈을 장관 자리에 앉힌다면 정부의 내각의 다양성을 뽐내고, 동서독의 화합된 모습을 보여주는 데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젊은 시절의 메르켈과 그의 정치적 아버지로 불리는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


  실제로 당시 헬무트 콜 총리는 기존에 있던 정부부처를 여러 개로 쪼갠 뒤 그 자리에 여성 장관들을 임명했습니다. 나이 든 남성들만의 보수적인 내각이라는 비판을 비하기 위한 방법이었죠. 메르켈 또한 ‘구색 맞추기’, ‘보여주기’를 위해 장관으로 임명된 게 사실이고요.


  정치권과 언론도 이 같은 사실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관에 임명되긴 했어도 메르켈이 앞으로 그가 몸담은 기독교민주연합, 더 나아가 독일 정치권에서 큰 역할을 해내는 거물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메르켈은 훗날 이 같은 상황을 떠올리며 “사람들은 나라는 사람을 ‘구색 맞추기’라고 이미 멋대로 단정 지었더군요. 굉장히 화가 났죠”라고 회상합니다.


  그리고 남들이 자신에 대해 뭐라 말하던 신경 쓰지 않고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들을 하나씩 완수해나갑니다. 그가 처음 장관 자리에 앉자마자 한 일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능력 있는 인물로 보좌진을 꾸리는 일이었습니다. 조직 안에 자신의 지지 세력을 갖춘 뒤에는 민감한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나갑니다.

  

  대표적인 게 낙태법을 둘러싼 논쟁이었죠. 진보 세력과 보수 세력 사이에 의견이 첨예하게 갈린 문제인 데다 종교계 역시 낙태 관련 규제를 완화하는데 결사반대하고 있었기에 누구도 쉽게 해결하기 힘든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를 잘못 다뤘다간 메르켈 자신의 정치 생명이 끝장날 수도 있었죠.

  


  하지만 메르켈은 찬성과 반대, 양측을 계속해서 오가면서 타협안을 이끌어냈고 결국 이 문제를 매끄럽게 해결하는 데 성공합니다. 30대 젊은 장관이 거둔 정치적 승리였는데요.


  그리고 이렇게 5년 6개월 동안 장관으로 일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하나하나씩 처리해나간 덕분에 정치인으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다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기회가 찾아오면 무자비하게 행동하라


  그리고 이렇게 꾸준히 힘을 키워나간 메르켈은 마침내 세 번째 전략인 ‘게임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자만이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기습적으로 치고 나가라’라는 전략을 실행에 옮깁니다. 정치에 입문한 지 10년이 지난 1999년 메르켈은 기민련의 사무총장을 맡으며 중견 정치인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를 기민련의 차기 지도자감으로 여기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보다는 꼼꼼한 실무 책임자라는 게 메르켈이 갖고 있던 이미지였는데요.


  한 단계 더 성장해 정치적 체급을 키우기 위해선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메르켈은 여기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정치적 승부수를 던집니다.


  자신을 정치의 길로 이끌어준 ‘정치적 아버지’ 헬무트 콜과 콜의 후계자로서 기민련의 당수를 맡고 있던 볼프강 쇼이블레의 등 뒤로 돌아가 무자비하게 비수를 찔러 넣은 건데요.


  1999년 12월 전직 총리이던 헬무트 콜은 캐나다의 무기상이자 로비스트로부터 100만 마르크에 달하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스캔들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뇌물 스캔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콜이 이끌던 기민련이 불법 정치자금을 관리하기 위해서 비밀계좌까지 만들었다는 사실도 드러났고요.        



  이에 따라 독일 통일을 이뤄낸 전직 총리인 헬무트 콜과 기민련의 지지율은 급락했죠. 그리고 이렇듯 자신의 정치적 아버지가 위기에 빠져있던 1999년 12월 메르켈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기자 카를 펠트마이어에게 전화를 겁니다.


  보통 때라면 당의 사무총장으로서 당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을 텐데요. 하지만 이때는 달랐습니다. 메르켈은 기자에게 정치권의 불법 정치자금에 관련된 인터뷰에 관심이 있냐고 물으며 미리 써놓은 자신의 칼럼을 보냅니다.


  칼럼의 제목은 거침없이 단도직입적이었습니다. ‘콜은 당에 피해를 입혔다’가 제목인 1017 글자의 이 칼럼은 헬무트 콜은 변명할 수 없는 큰 잘못을 했으며 기민련은 콜을 당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정치적 발판을 마련해줬던 콜이었지만 더 이상 당에서 그를 받아주고, 변호해줄 수 없다는 걸 분명히 한 것이죠.


  그리고 이 칼럼은 헬무트 콜뿐 아니라 그의 후계자인 당시 기민련 당수 쇼이블레 역시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칼럼으로 당의 장애물이 돼버린 전직 총리와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를 한 번에 제거할 수 있었던 건데요.

  

  칼럼이 게재된 이후 쇼이블레 역시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에 연루됐다는 사실이 추가적으로 밝혀졌고, 결국 쇼이블레는 2000년 2월에 당수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두 달 뒤인 2000년 4월 열린 전당대회에 치러진 선거에서 메르켈은 선거단인단 95%의 지지를 받으며 기민련 당수로 선출됩니다. 기민련 당수를 맡고 5년이 지난 2005년엔 비로소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요.


  공산주의 독재체제에서 35년을 자랐던 물리학자가 정치에 발을 디딘 지 불과 16년 만에 민주주의 국가의 리더로 일어서는 순간이었습니다.

  

  “게임의 법칙을 고수하지 않는 사람만이 승리한다”는 자신의 말처럼 정치권에 입문한 이후 다른 이들의 예상을 깨는 전략과 행동으로 하나씩 목표를 이뤄온 것이 메르켈이 오늘날 유럽의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의 영향력을 갖게 된 비결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독일의 총리인 메르켈이 정치에 막 입문했던 시점부터 기민련 당수로 선출되기까지 11년의 세월 동안 어떤 전략을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 해나갔는지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그의 3단계 전략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우슈비치를 찾아 희생자들에 대한 묵념을 올리는 메르켈


  첫째, 애송이일 때는 먼저 거물에게 다가가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라.


  둘째, 사람들의 비웃음은 신경 쓰지 말아라. 조용히 힘을 키우며 성과로 자신을 증명하라.


  셋째, 게임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자만이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기습적으로 치고 나가라.


오늘 글이 독자분들께서 메르켈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해하고 일상과 업무에서 원하는 것을 얻는 데 도움이 되셨기를 바라면서 이번 글은 여기서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홍선표 한국경제신문 기자

rickeyg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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