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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가게와 특별한 손님-2

인센스 스틱 그리고 심향(尋香)

by 리을

혼잡한 버스 안, 희진이 초조하게 시계를 내려다봤다. 칼퇴근은 다짐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오늘따라 그녀가 맡은 프로젝트의 이슈가 넘쳤고, 하루 종일 밀려드는 전화에 시달렸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조 부장은 자리에 없었다. 어디에 있는지 뻔히 알고 있지만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업무 보고를 위해 흡연실로 내려가다니, 상상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했다. 결국 퇴근 시간이 늦어지고 말았다.


‘진짜 도움이 안 돼.’


삐- 하차 벨이 울렸고, 희진은 복잡한 틈을 비집고 버스에서 내렸다. 그녀는 항상 내리던 정류장을 지나쳐 내렸다. 조금 낯선 풍경을 잠시 살피다, 주택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골목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길에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퉁이를 돌자 익숙한 길이 보였고, 걸음은 달음박질에 가까워졌다. 가쁜 호흡에 입김이 시야를 방해할 즘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먼발치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밝은 건물은 외부가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져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듯했다. 전면은 통유리로 되어 있고, 가운데 커다란 유리문이 나 있다. 안쪽에서 내뿜는 빛이 고스란히 골목으로 떨어지는 탓에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키가 작은 단층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기 위한 비법 같기도 했다. 건물의 눈썹처럼 달린 하얀색 바탕의 간판에는 ‘심향(尋香)’이라는 글자가 단정하게 적혀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얼마 남지 않은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조 부장에 대한 원망이 자신의 저질 체력으로 옮겨가고 있을 때쯤,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그는 손에 든 긴 막대로 차양막을 접으려 하고 있었다.


“잠시, 헉, 잠시만…요!!”


차오른 숨 때문에 민망한 소리를 내버렸지만, 덕분에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남자는 손에든 막대를 내리고 시선을 돌렸다. 어두운 골목 사이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다시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러자 가로등 빛 아래로 다급하게 달려오는 그녀를 눈치챘다.


“천천히 오세요. 영업시간은 충분히 남아있답니다.”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그 상냥한 말투에 희진은 걸음을 늦추며 숨을 골랐다. 정신없이 뛰어오느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는 멀리서 보기에도 눈에 띄게 덩치가 컸다. 손을 뻗으면 높이 매달린 차양막에도 쉽게 닿을 것만 같았다. 차양막을 모두 걷어낸 남자가 희진이 오는 쪽을 향해 섰다. 우뚝 솟아있는 남자를 보자 어쩐지 움츠러드는 기분이 들었다.


“어서 오세요. 당신의 향기를 찾아드리는 심향입니다.”


서너 걸음 남았을 때쯤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남자는 희진의 정수리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시선이 높았다. 하지만 그의 다정한 말투와 꽃무늬가 그려진 앞치마 차림은 외모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무엇보다도 밝게 웃음 짓고 있는 남자의 표정이 그녀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앞치마 위로 '알바생'이라고 적힌 이름표가 반짝였다.


“안녕하세요. 혹시 안을 구경해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편하게 보시다 제가 필요하면 말씀해 주세요. 마감 시간은 9시랍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다행히도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딸랑- 작은 풍경소리가 울렸고, 그는 희진이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내부도 온통 하얀색인 공간에는 매캐한 냄새와 달큰한 향기가 뒤섞여 났다. 그 신기한 냄새는 한 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에서 퍼지는 듯했다. 가까이 다가서자 긴 막대가 연기를 내뿜으며 붉게 타오르고 있다. 막대의 정체는 인센스 스틱, 이곳은 인센스를 파는 가게였다. 아래에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 오늘의 향기 : 일랑일랑 - 쌀쌀한 겨울, 피곤한 하루를 보냈을 당신에게 위로의 향기를 보냅니다. - 알바생 」


이곳은 몇주 전 희진이 산책길에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다. 향긋한 냄새에 이끌려 고개를 돌린 곳에 밝게 불빛을 비추고 있던 모습이 유독 기억에 남아 있었다. 골목길에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와 불빛은 낯설지만, 왠지 모를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땐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가게가 어쩐지 피곤한 일상 중에 자꾸만 떠올랐고, 향기가 숙면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급한 마음으로 퇴근을 서둘렀던 건 그 짧은 순간 때문이었다. 희진은 피어오르는 연기 가까이 다가갔다. 눈을 감고 천천히 향을 맡아보자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벽을 따라 세워진 선반에는 예쁜 색의 종이갑이 쌓여있다. 그 앞에는 향을 설명하는 문구와 샘플이 나와 있었다. 하나씩 집어 들어 냄새를 맡아봤지만, 종류가 많아서 선택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상냥한 알바생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다시 가게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서 타오르던 인센스 스틱은 사라졌고,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에 재가 흩날렸다.


새로운 냄새가 느껴진 건 그 순간이었다. 미간을 툭 치고 지나가는 강렬함에 편안했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냄새를 그녀는 알고 있다. 향긋함만이 가득해야 할 이곳에 절대 어울리지 않는 것, 온종일 시달렸기에 모를 수 없는 그 냄새의 정체는 바로 담배였다. 냄새를 쫓다 보니 바람에 나부끼는 하얀 커튼이 보였다. 망설임 없이 그곳에 다가가, 반쯤 열려있던 문을 벌컥 열었다.


옅은 조명 아래 희뿌연 연기가 일렁이며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갑자기 들이닥친 매캐한 연기에 희진은 연거푸 기침을 뱉었다. 그녀의 예상과 달리 문 너머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방이 하얀색이었던 매장과 이 방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온통 어두운색이었다. 벽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어두운 갈색의 기하학무늬가 보였고, 천장과 바닥은 새까만 색으로 칠해진 듯했다. 검붉은색의 소파들이 자그마한 탁자를 감싸듯 놓여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된 넓은 책상이 보였다.


멍하니 방을 바라보던 희진은 문을 연 목적도 잊은 채 그 신비로운 풍경 속을 거닐었다. 기하학무늬로 보였던 짙은 갈색의 벽은 다가설수록 입체감을 드러냈고, 손바닥만 한 작은 서랍들이 빼곡하게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휘갈겨 쓴 작은 글씨들이 서랍마다 이름을 달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 커다란 책상 앞에 도착했다. 책상 위에는 알 수 없는 기구와 말린 꽃, 풀 무더기가 어지럽게 쌓여 있다. 모서리에서 타오르고 있는 인센스 스틱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희진을 이곳까지 이끈 냄새가 느껴졌다. 이름 모를 인센스 스틱에서 나는 탄내는 담배 냄새와 닮아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맡은 냄새는 그보다 훨씬 복잡했다. 고소한 냄새가 뒤따르는 듯하다가도, 따뜻한 나무 향이 풍겼다. 눈을 감고 방 안에 가득한 그 향기에 집중했다.






“대리님, 혹시 언제 끝날까요?”

“하아… 나도 모르겠어.”


젓가락으로 먹지도 않을 반찬을 뒤적였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 듯한 불판 위에는 바짝 타들어 간 고기 몇 점만이 남았다. 익힐 것도 없는데 숯은 꺼지지도 않고 연기를 토해냈다. 안절부절못한 자세로 물잔을 만지던 신입이 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홀이 커다란 고깃집에는 흔한 유행가도 흐르지 않았다. 적막한 가게 안에는 다른 손님도 없었다. 그녀가 앉은 둥근 테이블 주변에는 여섯 개의 의자가 놓였지만, 그중 네 개가 비어있다. 언제나 그랬듯 담배 타임은 회식 때 더욱 당당해졌다.


딸랑- 풍경소리가 들렸고, 두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한 남자는 보기 드문 은발이었고, 다른 남자는 유달리 덩치가 컸다. 독특한 두 남자의 외모에 시선이 자연스레 갔다. 둘은 구석진 자리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불 빼 드려요?”


눈치만 보던 주인이 다가와 물었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먼저 요구한 것도 아니었고, 불이 없으면 자리를 끝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더라도 연기는 덜 마시게 될 터였다.


“에이, 이모. 우리 아직 안 끝났다니까. 이제 막 주문하려고 했어. 안 대리 좀 알아서 시켜놔.”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들어와 몇 마디를 내뱉고는 화장실로 사라지는 남자, 조 부장이었다.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평소보다 목소리 톤이 높았다. 희진은 자기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럴 줄 몰랐던 게 아니었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진상이 배가 된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오지 말았어야 했다. 다른 세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진한 담배 냄새가 숯불 냄새를 짓눌렀다. 조 부장과 함께 들어온 직원이 신입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농담을 던졌다. 희진은 어색하게 웃는 신입의 얼굴에서 절망을 보았다. 어느새 메뉴판이 그녀의 앞에 놓여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메뉴판을 던지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이 모두가 그의 작품이었다.


‘단점 리스트 제28조 눈치가 없다, 제29조 팀 분위기를 이상한 방향으로 흐린다, 제30…’


“이리 줘. 내가 고를 테니까.”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에서 메뉴판을 가져간 사람은 김 차장이었다. 덕분에 폭주하던 생각이 멈춰 섰다.


“안 대리, 안주 나오면 신입하고 들어가 봐. 나머진 내가 이야기할 테니까, 응?”


메뉴판을 보고 무어라 주문을 마친 김 차장이 희진에게만 들리도록 말을 건넸다. 그는 팀에서 희진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상사였다.


“차장님…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그 손 좀 내리지? 신입이 무겁겠어.”


그의 말에 뻘쭘한 표정으로 직원은 팔을 내렸다. 김 차장은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아랫사람의 의중을 잘 파악했고, 의견이 다르더라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의 장점은 단순히 분위기를 좋게 하는 것을 넘어서 실무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사람의 마음을 빠르게 알아내고, 이견을 잘 조율한다는 것은 미덕을 넘어선 능력이었다.


“뭐 시켰어?”


그리고 그런 김 차장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조 부장이 자리에 앉으며 희진을 바라봤다. 이렇게 눈을 마주치고 있을 때면 참았던 말을 뱉고 싶어졌다. 곁에 있던 김 차장이 그의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다시 눈앞의 반찬을 뒤적였다. 안주가 빨리 나오길 기도하면서.


“안 대리 한잔하지?”

“…네.”


조 부장이 소주를 들고 희진을 바라봤다. 그녀는 여기서 나가기 위한 마지막 노력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가득 따라주는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안 대리 좀 변한 것 같지 않아?”


그의 말투나 눈빛을 보아하니 긍정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 말에 희진은 웃음이 나올뻔했다.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비웃음이.


“점점 더 열심히 일하고 있죠.”

“아니, 아니. 그런 점 말고. 예전에는 회식도 곧 잘 나왔고, 사적인 이야기도 꽤 나눴던 것 같은데. 5년 차라 그런가? 안 대리 5년 차 맞지? 좀 재미없게 변했어.”

“허허… 저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말이죠.”

“거야, 김 차장이 이런 쪽으로는 둔하니까. 안 대리는 어떻게 생각해?”


오고 싶지 않았던 회식을, 신입 핑계를 대기에 어쩔 수 없이 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까운 시간까지 쓰면서, 또 마시고 싶지 않은 소주를 억지로 마셨다.


‘너라는 또라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줄 몰랐습니다.”

“이거 봐. 대답도 딱딱하다니까. 사회생활 하면 불편한 게 있을 수밖에 없지. 근데 티가 나면 모두가 불편해지잖아. 그럼 감춰야지. 그게 안 되면 터놓든지. 말을 해야 오해도 풀 수 있고, 그러려고 이런 자리가 필요한 거 아니겠어?”


그런데 그 또라이가 불편하다고 말했다. 문제가 희진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왜 말하지 않았겠는가, 왜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참고 있었겠냐는 말이다.


“…부장-”

“주문하신 갈비 나왔습니다.”

“역시 이 집은 마무리는 갈비죠. 손님도 없는데, 이모가 좀 구워줘요.”


참았던 말이 터져 나오려던 순간이었다. 주문한 고기가 나왔고 김 차장이 주인을 불러 세웠다. 주인은 못 이기는 척 서서 고기를 굽다가 그가 따라 준 술을 마셨다. 어느새 화제는 신세 한탄을 하는 주인에게로 옮겨갔다. 희진은 뱉지도 못한 말을 억지로 삼키느라 식도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부장님, 이제 애들은 보내죠. 제가 긴히 드릴 말씀도 있고.”

“그래? 그러자고. 다들 들어가 봐.”


김 차장이 빠르게 눈짓을 보냈다. 서둘러 가방을 챙긴 신입이 먼저 들어가 보겠다는 인사를 하며 일어섰다. 고개 숙인 채 앉아있는 희진의 어깨를 신입이 두드렸다. 가게 주인과 농담을 나누는 조 부장의 얼굴을 쳐다보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까딱 숙이고는 가게를 박차고 나왔다. 어두워진 골목에는 가로등 불빛만이 비쳤다. 명치 부근이 아프도록 쑤셔댔다. 뱉어내지도 삼키지도 못한 분노가 그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게 분명했다. 손으로 답답한 부분을 문질렀다.


“대리님, 괜찮으세요?”


함께 나온 신입이 걱정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응…. 얼른 들어가 봐. 나도 그럴 테니까.”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신입은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말이 희진의 머릿속을 헤집어 놨다.

‘내일… 내일이 있구나. 또 견뎌내야만 하는구나….’


그녀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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