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지 않는 얼굴
무기력함에 손끝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꺼져가는 몸을 무릎 사이에 넣고 간신히 허리를 세웠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이곳, 스르륵 잠들면 차라리 편해질 것만 같았다. 무얼 붙잡고 있었는지, 이렇게나 무거운 몸을 끌고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도로록- 톡. 무언가가 발가락을 건드렸다. 그 작은 감각에 밀려오던 졸음이 달아나 버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돌기둥이 장승처럼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기둥 사이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태껏 자신이 붙잡고 있었던 그 무언가라는 것을. 어떻게든 몸을 세우고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갈수록 뒷모습이 점차 또렷하게 보였다. 자신은 이 뒷모습을 따라, 오랜 시간을 걷고 또 걸었다. 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차올랐다. 손을 뻗어보지만, 닿지 않았다. 멈추지 않는 그가 야속했지만,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저 따라 걷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마저도 욕심이었던 걸까? 갑자기 뒷모습이 검은 형체로 변했다. 검은 형체는 고무풍선처럼 계속해서 부풀었다. 기괴하게 변해버린 모습이 안타까워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자꾸만 커지다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입에서 멋대로 신음이 흘렀다. 그녀는 쓰러지듯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은 형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을 뜬 차 원장은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며 거친 숨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심향에 다녀온 뒤로 꿈은 나날이 선명해졌다. 하룻밤에 두세 개의 꿈이 기억나기도 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처럼 밀려들었다. 깊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원의 짧은 방학이 끝난 오늘은 개강 준비로 바쁠 예정이었다.
일주일 만에 들어선 학원에서는 희미하게 먼지 냄새가 났다. 곧장 원장실로 향했다. 창문을 열고 책상에 가볍게 걸터앉은 그녀는 서랍에서 인센스 스틱을 꺼내 피웠다. 바람을 타고, 달큰한 냄새가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녀의 학원은 동네 5층 상가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 원장실 책상에 앉으면 자그마한 주택들이 들어선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학원의 위치를 이곳으로 하고 싶다고 말했던 건 그녀의 남편이었다. 봄이 오면 가로수에 핀 벚꽃이 멋지게 보일 거라며 환하게 웃었던 그. 그의 예측대로 봄마다 창밖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밤이 되면 가로등 불빛이 비치는 거리는 또 얼마나 멋지던지, 그리고 보란 듯이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은 또 얼마나 행복해 보였는지… 그녀의 얼굴이 씁쓸하게 굳어갔다. 가지만 앙상하던 나무에 올망졸망한 것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벌써 그가 떠나고, 네 번째 벚꽃이 피어나려 하고 있다.
남편은 그녀의 학원에 오는 걸 좋아했었다. 양손 가득 간식거리를 들고, 동네 할아버지처럼 아이들을 만났다. 동화 작가인 그에게 아이들은 영감 그 자체였다. 아니 그런 것들을 떠나서 그는 진심으로 순수한 영혼과 보내는 시간을 사랑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병세는 점점 짙어졌고,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다.
어느 날, 갖은 치료에도 아무런 말 없이 견디던 그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집밥을 먹고, 과자를 사 들고 학원에 가고, 작업실에 들르고 싶다고 했다. 의사에게 물었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잠깐의 일탈도 허락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상태는 위험했다. 그를 잃는 게 두려웠던 그녀는 의사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그의 얼굴에서 빛이 사라졌다. 아무 말 없이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작업실 열쇠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작업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작업실이라 부르긴 했지만, 이곳은 부부의 아지트 다름없었다. 주말이면 그녀도 이곳에 들러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두운 골목에 불도 켜지지 않은 작업실이 낯설었다. 문 앞에는 전단지가 어지럽게 쌓여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상자가 우뚝 서 있었다. 상자 위 송장에는 익숙한 남편의 이름이 보였다. 그녀는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앙상해서 볼품없어 뵈는 묘목 세 그루가 담겨 있었다.
‘여기 마당에도 벚나무를 심을 거야. 활짝 핀 꽃잎이 날리는 걸 여기서도 볼 수 있다면 좋겠어.’
묘목에 적힌 벚꽃이라는 팻말에 그의 말이 떠올랐다. 건강했을 당시의 그가 바랐던 작지만 아름다운 소망. 그녀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말도 없이 묘목을 준비했을 그를 떠올리다 내내 참고 있던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열쇠를 건넸던 걸까. 앙상한 가지를 붙들고 아이처럼 소리 내 울었다.
한참을 어둠 속에서 홀로 흐느낀 그녀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움직였다. 그날 새벽 그녀는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잠에서 깨어난 그에게 사진 몇 장을 보여줬다. 앙상하고 작은 묘목 세 그루가 나란히 작업실 마당에 심겨 있는 사진을. 그는 눈물을 가득 머금고 크게 웃었다. 그리고 흙 자국이 남아 있는 그녀의 손을 맞잡고 한참을 토닥였다. 작은 꽃망울이라도 보고 싶다고 말했던 그는, 결국 봄이 오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빈자리가 너무도 컸다. 함께 지냈던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도망치듯 이사를 하고, 그의 작업실도 정리했다. 텅 비어버린 하루에 학원은 그녀에게 유일하게 남은 일과였다. 하지만 더는 즐겁지 않았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살아갔다. 관성처럼 어제도 살아냈듯이 오늘도 그렇게 살아갔다. 남은 삶이 허무했지만, 돌이킬 방법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꿈속에서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꿈속에서도 볼 수 없었다. 그는 뒷모습으로 멀어지기만 할 뿐, 게다가 기괴한 모습으로 변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대체 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야…. 응?’
우웅- 휴대전화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오늘 밤 심향에 들러달라는 류 사장의 문자였다. 어쩐지 긴 하루가 될 것만 같았다.
딸랑-
“원장님, 어서 오세요.”
“지웅 군, 그동안 잘 지냈나요?”
늦은 밤, 심향의 문을 열자 지웅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만큼 밝은 미소에 하루 종일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듯했다.
“저는 무척 잘 지냈습니다. 혹시 드시고 싶은 차가 있을까요?”
“따뜻하기만 하다면 다 좋아요.”
“알겠습니다. 준비해서 곧 들어갈게요. 형은 안쪽 방에 있어요.”
차 원장은 안쪽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늦은 밤 안쪽 방의 분위기가 평소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커튼이 활짝 열린 창으로 가로등 불빛이 밝게 들어왔다. 불빛 아래 그리운 장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늑한 불빛이 쏟아지던 작업실, 그리고 뒤돌아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익숙한 뒷모습까지. 그 모두가 손만 뻗으면 닿을 듯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차 원장은 호흡도 멈춘 채 그를 바라봤다. 금세 사라질지도 모르는 그의 모습을 눈에 담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 순간 그가 등을 돌려 자신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시야는 자꾸만 흐려졌고, 기다렸던 얼굴이 눈물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두 손으로 눈물을 훔쳐내자, 그는 사라졌다. 아늑한 불빛의 작업실과 함께 흔적도 없이. 그리고 눈앞에는 도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차 원장님?”
“아… 류 사장. 잠시… 선 채로 꿈을 꿨나 봅니다….”
그녀는 창을 등지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지겹도록 그와 관련된 꿈을 꾸고 있었던 탓이었을까. 현실에서도 꿈을 꾼 것처럼 말도 안 되는 환영이 겹쳐 보였다.
“창을 좀… 가려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 보려 해도 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모습이 안개가 낀 것처럼 자꾸 뿌옇게 흐려지기만 했다. 차가운 공기에 달큰한 향이 실려 왔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점차 가라앉았고,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도현과 지웅이 보였다. 커튼이 가려져 어두워진 공간은 평소와 다름없는 안쪽 방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조금 전 상황을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안정을 찾은 듯한 그녀에게 도현이 물었다.
“못할… 것도 없죠. 가로등이 비치는 이곳은 남편의 작업실… 과 닮았어요, 아주 많이. 그리고… 창가에 서 있던 사람이 남편으로 보였어요. 그토록 그리던 얼굴을 보게 되는 줄 알았어요. 그랬는데… 그게 류 사장이었네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그녀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남편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 했죠.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올릴 수 없었어요. 자꾸만 머리가 복잡해져서… 꿈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건, 내가 그를 잊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까지 들었답니다. 그리워하는 건 진심일까? 그저 관성처럼 그립다고 되뇌는 건 아닐까? 잊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어서 나를 속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럴 리가 없어요. 연기라니요,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가만히 듣고 있던 지웅이 곁에 다가와 휴지를 건넸다. 자책하는 그녀의 말에 지웅은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꿈이 그녀의 현실마저 삼키려 드는 것처럼 보였다.
“저 녀석 말이 맞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게다가 현실에서 꿈의 조각을 발견했다면 더없이 좋은 징조입니다. 반복되는 꿈이 끝이 날 순간이 머지않았습니다.”
“…꿈을 함께 꿔서일까요? 어느새 이렇게나 가까운 사이가 됐군요. 고마워요.”
차 원장은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따뜻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희가 그동안 꿈에 드나들면서 실행해 보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불쾌할 수도 있고, 어쩌면… 원장님의 괴로움을 자극하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허락받고자 오늘 모셨습니다.”
조용히 도현의 말을 듣던 차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잊었나요? 나는 이미 내 모든 걸 보였어요. 그러니 어떤 일이 생겨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좋은 충격 요법이라고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들의 계획을 묻지도 않고 허락한 그녀는 심향을 떠났다. 그리고 남은 둘은 안쪽 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파를 한쪽으로 몰아두고, 가운데 테이블을 구석으로 치웠다. 남은 공간에 접이식 침대 둘을 펼쳤다. 혹시 모를 변수에 재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둘은 안쪽 방에서 함께 잠들기로 했다. 준비를 마친 그들은 불을 끄고 각자의 자리에 누웠다.
“형, 만약에요. 돌발 상황에 아무런 생각도 안다면 어쩌죠?”
어둠 속에서 지웅이 걱정스레 물었다.
“가만히 있어. 어차피 네게 거는 기대는 없으니까.”
“…너무해요.”
“말할 시간에 집중해. 시간이 늦어질수록 기회만 줄어들 뿐이야.”
“네….”
방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지웅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안쪽 방이 낯설게 느껴졌다. 의식은 점점 더 또렷해졌고,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도현은 기대가 없다고 말했지만, 작전에는 지웅이 필요해 보였다. 긴장감에 심장이 쓸데없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가까이에서 깊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담요를 머리끝까지 덮은 도현은 그 소리에 맞춰 잔잔히 움직이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에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지웅은 그를 향해 돌아눕고, 눈을 감았다. 천천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