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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을 Apr 21. 2023

소설을 쓴 적이 있더라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

머리에 떠오르는 조각조각 이미지를 글로 적어내는 요즘, 문득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글 쓰는 걸 좋아했고, 보여주는 걸 그리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기도 선생님의 코멘트를 받기 위해 극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 말하기 전에 하는 글쓰기는 특히 더 빛을 발했다. 뒤죽박죽인 생각을 종이로 옮기다 보면, 형태가 잡힌 단단한 말을 할 수 있었다. 사춘기 시절에는 주체할 수 없는 화를 종이 위에 휘갈겨 담고, 누가 볼세라 자물쇠로 잠가두었다. 더러는 상을 받기도 했던 나는 '쓰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 짤막한 생각을 길게 늘여서 무엇이든 채워 나가는 일은 쉬웠다.


그러다 문득 나도 소설을 쓴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고등학생 때 늘 들고 다니던 연습장이 있었다. 새파란 색의 하드커버 연습장은 표지만큼 모양도 투박했다. A4용지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에, 두께가 손가락 한 마디 반을 넘을 정도로 두꺼웠고, 내지는 아이보리 빛에 연한 하늘색의 줄로 가득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 OO수학이라고 표지에 커다랗게 적혀있었다. 어쩌다 그 연습장을 받게 된 것인지(모양을 떠올려 보면 도저히 내가 돈을 주고 샀을 것 같지는 않다), 왜 하필 그곳에 무언가를 끄적이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무겁고도 투박한 연습장을 줄곧 끼고 살았다. OO수학에는 숫자가 아닌 휘갈겨 쓴 문자들로 가득했고, 어지러운 감정들이 난무하는 사이로 툭 하고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이야기는 아주 짧은 단편이었다. 그 당시 '가식'이라는 단어에 복잡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 마주치는 사람에 따라 다른 모습이 되는 내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소심한 듯하다가도 처음 보는 사람과 친구가 되기도 했고, 존재감 없이 가만히 있다가도 나서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선명하던 감정이 순식간에 뒤바뀌고, 혼란 속에서 어디까지가 내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가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감정이나 내보이는 태도에도 진짜인지 아닌지를 늘 고민하게 되던 시절, 썼던 글. 주인공은 한 사람 안에 있는 인격이다. 당연히 자신이 주체적이라고 생각했던 그 인격은 깨닫게 된다. 자신은 일회용처럼 쓰고 버려지는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중심에서 조정하듯 가면을 쓰는 존재가 따로 있다는 것을. 억울함? 비통함이었을까? 사라질 걸 알면서도 그는 잊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다. 어떻게 잊히지 않으려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상상을 해보자면, 기록을 남기려 했다든지 아니면 도망쳤을 한데… 역시 억지로 덧붙이기가 어렵다. 하지만 찰나와 같이 버려지는 가면에 불과할 테지만 잊히고 싶지 않은 인격의 절규, 울부짖음을 열심히도 썼던 건 선명하다. 샤프로 꾹꾹 눌러 그 장면을 상상하며 썼고, 몇 번을 다시 읽으며 고쳐 썼다. 성격도 몽글몽글한 반죽 같던 시절, 주먹으로 내리치면 움푹 파이듯 달라지는 모양을 다듬는 게 어려웠다. 진짜로 믿는 것이 가짜일 것 같은 불안함, 가짜일지라도 사라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인 글은 당시였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완성하지 못한 장편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주인공이 초아라는 이름의 여자였고, 굉장히 불안한 캐릭터였다. 티를 잘 내지 않는데, 어떤 사정으로 곁에 있게 된 남자 캐릭터가 눈치채게 된다. 로맨스보다도 주인공을 위로하는 상대로 생각했던 것 같다. 전반적인 이야기를 생각하기보다는 파편처럼 짧은 장면들이 머리에 떠올랐고, 그 장면을 써보다 멈췄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책장에 꽂혀 있는 작품은 친구와 쓴 릴레이 소설이다. 그래픽 학원에서 받은 얇은 노트(왜 글을 제대로 된 노트에 안 썼을까?)에 날카로운 내 글씨와 동글동글 귀여운 친구의 글씨가 주거니 받거니 적혀 있다. 재미있는 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다. 함께 매점에 갔던 평소와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친구가 매점에서 오레오 쿠키가 세 개 들어있는 과자를 샀다. 장난기 많은 내가 그걸 낚아채고 마치 내 것인 양 하나를 친구에게 주고, 또 하나를 꺼내 내가 먹었다. 남은 마지막 과자를 손에 들고 자연스레 반으로 갈랐는데, 친구가 비명을 질렀다. 자신이 산 과자를 왜 마음대로 나누느냐고. 나였다면 당연히 마지막 남은 쿠키도 나눠서 먹었을 거라며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 옥신각신 다툼을 했고, 왜인지 모르지만 그게 릴레이 소설 도입부가 되었다. 등장인물은 김군(나)와 야수(친구)였다. 반으로 갈라진 오레오 쿠키 하나에 시작된 소설은 이상하게 감정의 골이 심해졌고, 닿을듯 말듯 하게 스쳐 지나가다 훌쩍 10년이 흐르기도 한다. 아쉽게도 이 이야기도 완성하지 못해 결말은 없다.


지난주 날이 좋았던 주말에 남편과 공원에 갔었다. 여유롭게 산책하며 호수를 돌고 있는데, 키가 내 허리춤 오는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깔깔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 걸까?"


남편이 스스로 던지고 스스로 대답하듯 말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도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경험이 적어서 모든 게 신기하고 흥미가 있는 게 아닐까. 난생처음 타본 미끄럼틀, 씽씽이로 바람을 가르는 기분, 발을 구르듯 땅을 박차고 나가는 느낌까지 모두 즐겁다. 몇 번을 반복해도 질리지 않고, 할 수 있다면 밤이 새도록 놀고 싶다. 


답은 '순수하게 즐기는 마음'에 있는 것 같다. 어른도 잠깐씩 그런 마음이 발동되는 순간이 있다. 한때 수영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다. 회사까지 편도 한 시간 반이 걸려서 아침에 수영을 가려면, 최소 5시 반에는 일어나야 했다. 추운 겨울 새벽바람은 유난히 차가웠다. 수영장 물에 발을 넣을 때면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게 된다. 그래도 머리까지 푹 물에 담그고 나면, 다른 것들은 다 잊었다. 시원하고 물살을 가르는 기분 좋은 느낌에 중독되어 몇 개월을 그렇게 다녔다. 어떻게 가능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때 나는 미친 상태였다고.


고등학생 때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닌 그저 쓰고 싶다는 마음 하나에, 얄궂은 연습장에 꾹꾹 눌러쓴 이야기들. 이사를 하며 그 연습장들을 버린 게 아쉽다. 자주 펼쳐보지 않아서 분명 다시는 보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버렸는데, 이렇게 한 번씩 아른거린다. 부끄러울지도 모르지만 순수하게 즐기던 때가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지금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나는 어느 순간에는 글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일기든, 독후감이든, 편지든, 소설이든 결국 이 마음으로 다시 돌아왔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부디 오래도록 그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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