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클라멘 명인 채원병 은성농장 대표. '아낌없이 주는 나무' 전략 성공
나는 네이버FARM판 인터뷰 기사를 쓸 때 주로 농촌진흥청에서 선정한 대한민국 최고농업기술명인 상을 받은 농민들을 만나서 인터뷰한다. 2009년 도입된 이 상은 매년 식량, 과수, 축산 등 5가지 농업분야별로 대표 농민 한 명씩을 선정해서 주는 상이다. 전국에서 다섯 명의 농민에게만 주는 상이기 때문에 선정 조건도 꽤나 까다롭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면 우선 최소 20년 이상 농사를 지어야 한다. 우수한 농축산물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 과 재배법도 개발해야 한다. 본인이 개발한 기술/재배법을 다른 농민들에게 보급해야 한다는 조건도 있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분들이기에 최고농업기술명인 농민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연 매출 10억,20억 원 이상을 거두는 분들도 어렵지 않게 만난다.
그렇지만 내가 최고농업기술명인 분들을 주로 인터뷰하는 건 그들이 부자 농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번 포스팅에서 다룰 채원병 은성농장 대표가 몇 번이고 했던 말대로 농사지어서 돈 잘 버는 사람들은 매우 많다. 단순히 농사로 돈을 많이 번 사람을 인터뷰하자면 최고농업기술명인들보다 훨씬 더 많이 버는 농민들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내가 최고농업기술명인들을 주로 인터뷰하는 건 그들 대부분이 자신의 기술과 노하우를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수한 품질의 농축산물을 재배하는 기술과 노하우를 혼자만 알고 있기보다는 주변에 나누려고 하는 분들이 주로 명인에 선정됐기 때문일 것이다.
네이버FARM 최상단 인터뷰 기사의 홍보 효과를 러프하게 계산해본 적이 있다. 온라인 마케팅 업계에선 자신들이 마케팅하는 분야의 잠재적 소비자로부터 한 번 콘텐츠 클릭을 이끌어내는데 1000원 정도를 쓰면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본다. 한 클릭당 1000원. 조금 전문 용어를 쓰자면 CPC(Cost Per Click)가 1000원이면 꽤 괜찮은 편이다.
이 기준으로 보통 5만 명 이상이 클릭하는 네이버FARM 인터뷰 기사의 홍보 효과를 계산하면 1000원 X 5만 클릭. 5000만 원이다.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회사 돈을 들여(내 인건비, 유류비, 고속도로 통행료) 누군가를 인터뷰해서 5000만 원 이상의 홍보효과를 공짜로 안겨줄 경우 어떤 기준으로 인터뷰이를 선정해야 할까?
나는 공익성이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농사지어 돈 많이 번 사람에게 5000만 원 이상의 홍보 효과를 줄 이유는 없다. 수십 년간 농사를 지어오면서 자신이 체득한 기술과 노하우를 나눠 주변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라야 그런 홍보효과를 누릴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늘 이야기할 채원병 은성농장 대표(65)는 이 같은 공익성의 기준에 가장 부합하는 인터뷰이였다. 경기 파주시 마지리에서 약 4000평(1만 3200㎡) 규모의 화훼농장을 운영하는 그는 원예업계에서 '시클라멘 전도사'로 불린다. 올해로 28년째 화분용 꽃 시클라멘을 키우고 있는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다른 화훼농가에 재배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매년 일본의 베테랑 농민과 원예 전문가를 초청해 농민들이 앞선 재배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주선했다. 2005년엔 다른 농민들과 함께 그동안 익힌 재배 노하우를 정리한 책을 펴내 전국 화훼농가에 무료로 보급했다. "그동안 참 힘들게 살아오면서 몇 번을 자빠졌었다"며 "다른 사람들은 자빠지지 말고 좋은 길만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기술을 나누기 시작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가 어떻게 가난을 극복하고 지금처럼 안정적인 기반을 닦을 수 있었는지 그가 살아온 인생 전반에 대한 이야기는 네이버FARM판에 올린 인터뷰를 참고하길 바란다. 브런치에서는 주로 경영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농민들의 성공 노하우를 분석하는데 집중한다.
http://blog.naver.com/nong-up/221012161753
그는 자신이 화훼 명인으로 선정될 수 있었던 주요 이유 중 하나로 20년 넘게 일본 농민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재배 노하우를 습득한 것을 꼽았다. 1991년 농림부에서 지원하는 '선진농업 시찰 연구프로그램'을 통해 열흘 가량의 일정으로 일본 치바현 사쿠라시에 화훼 단지를 방문한 그는 그때 만났던 일본 농민들과 친구로 지내오고 있다.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많을 땐 일 년에 다섯 차례,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일본을 찾았다.
"처음부터 기술을 배우려고 친해진 건 아니에요. 1991년 일본에 갔을 때 이다카 하루미치라는 친구의 집에 묵었는데 저를 정말 잘 대해줬어요. 그게 고마워서 떠나기 전에 편지를 써서 통역에게 읽어달라고 했는데 그 친구네 부부가 그 부분에 감동이었던 거죠. 한국에 돌아와선 그 친구 애들한테 옷도 선물로 보냈고요. 그러면서 그 친구랑 서로 집도 오가는 사이가 됐는데 그때 많이 배웠죠. 시클라멘을 처음 키울 때 돼지 똥과 소똥을 비료로 줬었는데 꽃이 다 죽어버린 거예요. 그걸 그 친구한테 이야기했더니 돼지 똥을 비료로 주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조금씩 배운 게 도움이 많이 됐죠."
일본 농민들에게 배운 노하우와 채 대표의 꾸준한 연구개발 노력 덕분에 농장은 빠르게 자리를 잡는다. 2000년대 초반 채 대표가 키운 시클라멘 화분 한 개는 개당 4000원가량에 서울 양재동 화훼시장에 낙찰됐다. 다른 농민들이 키운 화분은 보통 낙찰가가 1500원 수준이었다. 2000년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본에 시클라멘 1700본을 수출했다.
앞선 재배 기술을 바탕으로 다른 화훼농가들보다 높은 수익을 거두던 2000년 당시 채 대표는 색다른 결심을 한다. 자신의 재배기술을 다른 농가들에게 무료로 전수하기로 마음먹는다. 다른 시클라멘 재배 농가들과 함께 '경기도 시클라멘 연구회'를 꾸린 뒤 회장을 맡아 재배 노하우를 전수하기 시작한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일본 화훼 전문가를 매년 두 차례씩 초청해 농민들에게 재배기술을 교육하는 자리를 만든다. 연구회의 연구 성과와 현장 재배를 통해 얻은 경험을 담아 2005년엔 '시클라멘 재배 및 육종기술'이란 책을 펴낸다. 모두 3000부를 찍어 전국의 시클라멘 농가와 농업 관련 기관에 보급했다.
"화훼농가들이 잘 되려면 우선 전체 시장의 규모를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저야 그때 화분 하나당 4500원을 받고 팔았지만 다른 농민들이 계속 1500원짜리 시클라멘을 내놓으면 언젠가 제가 파는 꽃 가격도 내려갈 수밖에 없잖아요. 다른 농민들이 키우는 꽃의 품질을 높여서 다른 농민들도 4500원을 받고 팔 수 있게 하는 게 화훼업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그동안 너무 힘들게 살아서 다른 사람들은 내가 겪었던 실패를 안 할 수 있게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고요"
연구회를 결성해 기술과 노하우를 나눈 덕분에 채 대표를 따르는 시클라멘 농가는 늘어났다. 자연스레 채 대표가 원예업계에서 갖는 힘이 커졌다. 우선 일본에서 시클라멘 종자를 들여올 때 더 낮은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여러 시클라멘 농가가 함께 뭉쳐서 대량으로 종자를 구입하게 되면서 더 낮은 가격으로 종자를 들여오게 됐다. 종자를 판매한 일본 종자회사에 매년마다 담당 직원을 파견해 한국 시클라멘 농가에 재배법을 체계적으로 교육해줄 것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그가 화훼업계에 뛰어든 건 28년 전이다. 그전까지 원래 30여 마리의 젖소를 키우고 있었다. 당시는 경기 북부 고양시 일산구에 일산신도시 개발이 추진되면서 고양시 일대에 모여있던 화훼단지들이 북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파주에서 화훼단지를 운영하더라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1990년 그는 큰 결심을 내린다. 낙농업을 접고 화훼 재배에 새롭게 뛰어들었다. 500평(1650㎡) 남짓한 땅을 갖곤 축사 규모를 늘리는 데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적은 땅에서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작물이 뭐가 있을까'를 고민한 끝에 화훼를 선택했다. 이전까지 화훼농가들이 모여있던 경기 고양시 일대가 대규모로 개발되면서 화훼농가들이 파주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도 채 대표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주 재배작물로 시클라멘을 골랐다. 하트 모양의 꽃잎이 나는 시클라멘은 독특한 외향과 건조한 실내환경에서도 잘 견디는 특성 덕분에 당시 조금씩 인기를 끌기 시작한 꽃이다.
신도시 개발계획의 영향으로 수도권 화훼업계의 중심지가 옮겨가던 시절 그는 기회를 빠르게 알아챈 것도 그가 지금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다.
홍선표 한국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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