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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주씨 Jul 12. 2022

자폐아 엄마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리뷰

80년 전, 자폐는 살 가치가 없는 병이었습니다.

 아이가 자폐를 진단받는다는 것은 불확실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자폐의 세계는 확률로만 존재하는 세계다.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아이가 앞으로 말을 할 수 있을지, 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소통이 가능할지, 지능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될지, 인지 능력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그 모든 것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자폐 아이의 엄마로 살며 가장 답답한 것은 바로 이 자폐의 ‘불확실성’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본 사람들이 벌써 나에게 몇 번 물었다. 혹시 재준이도 우영우처럼 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도 불확실하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아.”



나도 궁금하다. 재준이의 미래가..

 


자폐의 ‘불확실’ 영역은 자폐인들의 ‘생존’에도 해당한다. 이는 드라마에서 영우의 독백으로 나타나 있다.



한스 아스퍼거는 나치 부역자였습니다. 그는 살 가치가 있는 아이와 없는 아이를 구분하는 일을 했어요. 나치의 관점에서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은 장애인, 불치병 환자, 자폐를 포함한 정신질환자 등이었습니다. 80년 전만 해도 자폐는 살 가치가 없는 병이었습니다. 



 80년 전에는 생존할 수 있을지 가능성이 불확실했던 자폐인들. 그런데 80년 후인 지금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을까?


80년 전, 나치 시대와 지금. 장애 아동의 인권은 많이 달라졌을까?





 나는 발달 장애 자녀를 살해한 후 자살을 했다는 부모들의 사건을 기억한다. 그때 장애인 자녀를 혼자 두고 세상을 떠날 수 없다고 한 부모의 입장은 이해가 가고 안타깝다는 반응은 많았다. 그런데 정작 살해된 장애인 자녀의 입장에 대한 반응은 거의 없었다. 왜 사람들은 가해자인 부모의 입장만 이해를 하고, 명백한 살인 피해자인 장애인 자녀의 입장은 이해하지 못할까?

 

 아직도 장애인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대우받지 못하는 존재,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되고 있는  아닐까? 80 , 나치 시대와 지금은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나치 부역자였던 한스 아스퍼거가 우리들의 마음속에 아직 살아있는  아닐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를 묻는다면,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은 ‘사랑’이라고 답할 것이고, 톨스토이 또한 ‘사랑’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그런 건 없다고 할 것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고 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무엇을 잘 해내고, 어떤 건강 상태 이상으로 있어야지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사랑이 있어야지만 살 수 있는 존재도 당연히 아니다. 사람은 무엇이 없어도 그냥 살 수 있다. 사람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목적이며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나는 더 이상 장애인 자녀를 살해하고 자살을 했다는 부모들의 기사를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런 기사에 가해자인 부모의 입장이 이해가 간다는 댓글도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도, ‘재준이와 같이 죽는 게 나을까’ 이런 생각은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





영상이 궁금하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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