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현실
“그게 아니라, 이렇게 하라고.”
“그것보다는 이게 훨씬 잘 어울린다니까요. 형, 봐봐요.”
소곤거리지만 또렷하게 두 사람의 실랑이에 희진이 눈을 떴다. 어둡고 낯선 공간에서 움직이는 형체를 몽롱하게 바라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 나도 모르게 잠들어버렸어.’
희진은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괜찮으세요?”
“네, 네. 괜찮아요. 죄송해요. 깜빡 잠들어 버렸네요.”
“편히 쉬셨다면 다행입니다.”
다정한 알바생이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었고, 그의 옆에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는 두꺼운 안경을 꼈고, 어두운 방 안에서도 반짝이는 은발이었다. 그는 고개를 까딱이더니 말없이 방을 나갔다.
“아, 저희 사장님이에요.”
멍하게 바라보던 그를 희진에게 알바생이 설명했다. 항상 저런 건 아닌데 낯을 가려서 그렇다는 둥, 저래 봬도 성격은 나쁘지 않다는 둥 궁금하지 않은 말까지 덧붙였다.
“저… 조금 전 지금 이 방에서 피웠던 인센스 스틱을 구매할 수 있을까요?”
“아! 그건 형, 아니 저희 사장님께 여쭤봐야 할 것 같아요. 잠시만 매장에서 기다려 주세요.”
방에는 복잡한 냄새가 아직 잔향처럼 남아있었다. 눈을 감고 집중해서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금세 노곤함이 몰려왔다. 이 향을 선택하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짧게 잠든 것 치고는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꾼 것도 같은데,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방 안을 바라보다 문밖으로 나왔다.
“이게 같은 제품인데 한 번 확인해 보시겠어요?”
알바생은 인센스 스틱이 담긴 상자를 열어 희진에게 내밀었다. 불이 붙지 않은 스틱에는 희미한 나무 냄새가 났다.
“네. 이게 좋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능숙하게 포장지를 꺼냈다.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내부를 다시 훑어봤다. 밝은 빛이 한껏 떨어지는 매장을 바라보자, 자신이 잠들었던 어둑한 방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곳으로 향하는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포장을 끝낸 알바생이 희진에게 봉투를 건넸다. 계산대에서 나온 직원은 희진을 가게 앞까지 배웅했다.
“감사합니다. 좋은 꿈 꾸세요.”
오후 9시, 가게에 있었던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 무척 빠르게 지났다. 익숙한 골목을 따라 걷던 희진이 다시 가게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잔향음처럼 머릿속에 울리는 직원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좋은 꿈을 꾸라던 상투적인 말이 어쩐지 묘하게 들렸다. 가게는 불이 꺼져있었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하아….”
희진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운 집에 들어섰다. 토해내듯 한숨을 내뱉으며 작은 소파에 온몸을 구겨 넣었다. 손에 들려있던 봉투와 휴대전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밤 열한 시를 훌쩍 넘긴 시간,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소파에 웅크려 누워있었다. 인센스 스틱만 있으면 해결될 거라 믿었던 문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편안한 향기에 스르륵 잠드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꿈은 더 선명하고 또렷해졌다. 끊임없이 회사와 관련된 꿈을 꾸고, 하루도 빠짐없이 조 부장이 나타났다. 밤새 그에게 시달리다, 낮에 또 마주해야 하는 그 얼굴.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는지, 편두통까지 하루 종일 그녀를 괴롭혔다. 잠시 얌전해진 줄 알았던 머리가 또다시 찌르듯 아팠다. 참다못해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바닥에 떨어진 봉투에서 약을 꺼냈다. 비틀거리듯 일어나 물과 함께 약을 삼켰다. 그리고 멍하니 서서 어두운 집안을 바라봤다.
‘지겨워….’
하루 내내 기다려왔던 순간인데 기쁘지 않았다. 씻고, 침대에 눕는 일도 버거웠다. 외투를 대충 벗어 던지고 침실로 향했다. 침실에는 침대와 작은 책상이 창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희진은 책상 위에 놓인 인센스 스틱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나무가 타는 듯한 내음, 그 시작은 언제나 담배 냄새를 떠오르게 했다. 창문을 한 뼘 정도 열어두고, 그 아래 벽에 기대어 앉았다. 창을 넘은 찬 공기가 온몸을 덮쳤고, 그녀는 무릎 사이로 고개를 웅크렸다. 인센스 스틱에서 뻗어 나온 연기가 내려와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창문 아래서 잠이 들었던 그녀는 또 지독한 꿈을 꿨다. 반복해서 꾸는 악몽은 마치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을 거란 암시처럼 그녀를 옥죄어왔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보려 애썼지만, 몸 상태는 어제보다 더 좋지 않았다. 집중력이 자꾸만 떨어졌고, 평소에는 하지 않던 실수가 잦아졌다. 뜨거운 커피로 목을 축여보지만, 상태를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다 몇 달간 고생했던 프로젝트에서 커다란 실수를 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도 김 차장이 그를 발견했고, 이틀간의 야근으로 바로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 부장의 호출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안 대리, 요즘 왜 그래?”
희잖은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연차에 안 맞는 실수나 하고. 그 프로젝트 하루이틀 봤어? 김 차장 아니었으면 사무실 전체가 창피당했을 거라고!”
“…….”
그의 말이 모두 맞았다. 연계된 모든 업체에 연락하고, 사과를 구해야만 했을 것이다. 다시 새로운 일정을 잡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협의를 거쳐야 할지 상상만 해도 까마득해지는 일이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했다. 분명 그래야만 했는데 마음속에 작은 목소리가 떠들기 시작했다.
‘그랬다 하더라도 뒷수습은 누가 했을까? 당신이 그런 귀찮은 일을 했겠어?’
평소에도 업체의 전화를 내키는 대로 대했던 조 부장이다. 그런 불편한 전화를, 그것도 희진이 잘못한 일을 수습하기 위해 연락하는 그의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만약 당신이 실수했더라도 같은 상황이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거다. 그녀는 한마디 불평도 하지 못한 채 그의 뒷수습을 하고 있었을 게 뻔했다.
“도대체 안 대리 밑에 사원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
‘불량한 네 근무 태도를 보고 밑에 직원들은 뭘 배우겠어?’
“…면목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신 차려! 몸이 안 좋으면 집에 들어가. 얼빠진 사람처럼 굴지 말고!”
‘당신이나 정신 차려! 실수에 얼씨구나 훈수나 두지 말고.’
말대꾸하는 속마음을 감춘 채 그녀는 자리로 돌아왔다. 깨질 듯이 아픈 머리가 다룰 수 없는 감정 때문인지, 으슬으슬한 몸 때문이지 구분할 수 없었다.
“안 대리, 몸이 안 좋으면 반차 쓰고 들어가 봐.”
점심을 먹고 자리에서 잠깐 숨을 돌리고 있었다. 따뜻한 꿀물을 책상 위에 놓으며 말을 건넨 사람은 김 차장이었다.
“아녜요. 제가 벌인 일은 마무리해야죠.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보다 조 부장이 아끼는 마음에 더 뭐라고 한 거 알지?”
평소 같으면 그냥 알았다고 했을 텐데 도무지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차장님…. 솔직히 모르겠어요.”
“모르겠으면 내 말을 믿으면 돼. 겉으론 저래 봬도 기대가 더 커서 그랬던 거야. 안 대리가 연차에 비해 월등히 잘 해내고 있다는 거 우리 팀에서 모르는 사람 없다고.”
“저는 그냥 보고 배울 것도 없는 얼빠진 사람인걸요….”
“그게 아니래도 그러네. 아닌척해도 몸이 안 좋아 보인다고, 여차하면 반차 쓰도록 해주라는 말을 조 부장이 먼저 꺼냈어.”
“…….”
김 차장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팀 내 불화를 방지하기 위해 꾸며낸 말이라고 보는 게 훨씬 설득력 있었다. 그런 희진의 표정을 읽었는지 김 차장은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는 마. 미움이란 감정은 많은 걸 가리고, 스스로를 괴롭히게 되니까.”
“안 대리, 내 자리로 좀 와봐.”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그, 희진을 부른 사람은 조 부장이었다.
“다름 아니고, 이거 복사 좀 해줘.”
두 발이 멈춰 서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손으로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서류 더미를 툭 건드렸고, 안경 너머의 시선은 휴대전화에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였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을 끈 것은 그게 아니었다. 휴대전화를 쥐고 있는 손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연기, 사무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너무도 당당한 자세에 외려 그녀는 얼어붙고 말았다.
“안 대리, 내 말 못 들었어?”
그의 손이 높게 쌓여있는 문서를 다시 건드렸다.
“이걸 전부요?”
“응, 전부.”
이야기하는 중에도 담배 연기가 계속해서 피어올랐다.
“…인쇄소에 안 맡기시는 거예요?”
“어. 컬러도 많은데, 그러면 단가가 많이 올라가잖아.”
‘돈은 아깝고… 내 시간은 아깝지 않아?’
“제가 해야 할 업무는요?”
“지금부터 이게 안 대리 업무야. 그러니 네 부, 순서 틀리지 말고, 그대로 해놔.”
손에 든 담배를 빨아들이더니, 그녀가 있는 쪽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사무실 안에서 담배는 뭐고, 저 태도는 또 뭐야?!’
화가 치밀었지만,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고작 저런 유치한 도발에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희진은 대답도 없이 책상 위에 있는 서류 더미를 품에 들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단점 리스트 제33조 그는 제정신이 아니다.’
며칠이 걸릴 것만 같던 복사는 생각보다 이르게 끝이 났다. 물론 퇴근 시간까지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고, 점심시간까지 자진 반납한 결과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저 빨리 복사 지옥에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회의실에 복사해 둔 서류를 한 번 더 확인한 후, 희진은 조 부장에게 보고했다.
“알겠어.”
그녀의 하루에 대한 대가는 세 글자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여전히 휴대전화를 향해 있었다. 그의 태도가 자꾸만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
‘됐어. 상관하지 말자. 빨리 자리로 돌아가자.’
“안 대리, 이거 내 신분증인데 등본 좀 떼와 줘.”
책상 위에 있던 신분증을 기다렸다는 듯이 희진에게 내밀었다.
‘기다려? 누굴? 나를?’
“네? 지금 저 더러… 부장님 등본을 떼오라고 하셨어요?”
“그래. 등본 몰라? 주민등록 등본. 동사무소도 어디 있는지 알 거 알잖아, 가서 떼오라고.”
“…….”
“뭐해? 좀 있으면 거기 문 닫아! 6시 전에 제출할 때가 있다고.”
조 부장은 대답 없이 서 있는 희진을 향해 소리쳤다. 한사코 바라보던 휴대전화에서 눈을 뗐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쳐 왔다. 그의 목소리에 김 차장이 달려왔다.
“부장님, 잠시만요. 나가서 저랑 따로 이야기하시죠.”
김 차장은 그를 타이르듯 말했고, 우뚝 서 있는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자신이 어떻게든 할 테니 자리로 돌아가라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지만, 희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주쳐 오는 조 부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콧잔등을 씰룩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 오만한 눈을.
“내가 지금 김 차장을 불렀나? 자리로 돌아가서 자네 볼일이나 봐.”
“부장님….”
“이참에 말해둬야겠어. 김 차장의 그 모호한 태도 때문에 사내 기강이 안 잡히고 있잖아. 내가 어려운 거 시켰어?”
조 부장은 발작 버튼이 눌린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애꿎은 김 차장을 걸고넘어졌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김 차장 너머에 있는 희진을 향해 있었다.
“봐! 근데 저기 서서 날 노려보고 있는 안 대리를 보라고. 이러다 상사 내려치겠어! 어?”
사무실이 떠나가라 크게 소리치는 그의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이곳으로 향했다. 그 순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세로 있는 김 차장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희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책상 위에 있는 신분증을 손에 쥐었다. 빤히 그를 바라보던 조 부장은 자리에 앉았다. 고요해진 사무실에 그녀의 심장 소리만이 시끄럽게 울렸다.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와 힘없이 내딛는 걸음걸이가 자꾸만 어긋났다.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서자 심장 소리에 온몸이 떨려왔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온 조 부장의 웃음소리, 그 소리가 빠르게 뛰는 심장에 꽂혔다.
희진은 뒤돌아섰고, 심장 소리에 맞춰 걸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그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해 입술을 움직이는 그의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이번엔 심장 소리보다 더 빠르게 걸었다.
쾅!!
희진은 두 주먹으로 그의 책상을 내리쳤다. 그 순간 요란하게 뛰던 심장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작은 소음으로 가득했던 사무실도 고요해졌다. 희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수 없었다. 그저 조 부장의 얼굴만 보일 뿐이었다. 그가 콧잔등을 씰룩이며 다시 말을 내뱉으려 했다.
“조.경.태. 씨”
이번에도 희진이 말을 가로채듯 먼저 꺼냈다.
“다시는 이따위 짓, 나한테 시키지 마.”
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희진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 말 같잖은 이유로 괴롭히는 당신보다 차장님께 배운 게 훨씬 더 많으니까.”
“야, 안희진!”
“한 번만 더 이런 짓 시키면, 신고해 버릴 겁니다. 똑똑하니 잘 아실 거 아녜요. 신고당하면 얼마나 피곤하게 될지.”
그녀는 손을 높이 들어 책상 위로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주먹 안에 들어있던 조 부장의 신분증이 구겨진 채로 책상 위에 떨어졌다. 희진은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다음은 각오하시라고요.”
분노가 가득한 조 부장의 얼굴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너- 너!”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희진은 시계를 바라봤다. 퇴근 20분 전,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챙겼다. 점심시간까지 반납했던 그녀에게 이 정도 조기퇴근은 정당해 보였다. 무어라 악을 쓰며 소리 지르는 조 부장을 향해 까딱 인사를 한 뒤 희진은 사무실 문턱을 넘었다. 여태 참았던 것에 비하면, 몇 마디 돌려주지도 못한 셈이었다. 그런데도 가슴이 후련했다.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허기가 밀려들었고, 사무실을 벗어나는 발걸음을 자꾸만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