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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선표 Nov 07. 2018

인듀어, 마라톤 선수가 막판 스퍼트를 올릴수있는 이유

국가 대표 선수 출신의 물리학 박사가 찾아 나선 지구력의 비밀

최근엔 복싱장에서 운동하는 방식을 바꿨다. 원래 권투 체육관에선 종 치는 소리에 맞춰 3분 운동하고 30초 쉬는 식으로 운동한다.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체육관이 이 방식을 따른다. 운동 시간이 3분인 건 실제 링에 올랐을 때 경기 시간이 한 라운드당 3분이기 때문이다. 


운동 방식을 바꿨다는 건 휴식 시간 없이 계속해서 몸을 움직인다는 말이다. 휴식 시간에도 쉬지 않고 줄넘기 10라운드를 마친다. 그다음에 바로 이어 10라운드 동안 휴식 없이 샌드백에 주먹을 던진다. 원래는 체중 감량을 위해서 운동을 할 때는 물을 거의 안 마셨지만 지금은 조금만 목이 말라도 게토레이나 파워에이드 같은 스포츠 음료를 마시면서 운동한다. 운동이 끝난 후 체중계에 올라 줄어든 몸무게를 보면서 만족하는 대신 조금이라도 더 운동 시간을 늘리는 길을 택했다.


2012년 처음 권투를 접한 뒤 계속 해오던 방식을 바꾼 건 얼마 전 책 <인듀어>(endure)를 읽고 나서부터였다. endure는 '견디다', '참다', '인내하다'를 뜻하는 단어다. 지구력을 뜻하는 인듀어런스(endurance)와 같은 어원이다. 



책의 저자인 알렉스 허친슨은 이력이 독특하다. 1500m 달리기, 크로스컨트리, 산악 마라톤, 로드 레이싱 사이클 종목에서 캐나다 국가 대표로 활약했던 엘리트 육상 선수다. 선수 생활을 마친 뒤에는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선수로서의 경험과 과학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스포츠과학과 육상 경기에 대한 기사를 쓰는 기자로 일하고 있다. 

  

'어렵고 힘든 일은 참아내는 지구력은 어떻게 결정되는 걸까?'


그가 책을 통해 답을 찾으려 한 질문이다. 어떤 종목이든 세계적인 기량을 갖춘 선수들의 신체 조건은 거의 비슷하다. 근육량, 폐활량, 젖산 수치 등등 지구력 운동에 필요한 조건들은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런데 막상 경기를 하면 어떤 선수들은 다른 선수들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좋은 기록을 얻는다. 마라톤이 대표적이다. 


'신체 조건은 동일한데 어째서 선수들의 지구력과 기록에선 차이가 나는 걸까?' 


'42.195를 거의 다 달려 탈진 상태에 놓인 마라톤 선수들이 조금씩 결승선이 보이기 시작하면 막판 스퍼트를 올릴 수 있는 힘은 어디에 감춰진 걸까?'



책의 저자에 따르면 과거엔 인간의 몸이 기계와 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시각이 다수였다. 연료가 떨어지지 않게 해 주고 돌아가는 중간중간에 기름칠만 잘해주면 언제까지나 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다. 육체도 마찬가지다. 평소 충실히 단련해놓은 근육에다가 산소와 영양분을 계속해서 공급해주면 사람은 지치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충분한 양의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선 산소를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뱉는 폐의 용량이 클수록 좋다. 배기량이 좋은 자동차일수록 잘 나가는 것과 같다.  


이 같은 기계론적인 관점에선 사람들이 지구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건 근육에 충분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지 못해서다. 연료가 떨어지면 자동차는 멈춘다. 단순하다.


최근엔 지구력을 결정하는 핵심 조건을 뇌에서 찾는 움직임들이 활발하다. 근육과 폐활량이 지구력을 결정하는 요인이라면 비슷한 신체 조건을 가진 선수들 중에서 왜 누구는 메달을 목에 걸고 누구는 평범한 성적밖에 기록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커졌기 때문이다.  


알렉스 허친슨의 인듀어


일부 스포츠과학자들과 생리학자들은 인간의 다른 모든 행동과 마찬가지로 지구력에도 뇌가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달리기를 하다 어느 순간부터 발걸음이 떼지지 않는 것도 근육의 에너지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더 이상 달렸다가는 몸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한 뇌가 스스로 판단해 다리 근육을 멈춰 세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한 뇌의 무의식적인 작용이다. 


이처럼 뇌가 중앙통제자 역할을 하면서 지구력의 한계선을 긋는다는 주장의 근거는 아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철인 3종 경기든, 울트라 마라톤이든, 히말라야 등정이든 극한 스포츠에 도전한 사람들 중에서 순전히 체력이 떨어져서 사망한 사람이 있는가? 육체의 한계를 저 끝까지 밀어붙이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은 체력이 다 고갈돼서 죽지는 않는다.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뇌가 먼저 근육의 움직임을 멈추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42.195를 거의 완주해 육상 스타디움 트랙으로 들어온 마라톤 선수들을 본 적이 있는가? 이 선수들은 거의 녹초가 돼버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결승선이 보이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모르게 폭발적인 힘으로 막판 스퍼트를 달린다. 결승선을 보는 순간 뇌가 '이제 거의 끝났구나. 여기선 힘을 폭발시켜도 내 몸이 위험하지 않겠구나'라고 판단해 그동안 근육에 잠가뒀던 자물쇠를 풀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뇌가 지구력에 미치는 영향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는 다른 이론도 있다. 이 이론에선 우리가 힘든 상황에서 움직임을 멈추는 건 근력이 떨어져서도, 뇌가 무의식적으로 포기를 결정했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포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지갑 안의 돈을 빼서 쓰는 것과 같다. 우리 몸의 뇌가 하루 동안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고의 양은 정해져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떤 옷을 입을지 고를 때도 사고력을 소비하고, 회사에 출근해 업무를 볼 때도 사고력을 사용한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일조차도 사고력을 소비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루 종일 크고 작은 선택과 판단을 하며 사고력을 소비하느라 하루치 사고력 저장량을 다 거의 다 써버린 저녁이 되면 사람들은 멍해지면서 어떤 일이든 명쾌하게 판단하기 힘들어진다. 이럴 땐 잠을 자면서 비어버린 사고력 저장소를 채우는 수밖에 없다.


격한 운동을 할 때는 우리의 몸뿐 아니라 뇌도 매우 바쁘게 일을 한다. 온몸의 근육에 신호를 보내고 다시 되돌아온 신호들을 종합해 어떻게 움직일지 판단해야 하고, 잡생각 없이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집중 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우리 뇌가 갖고 있던 사고력은 빠르게 소진된다. 그리고 사고력이 바닥을 보이는 순간이 바로 우리가 멈추게 되는 순간이다. 책의 저자는 이 같은 과정을 뇌가 느끼는 '노력의 감각'이 최대치에 달해 더 이상 노력할 수가 없게 됐을 때 지구력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다고 설명한다.


체육관에서 운동 중인 필자의 모습


사이클 선수나 마라톤 선수가 운동을 하기 전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간단한 문제를 풀게 하면 기록이 저하된다는 게 이 같은 주장의 근거 중 하나다. 운동에 써야 할 사고력, 노력의 감각을 소비해버린 만큼 운동에 투입하는 양은 줄어들고 지구력도 약해진다는 설명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최근 운동 방식을 휴식 시간에 쉬지 않고 끊임없이 줄넘기를 하고 샌드백을 치고 쉐도우 복싱을 하는 쪽으로 바꾼 건 내 몸의 지구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인듀어의 저자가 설명한 최신 스포츠 과학이론처럼 지구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뇌라면 내가 힘들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내 몸에는 충분한 에너지가 있고 거기서 더 밀어붙이면 한계를 넓힐 수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 같은 방식은 신체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진 엘리트 선수들에게나 해당되는 걸 수도 있다. 일단 신체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라면 뇌의 무의식적인 판단이나 집중력 고갈로 지구력이 떨어지기보단 순전히 근육의 힘이 부족해서, 제대로 숨 쉬지 못할 정도로 숨 가뻐서, 몸 안의 젖산 수치가 치솟으면서 피로감이 치솟으면서 중간에 그만두게 될 수밖에 없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 경기를 뛰고 있는 이봉주 선수


최근엔 과학 분야가 아닌 책에서도 뇌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 거 같다. 로버트 퍼트넘이 쓴 <우리 아이들>에서도 어린 시절의 학대와 방치가 아이들의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를 길게 설명했고, 조너선 화이트의 <바른 마음>도 서로 다른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뇌는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그동안 베일에 담겨있었던 우리 뇌의 비밀이 한 꺼풀씩 벗겨지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른 분야의 학문에도 뇌과학이 적용되고 있다. 우리가 뇌에 대해서 알면 더 알수록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많은 문제들도 해결될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홍선표 한국경제신문 기자

rickeyg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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