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나무문 앞에 선 도현이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문 너머로 익숙한 무채색의 풍경이 펼쳐졌다. 며칠째 밝은 회색빛이던 하늘이 오늘따라 어두웠다. 착각이길 바랐지만, 피부에 닿는 공기마저 습했다.
“어쩌죠? 이러면 찾기 어렵잖아요….”
지웅은 하늘로 손을 뻗어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나는 어떻게든 찾아볼 테니까, 너는 알지?”
“네. 첫째 조용히 따라간다.”
“그리고?”
“둘째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소리쳐서 알린다.”
“좋아. 잊지 마라.”
도현은 지웅의 어깨를 툭 치고는 돌기둥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우뚝 솟은 돌기둥 사이에서 그는 그림자를 찾고 있었다. 지웅이 처음 꿈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검은 형상이 그림자라고 상상해 봤다. 그림자라면 이 무채색의 공간에도 빛이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끝없이 펼쳐진 것 같은 이 공간에 빛이, 방향이 존재할지도 몰랐다. 하염없이 바닥을 바라보며 그림자를 찾던 도현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나타난 비라는 변수에 계획이 꼬여만 갔다. 아무리 바닥을 들여다봐도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다.
'문이 열리자 포근한 봄 냄새가 났다.'
방향을 잃고 헤매던 그의 뇌리에, 문득 지웅의 말이 스쳤다. 어느새 굵어진 빗방울이 그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감고 후각에 집중하려 애썼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그 냄새를 기다렸다. 축축하고 비릿한 냄새 사이로 희미하게 달큰한 향기가 스쳤다. 도현은 그 향기를 따라 조심스레 다시 걷기 시작했다.
혼자 남겨진 지웅은 몸을 낮추고 차 원장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녀는 근처에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은 채 무기력하게 앉아 있다. 지웅은 바닥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들고, 그녀를 향해 던졌다. 돌멩이는 그녀의 어깨를 건드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던 차 원장은 이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김없이 그녀의 앞에는 남자가 걸어가고 있다.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드나들던 내내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던 비가.
남자의 뒷모습은 어느새 검은 그림자로 변했고, 덩치가 점점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차 원장은 그 그림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눈 앞을 가릴 정도로 거세게 내렸다. 거센 빗줄기에 차 원장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빗소리에 발소리를 감추고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
‘대체… 어떤 마음인 걸까?’
사무치게 그리운 감정을 지웅도 잘 알고 있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없다는 것만큼 매 순간 괴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의 모습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게 변해버린 형체를 쫓고 있는 건, 그리움이 아니라 집착에 가까워 보였다. 엉망진창으로 엉겨 붙은 사념이 제멋대로 그리움을 흉내 내고 있을 뿐이었다.
발뒤꿈치부터 한기가 온몸을 타고 올랐다. 바닥에 신발을 적실만큼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물은 눈에 띄게 차올라 순식간에 발목까지 잠겼다. 당황한 지웅이 주변을 살펴봤지만, 도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상황은 자꾸만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시선을 돌려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 순간 지웅의 눈에 이상한 게 보였다. 수면에 잠긴 그녀의 발아래, 검은 무언가가 살아 있는 듯이 꿈틀거렸다. 발끝에서 뻗어나간 그 무언가는 집채만 해진 검은 덩어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괴기한 형상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이 고개를 아래로 향했다.
“도현이 형! 저건 그림자도 뭣도 아닌 괴물이에요!! 차 원장님 집어삼킬 것 같다고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발만 동동 구르며 고민하던 지웅은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낚아채 달리기 시작했다. 물 밖으로 나온 그녀의 발끝에는 여전히 검은 무언가가 매달려 있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괴물도 따라왔다.
“형! 저 제멋대로 굴고 있어요. 지금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나중에 잔소리는- 으아악!”
거대한 괴물은 지웅을 덮치려는 듯이 그를 향해 몸을 내리쳤다. 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괴물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슬하게 피했지만, 바닥이 크게 흔들린 탓에 넘어지고 말았다. 괴물의 주변으로 돌기둥들이 힘없이 부서져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는 가루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가 빨리 일어나 달아나려 했지만, 품에 있는 차 원장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정강이까지 차오른 물에, 버둥거리는 그녀를 끌고 가기가 만만치 않았다. 머뭇거리는 사이 괴물은 어느새 지웅의 눈앞에 서 있었다. 자신을 덮쳐오는 괴물을, 그는 아득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멍청하게 서서 뭘 보고 있는 거야? 빨리 뛰어!”
“형!!”
“이쪽이야!”
어느새 나타난 도현이 차 원장을 버둥거리지 못하도록 붙들었다. 그리고 돌기둥 사이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방향을 찾았다랄까.”
그의 짧은 대답을 들은 지웅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도현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집중했다. 함께 걸어도 물살을 헤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차 원장의 발버둥은 점점 심해졌다. 하지만 도현이 이끄는 방향으로 걸을수록 괴물의 크기는 점점 줄어들었다. 폭우처럼 내리던 비도 잠잠해졌고, 바닥에 넘치던 물도 사라져갔다. 돌기둥 사이로 갑자기 밝은 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눈앞에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뒤를 바라보자, 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 원장을 붙들고 있던 손에 힘이 살짝 풀린 순간, 그녀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갔다.
“차 원장님! 잠깐만요!”
“정화야, 이리 와.”
왔던 길로 달려 나가던 그녀가 귓가를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돌아섰다. 빛이 밝게 떨어지는 공터의 한가운데, 익숙한 인영이 서 있었다. 그녀는 시리도록 눈부신 광경에 눈을 감았다. 눈꺼풀 위로 또 다른 풍경이 겹쳤다.
병실에 들어서려던 그녀는 얼어붙고 말았다. 몇 달째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던 그의 남편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듯한 그의 모습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정화야, 이리 와.”
남편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에 앉으라는 듯 자신의 침대 옆자리를 두드렸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광대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볼이 홀쭉했지만, 어쩐지 혈색은 돌아온 것만 같았다. 곁에 있는 의자에 앉으려고 하자 그가 다시 한번 침대 옆을 손바닥으로 두드려 댔다. 그녀는 못 이기는 척 그의 곁에 앉았다.
“오랜만에 정말 멋진 꿈을 꿨어. 들어줄래?”
함께 침대에서 눈을 뜰 때면 그는 종종 꿈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눈을 감아봐.”
그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 아주 멋진 여자와 데이트가 있는 날이었- 엇! 잠깐만 오해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봐. 다시, 다시. 아주 멋진 여자와 데이트가 있는 날이었어. 그냥 데이트가 아니라 기다리고 기다렸던 첫 데이트였지. 잔뜩 긴장하고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그녀는 나보다 더 긴장한 것 같더라고.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공원을 계속 걸었어. 그래도 너무 좋았어. 날씨가 정말 끝내줬거든.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 아래, 벚꽃이 정말 흐드러지게 펴있는 거야. 살랑하고 부는 바람에 꽃잎이 눈송이처럼 흩어졌지. 그 풍경에 눈을 떼지 못하는 그녀를 나는 넋을 잃고 바라봤어. 정 눈부시게 아름다웠거든. 그런데 그녀가 싸 온 도시락에 한 번 더 넋을 잃고 말았지. 거짓말 안 하고 그 김밥은 인생 최악의 맛이었어. 씹지 않고 삼키고, 맛있는 척 연기하느라 진땀을 뺐어. 하하하- 진짜 맛없었는데 꿈에서 깨니까 그게 그렇게 또 먹고 싶어지네, 이상하지? 』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가 눈을 감은 채로 눈물을 흘렸다. 그녀도 잘 알고 있는 그 이야기는 두 사람의 첫 데이트였다. 따뜻한 손이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때부터였나 봐. 내가 벚꽃을 좋아했던 게.”
“흠- 김밥이 싫어졌던 때가 아니고?”
“하하, 지금은 엄청나게 먹고 싶다니까 그러네.”
능청스럽게 웃는 그를 향해 그녀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그러니까 정화도 기억해. 봄은 반드시 돌아오고, 벚꽃은 해마다 아름답게 핀다는 걸 잊지 마.”
눈을 떴을 때도 인영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려 온 것만 같았다.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그는 그녀의 남편이었다. 단정한 모습으로 따뜻하게 웃고 있는 그는 건강해 보였다. 머뭇거리며 서 있는 그녀에게 그가 손짓했다. 그는 그랬다.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에도 흐트러짐 없이 앉아서 그녀를 불렀다. 언제나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던 사람은 그녀였다.
온 힘을 다해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 순간 따뜻한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그리고 곁을 둘러싸고 있던 돌기둥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다른 빛으로 변했다. 강한 바람이 멈췄을 땐 모두 커다란 벚나무로 변해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다시 한번 바람이 불어왔고, 꽃잎이 바람을 따라 두 사람을 감싸안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점점 사라져갔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 지웅은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옆에서 도현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숲에는 머리가 울릴 정도로 짙은 봄 냄새가 가득했다.
그리고 고요한 공간에 마치 천둥이 치는 듯이 커다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웅은 서둘러 들어왔던 문을 향해 달렸다. 도현도 그의 뒤를 따랐다. 벼락같은 검은 빛줄기가 하늘에서 떨어져 사방으로 퍼졌다. 거미줄처럼 하늘을 뒤덮은 빛줄기가 멈춰 섰고, 쩍-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 조각처럼 갈라졌다. 크고 작은 조각들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고막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바닥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가까스로 문에 다다른 지웅이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등 뒤에 도현은 없었다. 그는 먼발치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현이 형! 뭐해요, 빨리 와요!”
지웅이 있는 힘껏 소리치며 불렀지만, 그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끝에 종이가 팔랑거리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도현은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날카로운 파편 하나가 얼굴을 스쳤지만, 멈추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 닿은 종이를 움켜쥔 순간, 등 뒤로 커다란 파편이 떨어졌다. 충격에 쓰러진 도현은 손을 바라봤다. 손안에 든 빛바랜 종이는 그가 애타게 찾고 있던 것이었다. 도현이 엎드려 있는 바닥도 갈라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떨어져도 상관없어. 이것만 있으면-’
도현은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거센 힘이 몸을 일으켜 세웠고, 그를 잡아끌었다. 단단하게 도현을 붙잡아 세운 건 지웅이었다. 도현은 지웅에게 끌려가다시피 달렸다. 갈라지는 바닥을 밟고 아슬하게 문안으로 뛰어들었다. 둘은 문 너머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도현이 웅크리고 있는 지웅을 향해 소리쳤다.
“미쳤어? 너 저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왔어!”
“그럼 형은요? 형은 왜 거기에 서 있었던 건데요? 목이 터라 불렀는데 왜 대답도 없었냐고요!”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도현은 무너지는 꿈에서 반드시 문을 통해 나와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었다. 그랬던 그가 마지막 순간에 눈을 감았다. 모든 걸 포기한 듯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을 때, 지웅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 종이는 또 뭐예요?”
“…알 것 없어.”
“형!”
도현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도 하지 않고, 종잇조각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제대로 이야기 좀 해줘요. 저도 여기 엮인 사람이잖아요.”
“이건 내 개인적인 문제야. 다시 그런 순간이 온다면, 절대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경고야.”
“이유라도 알아야 납득을 할 것 아니냐고요!”
“납득할 필요 없어.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까.”
함께 꿈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지웅의 착각이었다. 도현은 손님의 부탁으로 자신을 꿈에 들였을 뿐이었다. 지웅은 속상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는 복도 반대편의 문을 열었고, 말없이 안쪽으로 사라졌다.
도현은 주머니에 넣었던 종이를 다시 펼쳤다. 잔뜩 구겨진 종조각에는 옅은 그림 자국이 보였다. 그는 이 조각을 포기할 수 없었다. 타인의 꿈에 드나들기 시작했던 것도 모두 이 조각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어.’
도현은 자그마한 거실에 있는 오래된 장식장의 서랍을 열었다.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린 서랍 안에는 그가 들고 있는 것과 비슷한 종잇조각이 몇 장 더 들어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서랍을 들여다봤다. 희미한 조명이 비추는 거실의 가운데 '꿈의 전실'이라 적힌 특이한 현판이 반짝였다. 서랍을 닫은 도현은 눈을 감았고, 그의 모습도 서서히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