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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5

샛노란 눈빛

by 리을

딸랑-


“어서 오세요. 차정화 원장님.”

“지웅 군! 반가워요.”


차 원장이 반갑게 웃으며 심향으로 들어왔다. 원래도 다정한 표정을 짓던 그녀였지만, 전에는 보지 못했던 명랑한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의 얼굴이 훨씬 편안하게 보였다. 마침 가게는 한가했고, 지웅은 그녀를 위해 따뜻한 차를 내왔다. 차 원장은 안쪽 방이 아닌 골목이 보이는 커다란 창문 앞에 앉아 있었다. 지웅은 그녀의 곁에 앉았고, 둘은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맞은편 골목에 크게 서 있는 벚나무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꽃망울을 터뜨리고, 하얀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둘은 말없이 차를 마시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차 원장님. 혹시 도현이 형과 오래전부터 알고 계셨나요?”


지웅이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물었다.


“음- 이곳에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제법 오래되었네요.”

“그럼… 도현이 형이 어째서 타인의 꿈에 들어가고 있는지 알고 계신가요?”

“류 사장이 말하지 않던가요?”

“네….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아요.”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환상적인 세계를 흥미롭게 거니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번 차 원장의 꿈속에서 명확히 알게 되었다. 그는 지나치게 무모했다. 종잇조각 하나 때문에 탈출을 포기하려 했었다. 무너지는 꿈에서 반드시 나와야만 한다고, 강조했던 그가 눈을 감은 채 일어나지 않으려 했다. 그토록 무언가에 필사적으로 구는 모습은 도저히 그저 흥미 때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주변을 걱정시키는 건 그의 타고난 성정인가 봅니다. 제게도 모든 걸 말해주진 않았어요. 그저 짐작하고 있는 바가 있을 뿐… 제가 섣불리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군요.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괜한 말을 여쭈었네요.”

“하지만… 분명 무리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곁에서 지켜봐 줘요. 마음 넓은 지웅 군이 조금만 더 이해해 줘요. 날이 서 있는 듯 보여도,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거… 알죠?”


차 원장이 지웅에게 눈을 맞춰왔다. 어째서인지 도현에게 서운했던 마음이 그녀의 말에 녹아내렸다. 지웅은 역시 그의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렇겠죠? 마음이 넓은 제가 이해해야죠. 엇, 그러고 보니 형은 오늘 가게를 비웠어요. 혹시 오늘도 약속이 있으셨나요?”

“아녜요. 오늘은 약속 없이 온 거예요. 그보다 잠시 저 문 너머에 가볼 수 있을까요?”


차 원장은 계산대 옆에 있는 작은 주방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분명 앉은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을 문을 향해 뻗은 손가락. 그곳은 도현의 작업실이 있는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있는 곳이었다. 워낙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있어서 대부분의 손님은 문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곳에 있는 마당을 잠시만 보고 싶을 뿐입니다.”


머뭇거리는 지웅에게 차 원장은 마당에 대해 말했다. 흔치 않은 구조에 대해 아는 걸 보면, 도현과 함께 드나든 적이 있었을 거라고 지웅은 생각했다.


“아닙니다. 아래층은 청소를 자주 안해서, 지저분할까 봐 망설였어요. 잠시 다녀오는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와 함께 아래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조심스레 밟고 내려와 마당 앞에 섰다. 황량하게 보이는 이 작은 마당에는 가느다란 나무 몇 그루가 심겨 있었다. 그 끝에 달린 올망졸망한 봉우리가 먼발치에 선 그녀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이곳에도 봄이 왔다.


“너무 휑하죠? 형은 도무지 관리에는 소질이 없다니까요. 무슨 나무인지 알아보지도 못하는 거 있죠?”

“그래도 올해는 꽃이 필 것 같군요.”

“원장님은 저 나무가 뭔지 아세요?”

“…그럼요. 벚나무네요. 예쁜 꽃송이가 터뜨려질 것 같은 벚나무.”


잠시 아무 말 없이 그곳을 바라보던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가볼게요. 고마워요. 류 사장에게도 안부 전해줘요.”

“안 만나고 가시려고요?”

“우리는 언제든 또 만날 수 있는걸요.”


돌아서서 가게를 나가는 차 원장에게서 꿈에서 느꼈던 봄 냄새가 나는 듯했다. 달큰한 냄새가 작은 골목에 가득했다.






# 꿈의 전실


지웅은 앞치마를 단단히 묶고, 얼굴에 두건을 둘렀다. 한 손에는 먼지떨이를 다른 한 손에는 걸레를 잡은 모습에서 왠지 모를 비장함까지 느껴졌다. 가볍게 먼저 떨이가 선반을 스쳤다. 폭죽처럼 하얀 먼지가 사방으로 퍼졌다. 두건 너머로 들어온 먼지에 연달아 재채기를 해댔다. 멈췄을 땐 애써 착용한 두건이 자신의 침으로 축축해지고 말았다. 두건을 벗어든 지웅이 넌덜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머리 위에 달린 현판을 바라봤다. ‘꿈의 전실’이라 적힌 이곳. 엔틱이라는 단어로 도저히 포장되지 않을 만큼 모든 가구가 낡았고, 나무 바닥은 발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무엇보다 지웅을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최소 몇 달, 아니 몇 년일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한 번도 청소하지 않은 것 같은 이곳의 청결 상태였다.


차 원장이 다녀가고 난 이후로 지웅은 꿈의 전실에 자유롭게 넘나들기 시작했다. 도현이 마주칠 때마다 인상을 구기긴 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 문이나 열지 말라, 저쪽 방은 건들지 말라, 가구도 함부로 뒤지지 말라 등의 잔소리 듣기는 했지만, 늘 듣던 ‘나가라, 꺼져’와는 달랐다. 그것은 불편한 허락이었다. 애초에 기대치가 낮았던 지웅은 쫓겨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의 역할은 심향에 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떻게 여기도 이렇게 더럽냐고!”


메아리도 없는 작은 공간에는 뽀얀 먼지만이 폴폴 날고 있다. 크게 한숨을 내쉰 그는 두건을 탈탈 털어 쓰고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이곳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너덧 걸음이면 막다른 벽에 닿는 짧은 복도. 이곳에 바로 꿈으로 향하는 문이 있다. 복도에는 양쪽으로 서로 성격의 문이 존재했다. 오른쪽 벽에는 언제나 같은 모습의 낡은 나무문이 있는데, 이는 꿈의 전실로 드나들 때 사용했다. 이곳에서 볼일을 끝낸 지웅이 자신의 꿈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오른쪽 문을 넘어야 했다. 왼쪽 벽에는 특별한 손님의 꿈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는 곳이다. 하지만 오른쪽과 달리 왼쪽의 문은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했다. 모양도, 재질도 그때그때 다른 모습을 띠었다. 차 원장의 꿈이 끝나고 난 뒤 문은 사라졌고, 현재는 그저 단단한 벽만 보일 뿐이다. 호기심에 두드려 봤지만, 딱딱한 벽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 번째는 이곳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방으로 도현이 암실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가끔 꿈을 드나들 때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그리고 이곳에서 직접 찍은 사진을 현상했다. 문 근처에도 얼씬하지 말라는 도현의 엄포가 있었던 곳이기에 그냥 지나쳤다.


마지막은 ‘꿈의 전실’이라는 현판이 걸린 거실. 자그마한 주방이 딸린 그 공간에는 낡은 가구들이 있다. 손가락으로 쓸어보니 먼지가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지웅은 벽에 걸린 사진을 먼지떨이로 살살 털어냈다. 흑백 사진에는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 담겨 있었다. 그는 자연스레 도현의 작품이 떠올랐다. 그는 꿈에서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린다고 했던 작가였다. 여전히 가끔 그림을 그리는 듯했지만,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사진만 바라보다 뒤돌아섰다.


“왜에에옹!”

“으아악!”


물컹한 무언가가 발에 밟혔고, 날카로운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발아래는 검은 고양이가 털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분노로 번뜩이는 샛노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으아- 미안, 미안. 전혀 못 봤어.”


고양이를 향해 손바닥을 펴고, 머리 위로 팔을 들었다.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무해한 자세였다. 한참을 움직임도 없이 노려보던 고양이가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그러고는 모서리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긴장이 풀린 지웅이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슬쩍 다시 바라보니 녀석은 편안한 자세로 앞발을 핥고 있었다.


‘흐아…. 어째서 여기 고양이가 있는 거야? 지난번엔 못 봤는데, 형이 키우는 건가?’


세상 귀찮은 표정으로 살고 있는 도현이 고양이를 키운다고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최대한 고양이와 먼 곳부터 청소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청소하는 내내 고양이가 주변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닦아낸 바닥 위를 뒹굴거나, 먼지를 털어낸 가구 위를 걸었다. 마치 자신의 공간을 얼마나 잘 치우고 있는지 확인이나 하는 것처럼.


“청소 끝!”


만족할 만큼 청소를 해두고 나니 입에서 하품이 새어 나왔다. 말끔해진 꿈의 전실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뿌듯함에 웃음이 번졌다. 청소도구를 정리하고 문으로 나가려는 찰나, 다리에 무언가가 느껴졌다. 검은 고양이가 꼬리를 살랑이며 두 다리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허리를 굽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손끝에 녀석의 털이 닿았고, 움찔하는 느낌이 고스란히 손에 전해졌다. 하지만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비벼댔다. 한 손에 들어오는 동그란 머리부터 꼬리까지 쓱 훑어 내렸다. 부드러운 느낌에 기분 좋아졌다. 조금 더 쓰다듬고 싶었지만, 하품이 자꾸 새어 나왔다. 아쉽지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안녕, 다음에 또 만나.”


고양이가 답하듯 귀엽게 울었다. 가만히 앉아서 문을 열고 나가는 그를 지켜보고 있던 고양이의 한쪽 입꼬리가 기괴할 정도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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