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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2

흐린 하늘 아래 우뚝 솟은 돌기둥

by 리을

가게를 정리하며 퇴근 준비를 하고 있던 지웅은 희미한 신음 소리에 멈춰 섰다. 움직임을 멈추자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어느새 안쪽 방이 있는 유리문 앞에 닿았다. 그는 문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형, 저 지웅이에요. 괜찮으세요?"


안쪽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착각이었는지 의아해하던 순간, 문 너머로 다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지웅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소파에 누워 담요를 덮고 있던 차 원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원장님, 원장님!"


지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창가에서 눈을 감고 있던 도현이 벌떡 일어나,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의 인기척을 듣고 지웅이 다급하게 물었다.


“형! 어떻게 해요?”

“계속 불러. 담요를 내리고, 흔들어서 깨워.”


지웅은 그녀의 목 부근에 걸쳐진 담요를 끌어 내렸지만, 차 원장의 손이 이를 막았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담요를 끌어당겼다. 온몸이 굳어 있는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차 원장님! 차정화 원장님!”

“흐으읍!”


비명을 속으로 참는 듯한 소리와 함께 팔 하나가 지웅의 어깨를 가로질렀다. 맑은 안경알 너머로 커다란 눈동자가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그녀의 팔을 덥석 안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미끄러져 내리는 팔을 지웅이 고쳐 잡았다. 거친 숨을 토해내던 그녀의 호흡이 점차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괜찮아요. 저 때문에… 놀랐죠?”

“아닙니다. 익숙한 일인 걸요.”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웅의 어깨를 쳤다. 지웅도 단단히 붙잡고 있던 그녀의 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원장의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했다. 그녀는 천천히 자세를 고쳐 앉았고, 차갑게 식은 차를 마셨다. 모두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도현은 차 원장의 맞은편에 앉았고, 지웅은 둘 사이에 서 있었다. 그녀는 목을 몇 번 가다듬더니 정적을 깨고 말을 걸어왔다.


“지웅 군에게 못난 모습 보이고 말았네요.”

“저 친구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언제부터 그런 모습으로 나왔던 겁니까?”

“그 꿈을 다시 꾸게 된 건, 2주 정도 되었어요. 또 반복되는구나 하고만 있었는데, 이렇게 놀랄만한 장면이 나왔던 적은 없었어요. 저도 그런 모습은… 처음 보는요….”


도현은 곁에 서 있는 지웅이 신경 쓰였다. 나가라는 눈짓을 몇 번 건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 원장에게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래도 언제나 그리운 마음이 강했는데, 오늘은 기괴하다고 느껴졌어요. 그래도 차마 도망갈 수는 없었어요….”

“실례합니다만, 저도 원장님의 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서 있던 지웅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가 낄 자리가 아니야.”

“하지만 저도 이 자리에 있었는걸요. 오래도록 반복된 꿈이라면, 새로운 시각이 필요할 수도 있잖아요.”

“윤지웅!”


도현이 화를 내며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처음은 호기심이었지만, 꿈에서 깨어났을 때 마주친 차 원장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할 수 있다면 돕고 싶었다. 도현의 갖은 눈치에도 계속 버티고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안쪽 방이 사람을 불러들이기도 한다고 말했던 건 형이에요. 만약 이게 우연이 아니라면요? 제가 필요해서 그런 거라면요!”

“죄송합니다, 차 원장님. 이 녀석이 호기심에 욕심을 부리네요. 잘리기 전에 나가!”


꼿꼿하게 서서 말대답하던 지웅이 움츠러들었다. 차 원장은 그를 바라봤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보였던 건 지웅의 눈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자신의 팔을 다잡아 주었다. 그의 말대로 우연이 아닐지도 몰랐다.


“좋아요. 지웅 군도 같이 이야기 나누도록 해요. 왠지 나도 믿어보고 싶군요. 이 안쪽 방의 인연을.”

“감사합니다. 원장님! 제가 열심히 할게요.”


넙죽 허리를 숙여 인사하더니 도현의 옆에 보란 듯이 앉았다. 곁에서 해맑게 웃는 지웅의 얼굴을 바라보는 도현의 눈빛에 어둠이 비쳤다.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온 한숨을 삼키며, 그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었다. 눈앞의 차 원장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표정했다. 때문에 그 복잡한 눈빛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아주 오래전 이야기부터 꺼내야겠군요. 저는-”

“원장님, 말하지 않는게 좋을 듯합니다. 새.로.운 시각이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낫죠.”


지웅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옆에 앉은 도현을 바라봤다.


“사연을 들으면 분명 비슷한 시선이 될 겁니다. 굳이 그런 사람이 더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하, 류 사장 말이 너무 거칠어요. 하지만 그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사연을 모르는 시각이 더 필요할 것 같군요."


지웅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차 원장이 말하려 했던 ‘아주 오래전 이야기’는 며칠이 아닌 몇 개월도 아닌 몇 년에 걸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도 복잡하고 심오한 사연이 담겨있을 것이다. 그 서사가 막 펼쳐지려던 그 순간, 도현이 막아 세웠다. 그것도 지웅이 했던 말을 보란듯이 빗대면서.


“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잘 부탁드릴게요.”


잔뜩 풀이 죽은 지웅의 대답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심향의 기분 좋은 변화가 자신과도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 바닥을 닦던 지웅이 멈춰서서 하품했다. 눈꼬리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역시 춘곤증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차 원장과 만난 후로 지웅은 밤마다 그녀의 꿈에 드나들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은 그 어느때 보다 길었지만, 도무지 잠을 잤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도현은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지웅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잔소리는커녕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 차 원장 앞에 제멋대로 나선 일로 화를 내는 모양이었다.


‘퉁명스러움에 뒤끝까지 있을 줄이야….’


그렇게 날이 선 도현과 밤새 꿈속에서 헤맨 것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타인의 꿈은 선명했고, 언제나 잠이 부족한 상태였다. 지웅은 꽃무늬 앞치마 주머니에서 작은 노트를 꺼내 들었다. 삐뚜름한 글씨가 가득 담긴 노트는 꿈을 기록하는 공간이었다. 꿈은 잔상이 남을 정도로 선명했지만, 일어나면 또 금세 날아가 버리곤 했다. 그래서 예전에 도현이 알려주었던 방법을 쓰기로 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꿈을 기억나는 대로 두서없이 적었다. 몽롱한 기운으로 쓴 탓에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제법 상세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지웅은 지난 일주일간의 기록을 빠르게 훑었다.


달칵,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노트를 재빨리 주머니로 숨겼다. 도현이 방금 일어난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또 안쪽 방에서 잠을 잔 모양이었다.


“일어나셨어요? 커피라도 한 잔 드릴까요?”


도현이 대답 없이 그의 옆을 지나 주방으로 향했다.


“죄송해요…. 다음엔 그렇게 나대지 않을게요. 근데… 상황이 그랬잖아요. 괴로운 소리가 들려오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퇴근해야 했던 거예요?”

“…누가 뭐래? 가게 정리되면 안쪽 방으로 와.”


물 한 잔을 들고 유유히 사라지는 그를 지웅은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무뚝뚝함은 류도현의 기본값이었다. 괜히 혼자 속을 끓였던 것 같아서 묘하게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어땠는지 느낌을 좀 말해봐.”


방에 들어서자마자 도현이 물었다. 주어를 빼고 말하긴 했지만, 차 원장의 꿈을 묻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단… 단조로웠어요. 배경도 그렇고, 등장하는 인물도 몇 없었고. 마지막 장면에 좀 놀라긴 했는데….”

“했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편하게 말해. 둘밖에 없으니까.”


그의 말대로 당사자인 차 원장은 이곳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며칠 간의 꿈이 머릿속에 엉켜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여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그러면 어제 가장 기억나는 것부터 말해봐.”

“음… 어제는 단연 커다란 그림자가 나왔던 마지막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죠.”

“그럼 그 꿈,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나는 대로 전부 말해.”

“전부…요?”

“그래. 인물, 공간, 색감, 사물, 감정까지 전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면 더 좋고.”


‘내내 옆에서 같이 봐놓고는 굳이 말해보라니….’


지웅이 머뭇거리며 앞치마에서 작은 노트를 꺼내 펼쳤다.


“그게… 형이 그때 말해준 방법으로 적어본 노트인데요. 보면서 해도 될까요?”

“상관없어. 시작해.”


『 문이 열리자 포근한 봄 냄새가 났다. 하지만 눈앞의 모든 풍경이 무채색이다. 회색빛 하늘 아래 돌기둥이 빼곡히 서 있다. 키를 훌쩍 넘는 크기의 돌기둥은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제멋대로 생겼다. 마치 비석 같았다.

비석 사이로 검은 원피스를 입은 차 원장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굳어 있다. 멍하니 바닥을 보다 갑자기 주저앉았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고 한참 가만히 있었다. 잠이 들것만 같아서 기지개를 켜다 발밑에 있던 돌을 찼다. 돌이 하필이면 차 원장에게 굴러갔고, 형에게 머리를 맞았다. 다행히 그녀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고,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며칠째 꿈 속에서 한 남자의 뒷모습을 쫓고 있다.


- 어째서 앞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까?


내내 그녀를 따라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어떤 사람인걸까. 순간 앞모습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 말리려는 듯 옷을 잡아당겼지만, 멈추지 않았다. 비석 사이를 달리며 남자의 위치를 확인했다. 남자를 먼저 앞질러 가서 보이지 않게 숨어 있으려고 했다. 거의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따라잡은 순간, 갑자기 남자의 몸이 검은 덩어리로 변해 부풀어 올랐다. 비석보다 커진 덩어리는 거대한 그림자 같다. 그림자의 팔이 차 원장을 향해 움직였다. 놀라서 그곳으로 뛰어가려는데, 형에게 붙잡혔다. 남자의 뒤를 쫓던 차 원장은 커다란 그림자를 보고 가만히 서 있다. 멈춰서서 신음을 흘렸다. 그러다 차 원장과 그림자가 사라졌다.


“그때 무슨 생각으로 뛰어갔던 거야?”

“…남자의 앞모습이 중요한 힌트라고 생각했죠.”


도현은 지웅이 이야기하는 내내 무언가를 끄적였다. 그러다 그의 대답에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눈빛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호기심 때문에 남자의 얼굴을 보려 했다는 사실을.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럼 검은 덩어리를 왜 그림자라고 표현한 거야?”

“음…. 머리와 어깨 구분만 있는 뭉툭한 형체는 그림자를 닮았으니까요?”

“…그래. 그러면 그림자를 보고 쫓아가려 했던 이유는?”

“손을 뻗는 게 위협적으로 느껴졌어요. 차 원장님이 위험하다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그만….”


어쩐지 자신의 대답에 도현의 표정이 자꾸만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하… 하하. 죄송합니다.”

“됐고, 이상했거나 의구심이 들었던 걸 말해봐. 멍청한 생각도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하라는 거죠? 음… 일단 무기력한 차 원장님이 이상하죠. 표정도 굳어서 현실과는 너무 달랐고, 걸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도현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걷는 모습도 마지못해 움직이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또 그림자와 마주했을 때도 마찬가지죠. 보통 기괴한 게 다가오려 하면, 소리를 치거나 달아나잖아요? 삼켜지려고 하는데 가만히 서 있는 것도 무기력한 대응이죠.”

“삼켜진다….”


지웅의 말대로라면 '그림자에 삼켜진다'라는 문장이 완성된다. 도현은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실마리가 좀 잡혀요?”

“아직 뒤죽박죽이야. 그리고… 아까 맨 처음에 말했던 봄 냄새는 뭐였어?”

“형은 못 느꼈어요? 저는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느꼈어요. 물론 눈앞의 풍경과 완전히 다르긴 했죠.”


도현은 여태껏 그 꿈속에서 그런 냄새를 맡아본 적은 없었다. 그의 말대로 눈앞에 풍경은 오히려 차가운 겨울에 가까웠다.


“역시… 바보 같았나요?”

“아냐, 그 냄새에… 집중해 봐.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비석이랑 그림자 의미를 내일까지 상상해 와.”

“상상이요?”

“그래, 이번에야말로 바보 같아도 좋으니까. 너답게.”

“거참… 아무리 저라도 상처받는답니다.”


도현은 언제나처럼 대꾸 없이 안쪽 방을 나갔다. 그를 바라보는 지웅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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