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커다란 나무가 힘없이 바싹 말라 있다. 줄기를 단단하게 붙잡아주던 두꺼운 껍질이 떨어져 속살을 훤히 보였고, 하늘로 뻗은 가지들은 언제 꺾일지 모를 정도로 위태롭다. 나뭇잎 하나 보이지 않고, 가장 길고 얇은 가지 끝에 하얀 꽃망울 하나가 애처롭게 달려 있다. 어렵사리 꽃망울 하나를 피워낸 나무의 뿌리는 단단한 땅속에 존재했다. 나무의 크기보다 몇 배는 더 큰 뿌리가 땅속 깊은 곳으로 향해있다. 마치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듯 사방으로 뻗어나간 뿌리의 끝에는 검은 바다가 있었다. 어두운 땅 아래 존재하는 바다는 빛을 삼켜버릴 정도로 어두웠다. 거센 파도가 끝도 없이 밀려들어 부서지고, 폭풍우를 만난 듯 쉼 없이 일렁였다. 요동치는 검은 바다 아래, 하얀 꽃이 가득 피어있는 들판이 펼쳐졌다. 꽃잎이 흩날리는 들판에서 올려다보면, 검은 바다도 커다란 나무도 하늘의 일부일 뿐이었다.
한 남자가 어슴푸레한 공간에서 눈을 떴다. 의자에 앉아 있던 그의 눈앞에는 캔버스 하나가 우뚝 서 있다. 그곳에는 그가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커다란 나무, 검은 바다 그리고 하얀 들판까지. 전혀 다른 세계가 층층이 쌓여 있는 모습은 신비로웠다. 세상에 존재할 리 없는 풍경을 담고 있는 그의 그림은 작은 부분까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들여다볼수록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보여서, 마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림 앞을 서성였다. 희미한 불빛에 그의 은발이 반짝이듯 빛이 났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그는 물감이 묻은 앞치마를 매고, 팔짱을 낀 채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무거운 안경을 제자리로 올렸다. 남자는 그림의 완성을 앞에 두고 깊은 고민에 빠져있다.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하던 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붓을 들고, 거침없이 무언가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에 하얀 들판 위로 두 사람이 나타났다. 나란히 선 그들은 고개를 들고, 머리 위에 일렁이고 있는 검은 바다를 바라봤다. 그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갑자기 어딘가에서 날아온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남자가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자, 냄새는 더욱 짙어졌다. 그는 손에 든 붓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다. 콧잔등을 짓누르던 안경을 벗고, 곁에 놓인 소파에 누웠다. 안경을 벗어 흐릿한 시야에 천장에 달린 불빛이 몽글몽글하게 보였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꺼풀 안쪽에 아른거리는 불빛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꿈틀대던 빛은 점차 사라지고 어둠이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환한 빛이 눈꺼풀 위로 쏟아졌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떴다. 소파에 누워있던 남자는 작은 거실에 서 있었다. 작업을 하고 있던 커다란 캔버스는 보이지 않았고, 흑백 사진이 덕지덕지 붙은 벽을 따라 낡은 가구들이 놓여있는 전혀 다른 공간 속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무거운 안경을 쓰지 않아도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는 익숙하게 테이블 위에 놓인 카메라와 손전등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거실 한편에 있는 짧은 복도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엮인 낡은 나무문이 있었고, 문 앞에는 덩치가 커다란 남자가 서 있었다. 덩치 큰 남자는 서글서글한 웃음을 짓더니 말없이 은발의 남자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말없이 은발의 남자는 낡은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 문을 두 번 두드렸다. 노크하듯 정중한 그의 움직임과 달리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던 그가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으로는 천장도 바닥도 없이 칠흑 같은 어둠만이 존재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사이로 그를 이곳까지 이끌었던 매캐한 냄새가 풍겨왔다. 은발의 남자는 두 손으로 머리를 단단히 감싸 쥐고, 뒤에 있는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덩치 큰 남자의 미소를 확인한 그는 망설임 없이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바닥을 알 수 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에 남자는 몸을 웅크리며, 다시 한번 눈을 꼭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