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밥 레미

아니- 아직도 따끈따끈 하거든!

by 리을

"아이고, 레미야 이제 너는 찬밥 신세야."

문득 날아든 남편의 말은 레미에게 하고 있지만, 나에게 던진 말이었다.

"아니- 아직도 엄청 따끈따끈하거든!"

"불쌍한 찬밥 레미~"

"아니라니까-ㅋㅋ"


억울하지만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이 논란은 약 4주 전, 그러니까 26년 2월 26일 목요일부터 시작되었다.

집 앞에는 보기 드물게 택배 상자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커다란 종이상자가 세 개, 커다란 아이스박스가 두 개.

혼자서 집안에 넣기도 힘들 정도의 양.

그랬다. 나는 '물 생활'이라는 새로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투명한 물이 가득 담긴 맑은 유리 안은 별세계였다.

돌과 나무가 뒤엉킨 곳에 초록빛 작은 입이 반짝이듯 흩날리는 곳.

날개 같은 지느러미를 가진 생물들이 사이사이를 누비며 쉼 없이 움직이는 곳.

한 입 거리도 안 될 것 같은 작고 예쁜 새우가 바쁘게 다리를 비벼대는 곳!


어항을 갖고 싶다는 욕구는-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마음만 가진 채,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보니 괜히 눈만 높아져 버렸다.

'아쿠아스케이핑(수경 예술)'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돈도 시간도 어마하게 들다 보니 늘 고민 끝에 포기하고 말았다.


근데 문득 그냥 어항 하나만 있어도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일을 치고 말았다.


박스를 모두 열어 주문을 확인하고,

물을 채워 어항의 누수를 확인하고,

돌에 묻은 진흙을 몇 번이나 박박 닦아내고,

빈 상자에 돌을 놓고 이리저리 구도를 검토했다.

미리 정해둔 자리에 소일(바닥재)을 깔고,

구상한 대로 돌을 얹고,

준비한 수초를 모내기 하듯 심었다.

천천히 물을 조심스레 채우고,

온도계, 여과기, 조명등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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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거실과 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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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까지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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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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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 후 물 채우기


KakaoTalk_20260324_153854634.jpg 난리통에 완성된 어항


어항이 있으면 좋겠다... 말은 참 낭만적이었다.

금토일 꼬빡 어항 앞에 매달리고, 검색하느라 혼쭐이 나고,

1주 차는 매일 물갈이 하느라,

2주 차는 이틀에 한 번 물갈이,

3주 차는 주3회 물갈이.. 물갈이 지옥이 따로 없다.

조금만 이상 징후가 보여도 뭐가 잘못된 건 아닌지 가슴이 콩닥거린다.


그래... 그래.. 낭만은 멀리 있을 때 아름답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

몸은 피곤하고 퇴근 후 저녁 시간이 어항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욕구를 실현하는 값을 톡톡히 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상상만 하던 어항이라는 세계를 만들었다.

살랑이는 물결에 생명체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면-

기분 좋은 간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뭐- 찬밥 레미라고 부르는 남편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ㅋㅋㅋ

역시 동의할 수는 없다.


여전히 나는 집으로 가면 곧장 레미 집으로 향한다.

잠은 어디서 자고 있는지, 사육장 온도는 적절한지, 분무기로 습도를 맞춰준다.

다행히 녀석은 밥도 잘 먹고, 집안 곳곳을 누비며 건강하게 있다.

요즘은 밥 먹을 쯤이면 알아서 문앞으로 다가오는 레미.

녀석은 변함없이 우리 집 귀염둥이 1호다.


레미야, 엄마가 잠시 바쁜거 뿐이야.

그러니 찬밥이니 뭐니 그런 말은 듣지도 신경쓰지도 말아!


KakaoTalk_20260324_155011562.jpg 오늘도 귀여운 레미



D+200!!


이름 : 레미

분류 : 파충류, 도마뱀

종 : 크레스티드 게코

모프 : 레드릴리

탄생일 : 25년 08월 13일

첫만남 : 25년 09월 07일

성별 : 모름

무게 : 10g!!

한 줄 메모 : 갑자기 확 커버린 레미.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건강하다고 보여주는 것 같아 고맙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