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전, 자폐는 살 가치가 없는 병이었습니다.
아이가 자폐를 진단받는다는 것은 불확실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자폐의 세계는 확률로만 존재하는 세계다.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아이가 앞으로 말을 할 수 있을지, 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소통이 가능할지, 지능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될지, 인지 능력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그 모든 것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자폐 아이의 엄마로 살며 가장 답답한 것은 바로 이 자폐의 ‘불확실성’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본 사람들이 벌써 나에게 몇 번 물었다. 혹시 재준이도 우영우처럼 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도 불확실하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아.”
자폐의 ‘불확실’ 영역은 자폐인들의 ‘생존’에도 해당한다. 이는 드라마에서 영우의 독백으로 나타나 있다.
한스 아스퍼거는 나치 부역자였습니다. 그는 살 가치가 있는 아이와 없는 아이를 구분하는 일을 했어요. 나치의 관점에서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은 장애인, 불치병 환자, 자폐를 포함한 정신질환자 등이었습니다. 80년 전만 해도 자폐는 살 가치가 없는 병이었습니다.
80년 전에는 생존할 수 있을지 가능성이 불확실했던 자폐인들. 그런데 80년 후인 지금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을까?
나는 발달 장애 자녀를 살해한 후 자살을 했다는 부모들의 사건을 기억한다. 그때 장애인 자녀를 혼자 두고 세상을 떠날 수 없다고 한 부모의 입장은 이해가 가고 안타깝다는 반응은 많았다. 그런데 정작 살해된 장애인 자녀의 입장에 대한 반응은 거의 없었다. 왜 사람들은 가해자인 부모의 입장만 이해를 하고, 명백한 살인 피해자인 장애인 자녀의 입장은 이해하지 못할까?
아직도 장애인은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대우받지 못하는 존재, 살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되고 있는 건 아닐까? 80년 전, 나치 시대와 지금은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나치 부역자였던 한스 아스퍼거가 우리들의 마음속에 아직 살아있는 건 아닐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를 묻는다면,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은 ‘사랑’이라고 답할 것이고, 톨스토이 또한 ‘사랑’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그런 건 없다고 할 것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고 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무엇을 잘 해내고, 어떤 건강 상태 이상으로 있어야지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사랑이 있어야지만 살 수 있는 존재도 당연히 아니다. 사람은 무엇이 없어도 그냥 살 수 있다. 사람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목적이며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나는 더 이상 장애인 자녀를 살해하고 자살을 했다는 부모들의 기사를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런 기사에 가해자인 부모의 입장이 이해가 간다는 댓글도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도, ‘재준이와 같이 죽는 게 나을까’ 이런 생각은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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