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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을 Apr 17. 2023

나를 담는 공간

집순이로 살게 된 요즘- 어느 때보다 하늘과 가깝다.

작년 말부터 살게 된 지금의 집은 남서향이다. 밝게 떠오르는 해를 볼 수는 없지만, 오후가 되면 한참 동안 빛이 가득 들어온다. 덕분에 살 떨리는 겨울에도 창가에 앉아 시린 발끝을 녹이곤 했다. 점심을 먹고 쬐는 햇볕은 또 얼마나 포근한지. 기분 좋은 나른함에 못 이겨 그 아래서 낮잠을 자곤 했다. 하지만 이곳의 백미는 다른 곳에 있다. 바로 석양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선을 맞출 수도 없이 높은 곳에서 있던 태양이 어느새 눈높이로 내려와 있다. 눈을 뜰 수도 없이 밝기만 하던 빛도 붉게 누그러져 있다. 탁 트인 하늘에 붉게 타오르는 해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언제나 감동적이다. 모습을 감추고도 미련이 남은 듯 한참을 물들여 놓은 그 하늘의 색은 어떤 말로도, 어떤 도구로도 흉내 낼 수 없다. 분주하게 움직이다 문득 그런 하늘을 마주하면, 창이 잘 보이는 식탁에 앉는다. 힐끔 바라보다 결국 창문 앞에 다가가 쪼그려 앉게 된다.


집순이로 살게 된 요즘- 어느 때보다 하늘과 가깝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보면 이 집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오른다. 몇 년 전 운 좋게 새집에 살 기회를 얻었다. 너무 뜻밖이라 무섭기도 했던 순간, 많은 고민 끝에 새집에 살아보는 것을 택했다. 텅 빈 땅에 집이 들어서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무언가를 이토록 기다려 본 적이 있었을까? 홀로 상상하며 설레다 마음 졸이고 걱정하다 희망에 찼다. 복잡한 감정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잠잠해지고 무뎌졌다. 준공이란 말이 들릴 때쯤엔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덧 실물로 볼 수 있는 날이 다가왔다. 양손 가득 짐을 들고 현관에 들어섰다.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지 않아도 될 만큼 먼지가 가득했다. 살림살이라곤 하나도 없는 공간에는 인공적인 냄새만이 가득했다. 그날은 이사하기 전 공사 하자를 확인하려 방문한 날이었다. 줄자, 수평계, 커다란 대야에 간이 의자까지 모두 구석구석 둘러보기 위한 물건들이었다. 한쪽 구석에 짐을 쌓아두고 천장, 벽, 바닥을 샅샅이 살피며 잘못된 흔적을 찾기에 바빴다. 의자 위에 올라가 선반 안쪽을 보고, 지저분한 바닥에 쪼그려 마룻바닥을 훑었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메모를 하던 중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배가 고파졌다.


밥상 하나 없는 거실에 은색 돗자리를 펼쳤다. 물티슈로 손을 닦고, 먼지 가득한 겉옷과 운동화를 벗었다. 그리고 바닥에 앉아 허겁지겁 도시락을 먹었다. 쌀 한 톨 남김없이 먹고, 물 한 모금 마시고 나니- 구부러져 있던 등이 벽을 찾았다. 돗자리를 벽 가까이 바싹 붙여 등을 기대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뱉어내자 차갑지만 딱 기분 좋을 만큼 시원한 공기가 발에 스쳤다. 숨소리가 잦아들고 고요함이 다가왔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창밖의 소음은 되려 공간을 더 적막하게 만들었다. 시선이 자연스레 창으로 향했다. 오후 4시, 11월의 하늘은 벌써 어슴푸레한 빛깔을 내고 있었다. 그 아래로 빼곡하게 들어선 건물들, 간간이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들이 반짝였다. 유리창에는 희미하게 내부가 반사되어 보였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여태껏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등을 댄 자리는 소파가 놓이고, 그 위에 앉으면 지금 바라보는 풍경이 보이겠지. 맞은 편에는 TV와 보드게임이 가득한 수납장이 들어설 거야. 식탁은 무조건 창이 잘 보이도록 놓고, 나란히 앉아서 밥을 먹어야지. 전자레인지와 밥솥은 눈에 띄지 않지만, 동선이 편한 곳에. 그리고 안방 침대와 작은 방 책상은 하늘이 잘 보이는 창문 가까이에 두자. 고요하던 공간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울려댔다. 3년이란 시간에, 이사 준비에, 한겨울 발에 땀이 나도록 살폈던 하자 점검에 무뎌졌던 설렘이 되살아났다.


그래, 이곳은 나를 담아낼 공간이었다.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지금,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고 있다. 알람이 울리면 발로 커튼을 걷어낸다. 갑자기 쏟아진 밝은 빛에 어렵사리 눈을 뜨면, 하늘이 가득 보인다. 푹신한 침대에서 겨우 일어나 거실로 향한다. 커다란 창문이 보이는 식탁에 앉아 모닝 페이지를 쓴다. 눈곱도 떼지 않고 수영을 다녀오면, 다시 식탁에 앉아 간단한 아침을 차린다. 얼마 전부터 휴대전화 대신 책을 들고 천천히 먹는다. 기지개를 크게 켜고, 책상이 있는 작은 방 책상으로 출근한다. 파편처럼 떠오르는 이미지를 붙들고, 어떻게든 적어내려 애쓴다. 술술 적힐 때야 즐겁지만,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때는 괴로움을 넘어 외로움까지 찾아온다. 그럴 땐 감정에 잠식당하기 전에 방을 벗어난다. 창고 벽면을 채우고 있는 책들 중 하나를 잡고, 넓은 거실로 향한다. 소파에 뒹굴며 책을 읽다가 볕이 들어오는 시간에는 그 앞에 엎드린다. 팔꿈치가 아려오면 풀썩 바닥에 널브러져 책장을 넘긴다. 스르륵 선잠을 자다가 번쩍 일어난다. 그리고 다시 책상으로 향한다. 마음에 드는 음악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다시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틈틈이 눈앞에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어느새 구석구석 내가 남긴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곳은 작업 공간이자 놀이터이자 휴식처이자 남편과 함께 사는 공간이 되었다.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시간에 좌표를 잃고 떠내려가기 일쑤인 요즘이지만, 일상에 따라 공간을 즐기는 일은 무척이나 재미있다. 공간이 살아날수록 그 안에 담기는 일상도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쓰는 일에 관심이 많은 요즘은 책상 뒤로 덩그러니 남은 공간을 가꾸고 싶다. 비어있는 벽에는 커다란 화이트보드를 붙이고, 앙증맞은 유리 테이블을 놓고 싶다. 생각나는 이미지를 마구 붙여두고, 스치는 문구를 낙서하듯 적어 놓을 수 있는 벽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가졌던 로망이었다. 앙증맞은 유리 테이블은 오밀조밀한 작업을 하는 놀이터가 된다면 또 어떨까? 벌써 그 공간에 담길 내 모습에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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