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삐삐삐-
“하아….”
안희진은 알람 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천장을 바라보는 그녀의 또렷한 눈빛은 방금 일어난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꿀잠’을 원했지만, 오늘도 실패하고 말았다. 몇 주째 비슷한 꿈을 꾸다가 새벽에 깨어났다. 그렇게 눈을 뜨고 나면 다시 잠을 잘 수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알람 소리를 듣곤 했다. 피곤함이 어깨를 짓눌렀지만, 출근 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버스에서 지하철 그리고 다시 버스. 환승을 두 번 해야 닿을 수 있는 그녀의 직장은 편도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다. 밤새 뒤척임에 졸릴 법도 한데, 운 좋게 자리에 앉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는 사이로 간밤에 꿨던 꿈이 떠올랐다. 다른 생각을 해보려 노력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 선명한 꿈이 현실까지 괴롭히려 들었다. 그녀는 회사와 관련된 꿈을 꾸고 있었다. 처음에는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시간 뒤에 또다시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에 괴로워졌다. 끝없이 반복되는 출근길 퍼레이드.
‘이것도 꿈은 아니겠지?’
희진은 자신의 볼을 꼬집으려다 그러지 않기로 했다. 우중충한 겨울 하늘, 그보다 더 우중충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 꿈일 리가 없었다.
사무실의 아침은 언제나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사람들 대부분이 의미 없는 잡담을 나누기보다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선호했다. 희진도 그런 쪽에 속했다. 책상에 따뜻한 커피를 올려두고, 해야 할 업무를 확인했다. 배경음처럼 들려오는 마우스, 키보드 소리는 어쩐지 사무실을 더욱 고요하게 만들었다. 출근길 내내 머리를 어지럽히던 생각이 잠잠해졌다. 그녀는 온전히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이 시간이 편했다.
그 고요를 깨뜨리는 폭풍은 언제나 한 사람의 발걸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출근 시간을 한참 넘긴 10시 10분, 품이 큰 검은색 패딩에 청바지 차림의 중년 남자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출입구에서 한참 들어가야 하는 그의 자리는 그 층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창가 옆이다.
“부장님, 안녕하세요.”
남자의 걸음마다 앉아 있는 직원들의 인사가 쏟아졌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곧장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책상 위로 어깨에 멘 가방을 툭 내려놓고, 안경을 치켜올리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10분 뒤 회의합시다.”
그렇게 다시 사무실을 나가버리는 남자, 조 부장이었다. 그는 희진이 속한 팀의 팀장직을 맡고 있었다. 몇몇 사람이 그의 뒤를 따라 함께 사라졌다.
‘10분은 무슨, 11시 안에만 올라와도 다행이겠다….’
희진은 불평을 속으로 삼켰다. 조 부장은 걸음으로 소란을 몰고 다녔다. 잦은 지각으로 단축근무를 하는 것도 모자라 담배 피우는 시간으로 초 단축근무를 일삼았다. 흡연실에 갈 때도 꼭 저렇게 여러 명이 함께 가곤 했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지 담배 타임은 30분을 넘기 일쑤였고, 그 때문에 퇴근이 늦어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게다가 방금 일어난 듯이 부스스한 머리에 기름져 보이는 얼굴, 꾸깃꾸깃해 보이는 셔츠까지, 그의 몰골 또한 참기 힘들었다.
잠깐의 스침에 그녀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펼쳐졌다. 둘둘 말린 종이와도 같은 그것은 폭이 좁고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그 위 깨알 같은 글씨가 순번을 달고 적혀 있다. 맨 위에는 ‘조 부장 단점 리스트’라는 제목이 달려있었다. ‘제1조 자기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를 중심으로 리스트는 계속해서 추가되었고, 어느새 머릿속에 단단히 자리 잡았다. 지금처럼 작은 자극에도 펼쳐져 자신도 모르게 줄줄 읊어댔다.
‘제11조 지각 후 담배를 피우러 간다, 제12조 쓸데없이 회의를 길게 한다, 제13조… 그만해. 정신 차리고 오늘은 일찍 퇴근하자, 응?’
희진은 고개를 흔들며 시끄러운 머릿속을 조용히 시켰다. 이번 주 내내 야근했던 그녀는 칼퇴근 계획을 품고 있었다. 휴식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무엇보다 숙면을 위해 새로운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안 대리, 잠깐 내 자리로.”
희진의 뒤를 스치며 조 부장이 말했다. 가까스로 끌어모은 집중력이 또 흐트러졌다. 그녀는 대답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한겨울에도 따뜻한 빛이 드는 자리, 조 부장은 어지럽게 쌓여 있는 서류 더미 위로 담뱃갑과 라이터를 던진 후 자리에 앉았다. 손에 든 커피믹스를 홀짝이며, 그녀가 맡은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을 물었다.
조 부장과 업무 이야기를 나누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그쪽으로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경력만큼 경험이 많았고, 그의 조언 몇 가지로 쉽게 풀리는 일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희진은 프로젝트 경과를 간단히 보고했고, 몇 가지 이슈에 대해 말했다. 역시나 그녀가 어렵게 생각했던 문제를 쉽게 다루는 조 부장. 그녀를 올려다보며 진지한 눈빛으로 말하는 그에게서 커피믹스와 담배 냄새가 뒤섞여 났다.
‘단점 리스트 제18조 그는 입냄새가 심하다.’
두 냄새의 합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조 부장에게는 건강 상태가 의심될 정도로 심한 냄새가 났다. 특히나 아침에는 고문이 따로 없었다. 애써 접어둔 리스트가 다시 펼쳐지고 말았다. 희진은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숨을 나눠 쉬며 시선을 돌렸다.
‘단점 리스트 제21조 꿈에 나와 괴롭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