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웨이 12주차
친구들은 무슨 바람이 들었냐며 걱정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몇 년 만에 휴가를 떠난다. 길을 걷다가 박물관 상점에 불쑥 들어가 물건들을 구경한다. 스쿠버다이빙 신청서를 작성하고 토요일 아침마다 깊은 물 속에 잠기겠다고 다짐한다.
이 모든 활동이 정신줄을 놓는 것일 수도 있지만 영혼줄을 붙잡는 것일 수도 있다. 삶은 그 자체로 아티스트 데이트가 되어야 한다. 그게 바로 우리가 창조된 이유다. -아티스트 데이트 318p-
문득 홀로 훌쩍 떠나고 싶었다.
주말에는 이미 정해진 일정이 많았다. 가족 행사까지 지나려면 한 달 넘게 기다려야만 했다.
그냥 가볍게 평일에 가볼까?
퇴근하자마자 갔다가 다음날 바로 출근해도 되잖아?
물론 그래도 된다.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을 만큼 합리적인 물음에, 순식간에 상황이 달라졌다. 달력 위에는 파랗고 빨간날보다 검은 날이 훨씬 더 많았다. 고로 언제든 떠날 수 있었다. 내가 정하기만 한다면!
일정을 보니 11월 넷째 주가 눈에 띄었다. 다섯 개의 검정 숫자 아래는 어떤 글자도 없이 깨끗했다. 게다가 운명처럼 남편의 당직이 수요일에 잡혀 있었다. 어차피 혼자 있을 날, 다른 곳에서 홀로 보내고 온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럼, 어디로 가지?
대단히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질문이다. 이 질문을 넘지 못해 계획 자체가 무산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어디든' 떠나고 싶다는 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자유로운 상황은 외려 그 '어디'를 정하지 못하는 모순에 빠지게 만든다. 가능성이 너무 커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그 모순에. 고로 충동성이 높은 나도 이 순간만큼은 계획적인 사람처럼 굴 필요가 있다.
'뭘 하고 싶은데?'
푹 쉬고 싶기도 하고, 호캉스? 그런 거 안 해본 것 같아. 낯선 카페에서 글을 쓰고 싶기도 해. 그리고 경치 좋은 곳을 달려도 좋고! 요즘 날씨도 좋잖아? 가을 정취를 느껴도 좋고, 아! 읽던 책도 있잖아. 그 책도 읽고 싶어. 그러고 보니 그때 템플스테이 참 좋았는데, 혼자 가도 고즈넉하고 좋을 것 같지 않아?
갖고 싶은 게 많은 어린아이처럼, 와르륵 쏟아지는 생각에 아득해졌다가 홀로 웃었다. 그래도 좋았다. 하고 싶은 걸 만들 필요 없이 골라내기만 하면 되니까. 먼저 키워드 몇 가지를 골라냈다. 낯선 곳, 쉼, 약간의 계절감. 그리고 퇴근 후 내게는 15시간밖에 없었다. 그 시간 안에 자고, 먹고, 쉬기까지 하려면 물리적으로 먼 곳은 어려웠다. 템플스테이도 멋진 계획이었지만, 그곳에는 입실과 퇴실 시간이 엄격했다. 평일 퇴근 후에 갈 수는 없었다.
우선 '거리'를 기준으로 검색하기 시작했다. 지도에서 회사를 띄워두고 '숙소'를 검색했다. 2년 넘게 김해로 출근하고 있었지만, 김해에는 내가 모르는 공간이 많았다. 적당한 숙소를 고르기만 한다면... 마침 지도에서 '김해 한옥 체험관'이라는 마크가 눈에 띄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운명처럼 만난 글자였다. 한옥이 옹기종기 모인 형태로 생긴 체험관은 사진만 봐도 고즈넉했다. 어떻게 이런 공간이 근처에 있는 걸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온돌방은 1박에 4만 원대. 조금만 걸어도 해반천이 가깝게 있고, 바로 옆에는 수로왕릉과 수릉원이 있었다. 더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날,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텅 비어 있던 일정이 갑자기 빼곡하게 늘어났다. 예상 못 한 교육이 여행 다음날 목요일에 잡혔다. 다행히 오후 시간이라 지장이 없을 거라 안도했던 찰나, 수요일에 외근 일정이 잡혔다. 그것도 편도 3시간 넘는 거리에 있는 충청도로. 회의 시간이 오후 2시라, 아무리 빨리 돌아온다 해도 밤 9시는 넘을 것 같았다. 한 시간이 아쉬운데 저녁 시간까지 침해당하다니-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숙소를 취소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고 싶다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더니, 우주가 나서서 방해하는 꼴이 아닌가. 괜스레 작가가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났다.
진짜 어쩔 수 없어? 아쉽지 않은 건 아니고?
여행을 한껏 기대했던 어린아이의 목소리였을까? 눈을 땡그랗게 뜨고, 허리춤에 손을 올린 꼬마가 맹랑하게 올려다보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저 노는 것에만 빠삭한 줄 알았더니 녀석은 눈치도 빠르다. 안타까움이라는 껍질 속에 감춰둔 안도감을 꿰뚫어 봤다. 그것도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먼저. 가고 싶으면서도 또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순수한 눈망울 위에 또렷이 비쳤다.
그 눈빛에 떠밀려 다시 달력을 들여다봤다. 일정이 좀 생기긴 했지만,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는 검은 날. 곰곰이 숫자 사이를 거닐었다. 그리고 문득 '교육'이라는 글자가 적힌 목요일 앞에 멈춰 섰다. 교육은 회사 가까운 곳에서 오후 1시 반에 시작이었고, 못해도 두 시간 안에는 끝날 것 같았다.
순간 머릿속에서 앙큼한 상상이 번뜩였다. 늦은 밤까지 이어질 수요일의 외근과 다음 날 오후의 짧은 교육. 혹시 운이 따라준다면, 교육 뒤의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도 있다.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달려볼 수도 있다. 해가 점점 짧아지고 있는 요즘, 훈훈한 공기를 스치며 낯선 장소를 거닐 수 있다면! 숨겨진 보물 지도를 찾은 것처럼 가슴이 떨렸다. 나는 서둘러 다시 숙소를 잡았다.
목요일 이른 새벽,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지난밤 10시가 넘어서 집에 도착한 나는 피곤함에 그대로 잠들었다. 따가운 눈꺼풀은 잠을 더 원했지만, 떠나기 위해 짐을 챙겨야 했다. 하품하며 가방 하나를 거실에 펼쳐두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필요한 짐을 가방 곁으로 옮겨다 놓기 시작했다. 마치 한밤중처럼 깜깜한 창밖. 분주히 이곳저곳을 움직이다 보니 점점 정신이 또렷해졌다. 날마다 다른 기온에 옷 챙기는 일이 가장 고민스러웠다. 우선 그냥 생각나는 대로 다 꺼냈다. 얇은 옷, 조금 두꺼운 옷, 기모가 든 옷과 운동복까지 아래위를 맞춰 가져다 놓았다. 달릴 때 필요한 러닝 벨트와 헤드셋도 잊지 않았다. 읽고 있던 소설책과 모닝페이지 노트도 챙겼다. 혹시 글을 쓰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태블릿과 충전기 그리고 얇은 무선 노트와 색색의 볼펜을 한 움큼 집어 들었다.
어느새 가방 주변에는 짐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어딜 가든 보부상처럼 짐을 한가득 챙기는 나. 늘 불필요한 짐을 많이 챙기는 걸 단점으로 여겨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아예 쓰지도 않은 물건들을 보며, 다음에는 좀 줄여서 오자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홀로 떠나는 여행을 꾸리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나의 짐은 걱정이 아닌 설렘에서 뻗어 나온 것이라는 것을.
별다른 계획 없이 잡아 놓은 1박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했다. 달리려면 그에 맞는 운동복이 필요하고, 밤에 가까운 천문대라도 가려면 두터운 외투는 필수다. 낯선 카페에서 문득 소설을 읽고 싶어질 수도 있다. 아니면 기가 막힌 영감이 떠올라 글을 쓰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때 원하는 색의 볼펜이 없다면, 좀 헛헛하지 않을까? 그래, 차에는 트렁크, 뒷자리, 조수석까지 아주 넉넉하게 비어 있다. 광활한 하룻밤을 꾸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뭐든 챙기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핫팩과 몇 장의 마스크까지 단단히 챙기고, 식탁 위에 있는 귤 몇 개도 집어 들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무겁긴 했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나의 모험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교육은 싱겁도록 빨리 끝이 났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가운데, 해가 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사에서 온 연락은 없었다. 아무래도 날짜를 잘 잡은 것 같았다. 숙소 근처에 차를 세웠다. 죄책감을 웃도는 배덕감이 발걸음을 자꾸 가볍게 만들었다. 한결 더 가볍도록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목적지도 없이 달리다 걷고, 멈춰 섰다가 다시 달렸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해반천에서 두루미와 청둥오리를 마주쳤다. 우연히 닿은 구지봉공원에서는 알록달록한 단풍 사이를 거닐었다. 낙엽을 밟다 들어선 짧은 다리를 건너보니, 수로왕비릉이 눈앞에 서 있었다. 국립 김해 박물관의 회랑을 경이롭게 돌다가, 초등학교 울타리 앞에 걸린 학생들의 시를 보며 미소 지었다. 생뚱맞지만 자연스럽게 서 있는 대성동 고분을 올라, 서쪽으로 사라지는 해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홀로 밥을 먹고, 카페에서 글을 잠시 쓰다가, 따뜻한 온돌방이 있는 한옥에서 깊은 잠을 잤다.
두려웠던 게 무색할 정도로 잘 먹고, 잘 잤다. 당연히 하고 싶은 모든 걸 할 수 없었다. 들고 간 물건은 대부분 쓰지 않고 고스란히 되가져왔다. 어슴푸레한 새벽에 깨어나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게 무어라고 그렇게 해보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또 억눌러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지 않았을까?
써놓고 보면 왜 그렇게 쓰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또 굳이 외면해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된다. 쓸모를 떠나서, 누군가의 시선과 상관없이, 하고 싶은 마음을 따라보면 되는 거다. 어쩌면 그 끝은 싱겁도록 가벼워서 허무할 수도 있다.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사실 한 번의 여행이, 하나의 글이 '나'라는 사람을 뒤흔들 만큼 극적일 때가 생에 몇 번이나 있을까? 홀로 여행을 하고 와도, 글을 완성해서 책을 내도 나는 그저 '나'일 뿐이었다. 어김없이 출근해야 하고, 다시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런 욕구를 실현했던 경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꺼이 다른 일을 저지를 용기가 되어준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언젠가는 해봐야지 하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그 언저리에 있는 작은 일이라도 시도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런 수많은 일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사람, 그게 작가가 말하는 '아티스트'가 아닐까?
그렇다면 나도 말할 수 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작은 모험을 즐기고, 쓸데없는 것들을 기록하는 아티스트 리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