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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을 Apr 24. 2023

쓰는 자세

4천 자 쓰기

 하루에 4천 자씩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작년 12월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전적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다 보니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들었다. 책에는 그 외에도 생각하는 방식이라던가, 초고부터 퇴고까지의 과정이라던가, 타인에게 평가받을 때 자세라던가 영감이 받은 것이 많았다. 오랜 기간을 작가로서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다 보니 따라 해 보고 싶은 마음에 설렜다. 거드름 피우지 않는 말투로 담담하게 써 내려간 그의 생활 이야기는 앞으로도 여러 번 곱씹게 될 것 같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손쉽게 실행해 볼 수 있는 것이 4천 자 쓰기였다. 하루키의 말을 빌리자면- 원고지 한 장을 200자로 기준으로 하고, 20매를 쓰는 것(신기한 것은 한글로 원고지에 적을 때도 한 장에 200자 정도 적힌다. 일본어도 그와 같은 것인지, 번역가가 친절하게 생각해 둔 것인지 궁금하다). 원고지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4천 자를 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대작가인 그와 내가 쓰는 4천 자를 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냥 쓰고 싶은 마음만 있던 내게 꽤 괜찮은 제안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시간으로 쓰는 것을 제한하는 것보다는 효과적이었다. 시간은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휩쓸리기 쉬웠다. 두 시간 동안 써보자고 굳게 다짐해도 수없이 많은 것들이 방해한다. 단톡방 알림, 재난 문자, 날씨, 뉴스 그리고 거기에 반응하는 감정까지. 이상하게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자꾸만 생겨났다. 시간은 실체도 없이 자꾸만 허공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글자 수에는 변명도 들어갈 틈이 없다. 어제는 채웠는데, 오늘은 채우지 못한 사실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절대적인 지표가 되는 글자 수에 맞춰 시간을 낼 수가 있었다. 오전에 이미 절반을 채웠다면, 여유로운 오후를 보낼 수 있다. 점심 먹도록 한 글자도 적지 못했다면, 다른 일을 포기하고 쓰는 것에 매달려야 했다. 4천 자라는 부담감을 견뎌내면 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굳이 시간을 제한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지만, 글자 수를 붙들고 있으면 시간은 저절로 따라왔다.


 현재 쓰고 있는 소설은 단편으로 시작했던 소재가 의도치 않게 불어난 이야기다. 주인공인 줄 알았던 인물 곁에 진짜 이야기를 숨기고 있던 다른 인물이 있었다. 마치 오래된 화석을 발굴하는 기분이랄까? 조심스레 흙을 걷어내면 주변에 자꾸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드러났다. 작은 동물의 뼈로 보였던 것은 어느새 내 몸집을 넘어서는 형체를 드러내고 있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이 작업은 규모만 보아도 내 능력을 벗어났다. 눈대중으로 가늠하며 작업을 하고 있지만, 세세하게 들어갈수록 녀석은 자꾸만 형체를 바꿔댔다. 흐름을 잡고 싶었던 나는 혼란에 빠졌다. 개략적인 이야기는 있었지만, 에피소드에 나올 인물, 상황, 개연성을 집약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불안했다. 작가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걸 잡고 내려가는 거지? 웹소설 작가들은 하루에 5천 자를 쓴다고 한다. 차곡차곡 순서에 맞게 이야기를 쌓아갈 수 있는 그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발굴한 뼛조각이 어깨인지, 갈비뼈인지, 발목인지 구분할 수 없는 나는 도무지 그렇게 작업할 수 없었다. 그런 내게 4천 자 쓰기는 오히려 고민거리를 없앴다. 발굴한 뼛조각의 근처를 파헤치며 한땀 한땀 종이 위로 고정했다. 그렇게 두서너 개의 에피소드가 쌓였고, 점차 녀석의 윤곽이 드러났다. 어느새 녀석의 골격을 상상하며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매일 4천 자를 쓴다는 자체도 절대 만만치 않다. 술술 적어서 오후 2시를 넘기기 전에 목표치를 채울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날이 많다. 목표를 채우지 못한 날이면 어쩔 수 없이 죄책감도 따라온다. 계획표를 짜지 않는 건 어그러졌을 때 생겨나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몇 개월째 희망과 절망을 오고 가면서 낸 결론은- 그래도 해볼 만하다는 것.


 전전긍긍하며 쥐어짜 내듯 쓸 때도 많고, 하나의 에피소드를 마무리 짓기 전에 다른 에피소드에 손을 대기도 한다. 진짜 어려운 날에는 그냥 떠오르는 대로 썼다. 인물의 외모, 쓰고 싶은 상황, 번뜩 스쳤던 대사, 자꾸만 맴도는 장면을 맥락에 상관없이 써 내려갔다. 쓰면서 느낀 것은 내가 똑똑한 사람은 아니라는 점. 머리로 멋지게 잘 짜인 이야기가 순서대로 나오는 사람이 아니다. 아쉽긴 하지만 오히려 그걸 인정하는 순간 편해졌다. 결국 키보드로 두드리고 눈에 보이는 글자로 다시금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막연했던 인물이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생김새, 표정, 말투, 목소리, 성격 그리고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사연이 나타났다. 커다란 스케치북을 들고 설정을 짤 때도 몰랐던 이야기가 어떻게든 써내려는 자세에서 피어났다.


 언젠가 돌아보고 무식한 짓이었다고 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듬더듬 쓰는 자세를 만들어 가는 지금이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 미숙해도 어떻게든 완성해 보겠다는 마음만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의 마음을 이렇게 오래도록 가져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신기할 정도다. 사그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그 마음을 붙들고 키보드를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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