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9일
수의테크니션으로 일하면서 많은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병원비 부담 때문에 치료를 하지 않고 가는 경우나
보호자의 잘못된 판단이나 지식으로 인해
질병이 발생하는 상황을 마주할 때가 그렇다.
하지만 이보다 더 많은 생각이 스치는 순간은
바로 '안락사'가 거론될 때다.
나는 강경한 동물 안락사 반대파다.
안락사 앞에 '동물'을 붙인 이유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안락사는 찬성하기 때문이다.
모순된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나의 논리는 이렇다.
인간 안락사는 스스로 생명 종결을 결정하고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동물 안락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은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없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람이든 태어남은 의지가 아니다.
하지만 살아감의 영역은 의지다.
'나의 삶'
'내 삶은 내 의지로!'
'주도적인 삶을 살자.'
수많은 멘털 관리 서적들에서 이러한 표현들을 쓸 만큼
살아간다, 삶의 영역은 그 생명을 가진 개체의 의지다.
이것은 인간만의 고유 영역은 아니기에 동식물 또한 마찬가지리라.
"우리 00이가 더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제 저희가 더 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지금 고통스러울 겁니다."
동물 안락사를 논하는 단계가 됐을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대화 속, 죽음 당사자의 의사는 얼마나 포함되어 있을까.
물론, 강아지나 고양이가 말을 할 수 없기에 결국은 보호자와 수의 의료진의 판단에 달린 것은 맞다.
하지만.......
단지 예후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또 지금 당장 고통스러울 거라는 이유로
동물 안락사를 결정하는 것이 맞을까?
리엘이는 말기 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으로 보이는 통증 반응은
꽤 짧은 시간 보이고 떠났다.
제대로 된 통증은 아마 아이의 자발 식욕이 점점 줄었던 6월 즈음부터였으리라.
어찌 보면 급사라 할 수 있는 이별이었기에 내가 안락사를 강경하게 부정적으로 보는 걸 수 있다.
동물 안락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같은 동물 의료진 사이에도 크게 갈린다.
일례로, 함께 일하는 수의사 A선생님은 동물 안락사를 긍정적으로 본다.
A선생님의 반려 동물은 림포마로 힘든 투병을 하다 떠났다.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아이가 보였던 통증 반응은 수의사로서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 더해
보호자로서 더 큰 고통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있다면 많이 힘들지 않게 보내주는 것이 낫지 않냐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이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암세포가 뿜어내는 열기는 마치 불구덩이에 들어앉아있는 듯한 통증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
생명력이 사그라들면서 느끼는 고통은 겪어보지 않았으니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것도 맞다.
하지만 동물 안락사를 마치 '보호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라 착각하는 일부 보호자들이 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병원으로 문의 전화가 왔는데 애가 아프니 안락사시켜달라는 것이었다.
마치 진료비를 문의하듯, 용품 비용을 문의하듯
그냥 아프니까 죽여달라는 것이었다.
아이를 살리고자 커리어도 포기하고
많은 빚을 지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던 내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프다는 이유로 죽여달라는 말을 할 수 있나?
당시 원장님은 전화 상으로는 안락사가 가능하다, 아니다 판단할 수 없으니
아이를 데리고 내원해서 진료부터 받아보라 답했다.
하지만 보호자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동물 안락사는
치료비를 줄이기 위한 선택도,
동물을 위한 배려도,
보호자를 위한 자기 연민을 위한 것도 아니다.
말할 수 없는 동물이지만 자신의 삶을 종결할지 여부는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는 리엘이의 마지막 1시간 동안 끊임없이 아이게게 물었다.
"리엘아, 힘드니? 이제 그만하고 싶니?"
아이는 마치 대답하듯 기적적으로 돌아왔던 자발 호흡이 사라졌고
심박도 서서히 느려졌다.
그래서 두 번째 심정지가 오면 DNR(심폐소생술 거부) 하겠다고 했다.
내가 특이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전날, 호흡 곤란과 기력 저하로 응급 내원했던 환자가 있었다.
여러 처치 후에도 반복적인 발작과 흑변을 봤다. 예후가 좋지 않았다.
부모님과 30대로 보이는 두 남매가 펑펑 울며 환자의 안락사를 결정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산소방에서 꺼내져 가족이 있는 진료실로 향했다.
환자는 인사를 나누는 동안, 심장이 멈췄다.
마치 가족의 괴로운 결정을 아는 듯, 스스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세상엔 다양한 관계가 존재하고
저마다의 사정이 다르니 내가 겪은 사례를 일반화하여 주장할 순 없다.
그저 동물이라 하여, 자신이 보호자라 하여
동물의 생을 쉬이 종결할 순 없다고 말하고 싶다.
생과 사의 현장에 있는 것은 많은 생각을 낳는다.
작은 몸으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굳건히 생을 이어가는 동물도 있지만
의지를 놓는 순간, 마치 아는 듯 생을 놓는 동물도 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
나조차 내가 살아가는 것이 정답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한 번쯤 질문을 던지고 싶다.
동물이라 하여 다른 어떤 생명체의 생과 사를 인간이 결정할 권한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