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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가게와 특별한 손님-4

악몽의 엔딩과 현실

by 리을

“허… 이게 뭐야.”


어두운 방, 침대 위에서 희진이 눈을 떴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 봤지만,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열 손가락을 펼쳐 허공으로 내밀었다. 두 손바닥에는 조 부장의 책상을 내려쳤던 감촉이 생생했다. 도무지 꿈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 각오하라는 말을 내뱉었던 입안에도 그 울림도 채가시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표정이 망막에 또렷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허기가 몰려왔다. 후련하게 사무실을 벗어나던 때처럼.


삐삐삐-


예상치 못한 알람 소리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놀란 눈동자가 황급히 시계로 향했고, 다행히 출근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안심한 뒤에야 보이는 '토요일'이라는 세 글자. 그제야 지난주 주말 출근에 맞춰뒀던 알람이라는 게 떠올랐다. 허탈함을 애써 감추며 다시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쉬는 주말, 늦잠이라는 사치를 부리고 싶었다. 이리저리 뒤척여 보지만 이미 멀리 달아난 잠은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눈치도 없는 배는 도무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꼬르륵거렸다. 어쩔 수 없이 희진은 이불을 벗어났다. 차가운 공기에 잠시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몸이 이상할 정도로 개운했고, 내내 그녀를 괴롭히던 두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냉장고 앞에서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가벼운 운동복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집 밖을 나섰다.


여전히 하늘은 깊은 밤처럼 어두웠다. 뺨에 와닿는 공기가 시렸다. 양말도 없이 슬리퍼만 신었던 발에도 칼바람이 고스란히 닿았다. 움츠린 채 부지런히 움직이던 희진은 프랜차이즈 햄버거집 앞에서 멈춰 섰다.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이곳의 모닝 세트가 먹고 싶었다. 시간이 귀한 평일에는 상상도 못 했고, 출근을 일삼던 주말에도 마찬가지였다. 금세 따끈한 햄버거와 커피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햄버거를 덥석 베어 물었다. 급하게 허기를 달랜 뒤,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어슴푸레했던 하늘이 어느새 훤히 밝아져 있었다.


간밤에 꾸었던 꿈이 불쑥 다시 떠올랐다. 진상에 진상을 부리는 조 부장에 맞서 반말을 내뱉은 꿈속의 안희진. 상상도 못 해 본 풍경에 기분이 복잡했다. 속이 시원하면서도 어쩐지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희진도 알고 있었다. 조 부장이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지각을 밥 먹듯이 하고, 억지를 부릴 때가 많긴 해도, 분명 제 몫을 하는 사람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에게는 배울만한 좋은 것들이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그가 이토록 미워졌던 걸까.


'미움이란 감정은 많은 걸 가리고,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하니까.'


김 차장의 말이 식은 커피처럼 쓴맛을 내며 입안을 맴돌았다. 그의 말대로 단점 리스트까지 만들며 괴롭혔던 것은 자기 자신이었을까? 진짜 변해버린 건 '조 부장'이 아니라 '안 대리'였던 걸까?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한 질문에 시끄럽던 머릿속이 고요해졌다. 그녀는 식은 커피의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기보다도 따스한 햇살이 발등 위로 느껴졌다. 분명 내일도 지각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어김없이 단점 리스트를 펼치고 싶어질 터였다. 하지만 현실을 넘나들며 희진을 괴롭힌 지독한 괴물은 꿈속에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만에 하나, 혹시라도 그 괴물이 현실에 등장한다 해도 괜찮다. 멋지게 한 방 날려 줄 힘이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으니까.


'그래, 이제 그만 생각하자.'


그녀는 느릿한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저 멀리서 담배 향이 날아와 코끝을 스쳤다. 불친절한 그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 잔향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녀가 잠들기 전에 피웠던 인센스 스틱처럼.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조 부장은 자리에 앉아 희진이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얼떨떨하게 벌리고 있던 입이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랍에서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렀고, 다른 한 손으로 콧잔등을 무겁게 누르는 안경을 벗었다. 울렁거리던 시야가 맨눈이 되자 앞이 또렷하게 보였다. 천장에서 종잇조각 하나가 팔랑이며 책상 위에 떨어졌다. 그는 재빠르게 조각을 움켜쥐고 주머니에 넣었다.


"와- 정말 굉장하네요. 저는 이번에도 실패하는 줄 알았어요."


구석에 있던 덩치 큰 남자가 다가와, 조 부장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말했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조 부장은 그를 힐끗 올려다봤다. 그리고 웃고 있던 남자의 옆구리를 가볍게 쳤다.


“밑에서 있으라니까, 왜 올라왔어?”

“저도 궁금하니까요. 또 알아요? 제가 나중에 엄청난 도움이 될지?”

“아서라. 가뜩이나 덩치도 큰데, 욕심부리지 마.”


남자는 그의 말에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조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희진이 빠져나간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걸었다. 덩치 큰 남자가 그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 고요했던 사무실에 형광등 불빛이 불안하게 깜빡였다. 번갈아 가며 하나둘이 깜빡이더니, 이내 전부 꺼졌다. 어둠 속에서 발 딛고 있는 바닥도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위태로운 공간 속, 두 남자 외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 부장은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고, 그 내부는 불이 꺼져있었다. 망설이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자, 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자 꺼져있던 불이 번쩍이며 켜졌고, 옆에 있던 거울에 두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하나는 덩치가 커다란 남자, 다른 하나는 조 부장이 아닌 마른 체격의 은발을 가진 남자. 다시 불이 꺼졌다.


"근데 왜 하필 그걸 골랐을까요? 담배 냄새라고 오해까지 할 정도였으면서…."

"그 제품의 이름 봤어?"

"The Reversal, 반전…이었잖아요."

"스모키한 향의 반전이지. 타오르는 냄새 뒤에 숨겨진 다른 냄새를 맡았을지도."

"오, 뭔가 의미심장하고 멋진 말인데요?"

"…정신이나 바짝 차려. 여기 곧 사라질 테니까."


어둠 속에서 의미 모를 말을 주고받던 사이,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도착했다. 주차장으로 보이는 이곳도 불안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은발의 남자가 달리다시피 앞장섰다. 그는 주차장 구석으로 향했다.


쾅, 콰광!!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소리에 뒤따르던 남자가 우뚝 섰다. 시선 먼 곳에 있던 천장이 산산조각 나듯이 부서지고 있었다. 커다란 굉음이 연달아 울렸고,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바닥은 흔들렸다.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날리는 먼지 때문에 난생처음 맡아보는 냄새로 숨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시각, 촉각, 후각 그리고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동물의 감각까지 그 모두가 너무도 선명했다. 도무지 꿈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야, 윤지웅!!”


굉음을 뚫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시선을 돌려보니, 앞서가던 은발 남자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화들짝 놀란 지웅은 급하게 주차장 구석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 끝에 허름한 문이 하나 열려 있었다. 마지막까지 건물을 지탱하던 기둥이 기울어졌고, 딛고 있던 바닥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몇 걸음 남지 않은 거리에서 지웅은 슬라이딩하듯이 열린 문으로 온몸을 날렸다.


“와… 아슬아슬 세이프.”


문 안쪽으로 들어온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너져 내리고 있는 밖과는 다르게 안쪽에서는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 진짜 정신 안 차릴래!”


은발의 남자가 그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엎드려 있던 지웅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남자가 서 있는 곳은 짧은 복도였다. 복도는 아담한 거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오래돼 보이는 가구 사이로 ‘꿈의 전실’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윽… 죄송해요. 너무 생생해서 잠시 넋을 잃었나 봐요…. 다신 안 그럴게요."

“당분간 근신. 꿈에 들어오는 건 그만하도록 해.”

“아, 형-”

“사장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지!”

“에이, 꼭 기분 나쁘면 그렇게 말하더라. 도현이 형- 잘못했어요. 근신만은!”


두 남자는 문과 멀어져 꿈의 전실로 향했다. 한편, 무너지는 주차장에서 꼿꼿한 자세로 누군가가 서 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두 사람을 지켜보는 그는 김 차장이었다. 언제나 선한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딱딱하게 굳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의 눈동자가 점점 샛노랗게 변해갔다. 잠시 뒤, 커다란 굉음과 함께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낡은 문 너머는 새까만 어둠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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