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의 어느 날, 문득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퇴근 후 곧바로 이비인후과로 향한 날이었다. 오후 6시 25분, 마감을 앞둔 한산한 병원에서 체온을 재고 방문록을 작성했고 곧바로 이름이 불렸다. 진료실 중앙에 있는 괴상한 의자에 앉았다. 나는 익숙한 듯 허리를 숙여 고개를 내밀고 기울였다. 오른쪽 귀가 의사 선생님 시야 아래 자리 잡으면, 차가운 액체가 귀 안 가득 채워졌다가 빠져나가는 작업이 몇 번이고 반복됐다. 별다른 말 없이 자세를 잡을 정도로 많이 겪었지만, 몸을 움찔하게 만드는 차가운 감각과 귀 안을 울리는 기계음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마무리될 때쯤이면 꾸덕한 연고가 안쪽 구석구석 발리고 축축한 솜이 귓구멍에 가득 채워졌다.
"천천히 일어나세요."
그 말에 고개를 기울인 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면, 옆에 있던 간호사가 내 머리를 붙잡는다. 오른쪽 귀에 넣어진 약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기울인 각도를 유지하려는 의도라는 걸 알지만, 엉거주춤한 자세로 간호사의 부축 아닌 부축을 받으며 걷는 모양새는 몇 번을 반복해도 웃음이 났다. 그렇게 병원 구석에 있는 소파로 향했다. 그곳에서 10분간 옆으로 누워 있다가 일어나는 것까지가 몇 주째 반복되고 있는 진료 과정이었다. 소파에 누워있어야 할 이유를 들은 적도 물은 적도 없었다. 귀에 약이 스미는 시간을 주고, 혹시 생길 수 있는 어지러움을 가라앉게 하는 의도이지 않을까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구석진 소파에 옆으로 누워 얌전히 10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사람의 통행도 없는 그곳에서 눈앞의 하얀 벽을 바라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팠던 일들을 적어보고 싶다.'라는 이상한 생각이….
잠깐 머물다 사라질 것 같던 그 이상한 생각은 오히려 더 커져만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검은 유리창에 비쳐 여전히 귀를 막고 있는 솜이 보였다. 그리고 찬찬히 시선을 옮기며 다른 부분을 바라봤다. 눈, 코, 입을 지나 어깨, 허리에서 발까지. 그곳에는 아주 사소한 이야기부터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사연들이 담겨 있었다. 내 눈에만 보이는 자그마한 흉터에 담긴 일, 미련한 판단 때문에 몇 배로 아팠던 일, 대학 병원에 다니며 마음 졸였던 일, 건강에 자신이 있던 내가 자꾸만 작아졌던 일들. 그뿐만 아니라 난생처음 달리기 1등 도장을 받아 행복했던 때, 오른손에 깁스하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던 때, 자전거를 혼자 타게 되었을 때와 같은 어린 시절의 기억들까지도 함께 떠오르기 시작했다.
낯설었다. 30년 넘게 이용한 '몸'에 담겨 있는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진다는 게 이상하지만, 그랬다. 그 이유를 고민해보다 어쩌면 그렇게 느끼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닿았다. 내게 ‘몸’이란 수단에 불과했었다. 목적을 이루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용하는 데 문제가 없다면 자세히 들여다볼 이유도 없었던 것. 그런데 언제부턴가 몸에 관한 이야기가 일상을 뒤덮기 시작했다. 별생각 없이 해본 건강검진에서 이상소견을 받고, 병원에 주기적으로 방문하라는 말을 듣고, 먹어야 하는 약과 조심해야 하는 것이 늘었다. 오랜만에 하는 친구와의 통화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한참이나 서로 떠들고 있었다. 완벽히 일상을 점령당했다. 그렇게 된 계기는 여러 잔병을 겪으며 시작되었다. 갖고 있을 때 알 수 없는 소중함은 잃어버린 순간에야 알 수 있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패배감이 없진 않았지만, 그보다도 묘한 감정이 피었다. 그 이야기들 속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순간의 선택과 가치관이 복잡하게 얽힌 나름의 결과물이자, 알 수 없는 누군가로부터 평가받은 성적표 같기도 했다. 물론 평가에서 만족스러운 점수를 받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시 그 결과들은 내 삶에 엮어져 또 다른 생각과 생활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영영 바꿀 수 없는 결과가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나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 곁을 맴돌고 있었다. 살아온 세월의 흐름만큼 이야기는 '몸'이라는 곳에 쌓여 작은 역사가 되고 있었다.
한없이 사소하고 가벼워 누군가에겐 닿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생각보다 무거워 읽는 이에게 걱정을 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나 있을 법한, 또 나처럼 잊고 살았을지 모르는 이 이야기들이 읽는 이에게 살며시 공감과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극히 사적인 내 '몸에 담긴 기억'을 꺼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