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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집가장 May 12. 2024

인서울은 왜 꿈이었는지

가장 단순하고 납작한 목표

지역 출신으로 서울의 대학에 가고 싶었던 내게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서울공화국인 건 다르지 않았다. TV를 보거나 라디오를 들으면 생경한 서울의 지명들이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불리고, 읽혔다. 본 적도, 가본 적도 없는 곳들을 가늠할 뿐이었다. 짐작하며 궁금해했고, 그 안에 포함되고 싶었다.


서울에는 흔히 말하는 '좋은 대학들'이 몰려 있으니까 내가 열심히 수험생 시간을 보냈다는 것의 방증 같은 것이기도 했다. 지금 들으면 촌스럽지만 "말은 제주로, 사람을 서울로"라고 했으니까. 서울에 갈 수 있다면, 무조건 가야지. 고향 주변엔 지역 거점 국립대가 있긴 있었다. 문과는 서울로 가야지 취업까지 수월할 거라 생각했다. 서울엔 대학교만 있는 게 아니라, 직장도 있으니까. 실제로 이과에서 공부를 잘했던 친구들은 굳이 인서울을 욕심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서울 그게 뭐라고 인서울 인서울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보다 더 큰 무언가를 목표로 삼고, 욕심냈으면 지금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텐데 하면서.


대입 전 서울을 가본 건 딱 한 번이었다. 초등학생 때 엄마의 대학병원 진료 때 가족 다 같이 간 것. 그게 전부였다. 서울이 어땠는지 기억도 없이 그냥 병원과 먼 친척집에 들렀다 온 게 전부였다. 그다음 서울에 갔던 건 고3, 수시 전형을 위한 논술 시험을 보기 위해서였다. 같이 원서를 접수한 친구들과 심야 고속버스를 함께 타고 상경했다. 시험이 끝나고선 고향에는 없었던 패밀리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그 후에도 수능 전후로 논술고사를 보러 서울을 오갔다. 가장 마지막에 봐서, 가장 마지막에 합격자 발표난 학교에 유일하게 합격했다. 아무튼, 그렇게 서울에 발 딛게 되었다.


살 곳이 필요했다. 대학엔 당연히 기숙사가 있지만, 지역 출신 입학생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었다. 신입생 카페에서 정보를 찾아봤는데 생각보다 적은 인원이 기숙사에 입소할 수 있었다. 기숙사를 지원하고 가족들은 결과만 고대했다. 집이 없으면 대학에 갈 수나 있는 것인지 막연한 걱정이 들기도 했다. 서울의 집값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도 못해서 더더욱 그랬다.


지역에서 서울로 온 학생들을 위해 '학숙'을 운영하는 지역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가 살았던 경남을 포함한 경상도에선 있던 학숙을 없애버렸다는 것을 알고 크게 실망했다. '도지사에게 바란다'같은 곳에 경상도에서 서울로 대학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학숙이 없냐며 따지는 듯한 글을 썼다.(10대의 치기...) 수요가 적어서 운영을 중지했다는 회신이 왔고, 재개할 계획도 없어 보였다. 그런 불안감 속에서 기숙사 발표가 났고, 다행히도 입소할 수 있게 됐다. 그제야 가족들은 나를 보낼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엄마와 함께 기숙사에 들어가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첫 차를 타고 가야 해서 새벽 일찍 일어났다. 엄마는 백화점에서 사서 미리 세탁까지 다 마친 이불을 잘 포장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을 때 가족들이 나와 엄마를 배웅했다. 그제야 나가 산다는 게 실감 났다. 나는 19년 간 가족과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빠와 오빠는 어차피 내가 한 달 정도 후에 집에 올 수 있는 걸 알지만 강아지는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나랑 매일 같이 잤었는데 설명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해줄 수가 없어서 너무 답답하고 미안했다. 


기숙사는 2인 1실이었고, 새로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시설이 깨끗하고 깔끔했다. 기숙사 상태를 보고 엄마 역시 안심했다. 이불과 짐을 정리하고 같은 고등학교에서 같은 대학교로 입학한 친구(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지만 같은 반이었던 적은 없어서 합격 소식을 듣고 친해졌다)를 만나 셋이서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의 신세계 백화점에서 밥을 먹었다. 엄마는 버스 타러 가기 전 급하게 가방 매장에 나를 데려갔다. 입학 선물로  가방을 사주려고. 지금도 기억난다. 빈폴의 복조리백. 급한 와중에도 우리 딸은 시슬리 쇼퍼백같은 거 싫어할 거 알고, 체크무늬 가방을 권한 엄마... 나의 취향을 너무나 잘 알고...리스펙. 나는 그 가방을 메고 승차 플랫폼에서 엄마를 배웅했다. 버스에 오르기 전에 껴안았는데 눈물이 폭포수처럼 터져버렸다. (플랫폼에 있던 사람들 다 쳐다봄...) 둘 다 소리 내서 엉엉 울다가 겨우 엄마가 차에 탔고, 나는 친구가 달래줘서 지하철을 타고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기숙사에는 강원도에서 온 경영학과 친구가 와있었다.

자퇴와 고향 회귀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기숙사 생활은 다음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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