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1

단골 손님의 방문

by 리을

“하암, 시도 때도 없이 졸린 걸 보니 봄 오긴 오나 보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아침, 걸레를 손에 쥐고 있던 남자가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190센티에 커다란 덩치를 가진 그가 손을 뻗어내자, 천장에 닿을 듯했다.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에 서글한 미소가 인상적인 그의 이름은 윤지웅. 덩치에 맞지 않는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지웅은 심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대학생인 그의 아르바이트 시간은 유동적이었다. 수업 시간이 가득한 날에는 저녁에 출근했고, 주말에는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오픈 준비를 했다. 들쑥날쑥한 출근 시간은 지웅이 원했던 것이다. 사장이 규칙적으로 나올 수 있는 시간을 정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학교에 있다가도 짬이 생기면 곧바로 가게로 왔다. 결국엔 자기 말을 들어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장이 포기했다. 만사를 귀찮게 여기는 그의 성격이 이럴 때는 꽤 도움이 됐다. 지웅은 그만큼 가게로 나오는 일이 재미있었다. 인센스 스틱을 보면서 몰랐던 향에 대해 알게 되는 것도, 가게를 청소하는 것도 즐거웠다. 무엇보다도 이곳의 사장인 류도현의 곁에서 그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기지개를 한 번 더 크게 켜고, 안쪽 방으로 향했다. 아는 사람들은 '안쪽 방'이라 부르는 공간은 매장에서 잘 보이지 않았다. 키가 큰 선반 사이를 돌아서면 좁은 복도가 있고, 복도의 끝에는 유리문이 있다. 가게에 자주 드나드는 손님도 이 문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 복도에 들어섰다 하더라도 하얀 커튼이 유리문을 가리고 있어서, 그 너머에 방이 있다고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몇 주 전 가게에 처음 왔던 손님이 이곳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봤을 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리문을 열자, 어두운 방 안에서 매캐한 향이 퍼졌다. 지웅은 익숙하게 안쪽 방 깊숙이 들어가 암막 커튼을 걷어내고, 창문을 모두 열었다. 밝은 햇살에 안쪽 방의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책상 위에는 풀 무더기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벽면을 가득 메운 서랍은 여기저기 빠져나와 있고, 소파 위에 담요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창고인지, 침실인지 그도 아니면 작업실인지 모를 이곳이 안쪽 방이다. 대부분은 사장인 도현이 인센스 스틱을 만들거나 향을 시험하는 공간으로 썼다. 가끔 드나드는 특별한 손님들을 맞이할 땐 응접실로 쓰기도 했다. 근신이라는 벌을 받긴 했지만, 지웅은 이곳에 올 다음 손님을 기다렸다. 어지러운 방을 대충 정리해 두고, 인센스 스틱 하나를 피웠다. 어느새 불을 붙이고, 흔들어 연기를 피우는 일에 제법 능숙해졌다. 그는 열었던 창문을 다시 닫고, 암막 커튼으로 어둡게 만들었다. 은은한 향이 퍼지는 걸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오픈 준비를 마쳤지만, 아래층에서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계산대 옆에 있는 작은 주방에 들어가 미닫이문 앞에 섰다. 그리고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아래로 향하는 좁은 계단이 있었다. 직선으로 뻗은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유리창이 하나가 있었다. 지웅은 소음을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 유리창 안쪽을 들여다봤다. 옅은 불빛이 한가운데 커다란 이젤을 비췄다. 잠시 뒤 그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은발의 남자, 도현의 모습도 어렴풋이 보였다. 그를 바라보는 지웅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아무런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웅은 다시 계단을 올라왔다.


딸랑-


“어서 오세요. 당신의 향기를 찾아드리는 가게, 심향입니다.”


물건을 정리하고 있던 지웅이 반사적으로 문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단정한 차림의 노부인이 서 있었다. 꼿꼿한 자세와 밝은 회색 톤의 바지 정장, 붉은빛이 도는 에나멜 단화까지 그 어떤 것도 '노부인'이라는 단어와 연상되는 것은 없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회색빛을 띠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짐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정한 회색빛 커트 머리가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은 어쩐지 도현의 은발과 닮았다. 테 없는 안경 너머로 마주친 눈동자는 따스해 보였다.


“손님, 혹시 뭔가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지웅은 말없이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잠시 놀란 눈을 하더니 이내 눈동자만큼 따뜻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에요. 오랜만에 왔더니 가게가 다르게 보여서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을 한 그녀는 매장 곳곳을 바라봤다.


“아, 혹시 단골이셨나요? 저는 얼마 전부터 이곳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윤지웅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반가워요, 지웅 군. 단골이라는 말이 마음에 드는군요. 잘 부탁해요.”


어쩐지 그녀의 미소에서 봄이 느껴졌다.


“그런데 혹시 류 사장은 이곳에 없나요?”

“사장님은 밑에서 작업 중이세요. 오랜만에 작업하는 모습이 어찌나 반가운지, 하루빨리 작품을 보-”


들뜬 아이처럼 말하던 지웅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평소 도현의 성격으로 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는 걸 좋아할 리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했네요. 요즘 그 작업을 훔쳐보는 게 저의 작은 즐거움인지라….”

“하하- 그거 좋네요. 작업을 훔쳐보다니 부러울 지경이네요. 류 사장의 그림 나도 무척 좋아했거든요.”


작업이라는 말을 단박에 그림으로 이해한 그녀. 의외의 반응에 놀랐지만 반가웠다. 이곳에서 도현이 작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만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게… 그림을 그리긴 해도 내놓지 않아서, 제대로 본 적은 없어요. 슬쩍 엿보는 게 다예요. 이전처럼 활동하면 좋을 텐데….”

“시간이… 필요한 거겠죠.”


노부인은 계산대 너머 걸린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벽면을 가득 채운 그 그림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듯이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 두 사람의 인연은 생각보다 깊어 보였다.


“미리 약속하신 거죠?”

“그렇긴 한데… 왠지 작업을 방해하고 싶지 않네요.”

“아니에요. 제가 얼른 가서 이야기하면 됩니다.”

“그냥 두죠. 오늘은 여유가 있거든요. 그보다 가게를 잠시 둘러봐도 될까요? 달라진 모습을 자세히 보고 싶네요.”


입방정에 일을 키운 것 같아 당황스러웠지만, 그녀의 태도에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노부인은 도현을 아끼는 듯했다. 저 그림을 바라보는 자세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편하게 둘러보시고, 제가 필요하면 편하게 불러주세요.”

“고마워요.”


노부인은 가게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가게는 정말 많이 달라져 있었다. 너저분했던 특유의 느낌이 사라졌다랄까? 분명 같은 공간임에도 훨씬 더 넓게 보였다. 길에 닿은 커다란 창가 쪽에는 티테이블이 들어섰고, 선반에는 상자들이 색깔별로 깔끔하게 진열돼 있다. 그리고 상자 앞에 놓인 손바닥만 한 쪽지에는 아기자기한 이미지와 문구가 담겨있다. ‘로즈메리-피곤한 당신에게 달콤한 위로를 전해요, 울창한 숲-깊은 나무 향이 마음의 평온을 줄 거예요.’ 다정한 문구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매장 한가운데 커다란 테이블에는 인센스 스틱이 피어올랐고, 그 앞에도 문구가 적혀 있었다.


「 오늘의 향기 : 벚꽃 - 차가운 바람에 봄 냄새를 맡았네요. 찰나와 같았지만, 그 냄새가 반가웠답니다. 어서 봄이 오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피웁니다. - 알바생 」


달콤한 냄새가 다정한 문구와 함께 봄 냄새로 바뀌었다. 노부인은 슬며시 뒤를 돌아 지웅을 바라봤다. 커다란 덩치의 귀여운 알바생은 콧노래를 부르며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알바생의 알 수 없는 노랫소리가 봄 냄새와 어우러졌다. 그 모습에 잠시 미소를 짓다가, 그녀는 커다란 선반 사이로 들어섰다.






한가했던 오전과 다르게 가게는 점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골목에서 눈에 잘 보이는 가게는 가끔 동네 사랑방이 되곤 했다. 거리를 지나던 주민들이 그곳에 모여들어, 먹을 것을 나눠 먹기도 하고, 커피가 아닌 꽃차를 마시며 향기를 나눴다. 그렇게 수다를 떨다, 자리를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하늘이 다른 색으로 물들었다.


“헉, 허억…. 못…어?”


뒷정리를 하고 있던 지웅이 이상한 소리에 돌아섰다. 두 손을 계산대 위에 올려두고, 고개를 숙인 도현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게, 평소에 운동 좀 하지 그랬어요. 계단이 몇 개나 된다고 맨날 이렇게 힘들어하세요?”

“못봤…냐고.”


도현은 지웅을 향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전히 고르지 못한 호흡 때문에 어깨가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네? 제대로 못 들었어요.”

“하아- 아무도 안 왔냐고. 나 찾는 손님 말이야!”

“형을 찾는 손님이… 아!”


가게를 보느라 노부인이 왔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의 탄식에 도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안쪽 방으로 옮겼다. 유리문 앞에서 크게 두어 번 숨을 내쉰 뒤 노크했다.


“네, 들어오세요.”

“차 원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었네요.”

“괜찮아요. 작업 중이었다면서요? 그렇다면 제가 기다려야죠.”


소파에 앉아 있던 차 원장이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가볍게 맞잡은 손에서 따뜻함이 전해졌다.


“가게가 아주 멋지게 변했던데요? 진작 와볼걸 그랬어요.”

“하아…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이 생겨서… 다 설명하기 어렵네요.”

“나무라는 게 아녜요. 이곳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차 원장의 말에 굳어있던 도현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그녀는 변하지 않은 것만 같았다. 여전히 따뜻한 말로 사람을 대했고, 그녀의 말에는 배려가 담겨 있었다.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어…. 실례하겠습니다. 저도 깜빡 잊고 말았네요.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열린 문틈으로 지웅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주전자와 찻잔이 담긴 쟁반이 들려 있었다.


“아녜요. 덕분에 편안히 쉬었어요.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안 했더군요. 나는 차정화라고 해요. 요 앞의 상가에서 작은 학원을 운영하고 있죠. 다시 한번 반가워요.”

“네, 반갑습니다.”

“뭘 멀뚱히 서 있어? 그만 나가봐. 퇴근해.”


쟁반을 내려놓고, 잠시 그녀와 눈을 마주쳤을 뿐이었다. 얼른 나가라는 도현의 말에 지웅의 눈에는 억울함이 번졌다. 물론, 시키지도 않은 차를 내온 지웅에게 다른 목적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단골손님의 정체가 안쪽 방을 드나드는 특별한 손님이었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도현은 지웅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가 말한 근신은 아직도 유효한 모양이었다.


“그럼, 원장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요. 잘 마실게요.”


도현은 주전자를 들고 찻잔에 기울였다. 고소한 냄새가 방안에 퍼졌고, 한 모금 마시니 입안 가득 따뜻한 기운이 맴돌았다.


“괜찮은 친구 같던데, 좀 친절하게 대해주지 그래요?”

“내쫓지 않은 것만 해도 아주 친절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하하, 역시 류 사장은 곁에 있는 사람에게 박하군요.”


말을 덧붙이지 않는 도현의 얼굴에도 잔잔한 미소가 퍼졌다. 아무래도 이곳의 변화가 가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듯했다.


“좀 어떠셨어요?”

“다시 반복되기 시작했어요. 반갑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복잡한 마음은 여전하네요.”

“그래도 한동안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그러게요. 그래서 더 혼란스럽네요. 아무래도… 끝나지 않으면, 언제고 반복되는 모양이에요….”


찻잔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그럼 준비되시는 대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지금, 좋아요. 바로 시작하죠.”


자리에서 일어난 도현이 안쪽 방의 조명을 최대한 어둡게 조절했다. 그리고 창문을 조금씩 열어두고, 조심스레 인센스 스틱을 피웠다. 하얀 연기가 방 안에 퍼졌다. 차 원장은 푹신한 소파에 온몸을 맡기며, 곁에 있던 담요를 덮었다. 그녀의 호흡이 금세 깊어졌다. 도현은 커다란 창문틀에 앉았다. 어둑어둑해진 하늘의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