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퇴와 귀향을 꿈꾼 회색인
얼레벌레 서울에 오긴 왔지만, 타지에 적응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지역에서 서울로 대학을 오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적응해서 잘 살고 있는 모습들을 들었으니까 나도 으레 잘 지낼 수 있을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개복치였음을...
기숙사 룸메이트는 강원도에서 온 경영학과 학생이었다. 출신 지역도, 전공도 달랐다. 그는 확신의 외향형이었으므로 다소 방어적인 내게도 성큼 다가와줬다. 룸메는 이미 같은 기숙사에 사는 같은 학과의 친구를 사귀었던 터라 밥을 먹을 때나 기숙사 행사가 있을 때 나를 그 사이에 끼워주곤 했다. 많은 것이 달라도 같은 방에 산다는 이유 하나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경험이었다.
사실 같은 과에 친구가 거의 없었다. 학교가 내 학교 같지 않았다. 그래도 신입생들을 위한 개강 총회에는 참석했었는데, 팔자에도 없는 술을 마시다(강권하지 않았고 나의 의지였다) 취해서 언니들이 연행하듯 양팔을 붙들고 기숙사에 데려다준 기억은 있다. 그때 룸메는 고향에 갔던 터라, 혼자 텅 빈 기숙사 방에 들어갔었고 뭔가 되게 허하고 외롭다는 기분을 느꼈다. 다짜고짜 가족들에게 전화 한통씩을 돌렸고 울었다. 다음 날, 아빠에게서 다시 전화가 와서 니는 절대 술 먹지 말라고 혼이 났고(자기는 먹으면서), 엄마는 내가 울면서 전화가 와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했다. 서울에 보내놓기만 하면 다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가족도, 나도 배워가고 있었다.
서울에서의 첫 봄은 고향에서 같이 진학한 친구 두 명과 서울 구경을 다니며 보냈다. 우리 셋은 모두 전공이 달랐고 같은 사투리를 쓰면서 서울의 여기저기를 다녔다. 수업이 일찍 마치는 평일이든 주말이든 늘 학교 앞 하숙집이나 기숙사에 있었으므로 남산, 한강, 명동, 강남, 서대문형무소(?) 아무튼 듣고 보기만 하던 곳에 가봤다. 하루는 친구와 학교 앞 커피빈에 갔다. 사실... 당시 내 고향엔 그런 프랜차이즈 카페가 없었다. 그래서 주문을 해야 하는데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비쌌다. 그래서 제일 싼 에스프레소 한 잔을 달라고 했다. 그러니 주문을 받는 직원분이 당황하시며 에스프레소 맞냐고 재차 물었다. 누가 봐도 사투리 쓰고, 볼 빨간(당시에 촌병이 심했음) 어떤 애가 한참을 고민하다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는 게 쎄하긴 했을 것이다. 에스프레소가 뭔지 설명을 해주셨는데... 뭔진 몰라도 내가 먹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만만해 보이는 바닐라 라떼로 다시 시켰다. 뭔 커피가 6천 원이 넘어. 나는 고3때까지 레쓰비랑 자판기 커피만 마셨었다. 서울 물가 참 무섭다는 생각을 했고, 나를 살려주신 직원분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스벅에서 야무지게 커스텀하는 퍼킹 성인이 되었어요.
서울에서 가장 신기했던 건 3월에도 눈이 왔던 것이다. 내가 살았던 남부 지방... 이참에 출신 지역 공개를 하겠다. 나는 경남 마산 출신이다. 마산에 19년을 살면서 눈을 본 기억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눈이 소복하게 쌓여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썰매를 탔던 기억은 두 번 정도 된다. 그런데 서울은 봄에도 눈이 온다니 너무 신기하고 도대체 겨울 옷을 언제까지 꺼내둬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그 소식을 들은 엄마는 추위를 많이 타는 내가 걱정돼서 잠을 못 잤다고 한다. (개복치 모녀) 사실 엄마는 내 나이 서른이 넘은 지금도 남부지방 날씨보다 중부지방 날씨를 먼저 체크한다. 마산과 서울의 거리는 너무나 멀어서 데이터가 아니고선 미루어 짐작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서울의 웬만한 곳을 다 구경했을 무렵, 나는 답 없는 향수병에 걸리고 만다. 나를 제외한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들의 90%가 마산에 있었다. 근처 대학으로 통학을 했으며, 그들은 같은 학교를 다니기도 했고 여전히 가까운 곳에 살았으므로 계속해서 관계를 이어 나갔다. 나만 튕겨져 나온 기분이었다. 1학년 때 한 달에 한 번은 마산 집에 갔다. 그때마다 친구들을 만났지만, 다시 서울로 오면 헛헛했고 안 어울리는 곳에 와있는 느낌이었다. 강아지를 보지 못하는 것도 적잖이 속상했다. 초등학생 때, 갓 태어나서 다리에 힘이 없어 두 걸음을 채 걷지 못하고 바닥에 미끄러지는 꼬물이 시절부터 같이 지냈다. 그 친구의 최애는 틀림없이 나였으며, 항상 내 팔에 턱을 올려놓고 잤다. 내가 모의고사를 망친 날 책상에 앉아 울고 있으면, 내 옆에 앉아 촉촉한 눈으로 계속 나를 올려다봤다. 아빠한테 혼날 때면 나는 강아지를 클러치처럼 옆구리에 끼고 집을 나갔다. 아파트 화단에 앉아 강아지를 끌어안고 엄마나 오빠를 기다렸다. 그런 시간들을 같이 보냈는데, 내가 왜 이제 같이 살 수 없는지 설명도 할 수 없었다는 게 너무 속상했다. 왜 내가 가족, 강아지, 친구들을 두고 혼자 이곳에 와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상경을 후회했고, 1학기니까 더 늦기 전에 자퇴를 하고 다시 수능을 봐서 마산 근처의 지거국에 진학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기숙사에 들어가기 싫어서, 그 앞에서 초등학생 때부터 가장 친했던 친구(마음 아프게도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다...)와 통화하며 울었다. "그냥 자퇴하고 XX대 갈래!!!!" (그 대학의 입장도 들어봐야겠는데요.) 아무튼 그 난리를 쳤지만, 수능을 다시 볼 생각을 하니 아찔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생각을 절대 가족에 말할 수 없었다. 입학을 결정하기 전에는 그들은 가까운 대학에 가기를 바랐지만, 이미 입학금, 등록금, 기숙사비까지 내고 다니고 있는데 저런 소리를 한다면 태세전환은 당연한 결말이기에.
1학기는 그렇게 고향과 서울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회색인으로 보냈다. 2학기부터는 다행히도 전공 수업도 듣고, 교내 동아리에도 들었고, 친구들도 작지만 조금씩 생기면서 대학 생활이라는 걸 늦게나마 시작할 수 있었다. 나처럼 타 지역 출신이어서 같이 기숙사에 사는 친구도 있었고, 대부분은 수도권 출신이라 경기도에서 통학을 했다. 고로 우리는 모두 통금과 막차 시간의 노예였다. 기숙사 통금 시간은 23시 30분이었다. 충분한 것 같지만, 미팅을 하기에는 의외로 힘든 시간이다. 신촌까지 가서 미팅을 하고, 끝난 후엔 친구들과 따로 맥도널드 같은 곳에 가서 후기를 나누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시 돌아온다 생각하면 여유롭진 않다. 23시 25분이 넘어 학교 앞에 정차하는 마을버스에서 하차하면 죄다 기숙사 언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기숙사에 들어가려면 보안 인력에게 사생증을 보여줘야 했으므로, 달리면서 가방 안에서 사생증을 주섬주섬 챙겨야 했다.
기숙사엔 나름의 재미도 있었다. 나의 2학기 룸메는 1학기 룸메의 절친이었고, 1학기 때에도 나와 자주 만났기 때문에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가장 즐거웠던 건 시험 기간에 기숙사에서 주는 간식이었다. 신기하게도 영양센터의 닭을 줬다. 치킨도 아니고 아무튼, 침대와 침대 사이에 박스를 엎어두고 닭을 뜯었다. '오픈하우스'라 해서 외부인들이 기숙사에 놀러 오는 이벤트도 있었다. 나는 놀러 올 사람이 없었지만, 그때 사생들에게 제공되는 뷔페식을 먹는 기쁨은 누릴 수 있었다. TV 예능 프로그램이 찾아온 적도 있었다. 신식 기숙 사였어서 그런지 학교에서도 여기저기에 기숙사를 "으아 들이대..." 하던 시절이었는지 뭔지 연예인들이 학교 기숙사에 와서 노래도 부르고 학생들 인터뷰도 했다. 하필 그때 왔던 연예인이 내 최애라 초흥분상태였고, 애교심이 하늘을 찔렀던 기억이. 아시는가 지역 출신들은 연예인에 약하다.
기숙사의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학교가 엄청나게 가깝고 밥이 나온다는 점이다. 이 장점은 시험기간에 엄청난 힘을 가진다. 동선을 최소화해서 최대한의 아웃풋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점은 왜...) 식당의 식단도 맛이 없진 않았고, 친구들과 시간이 맞지 않으면 혼자서 밥을 빠르게 해결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혼밥을 즐기게 됐다. 기숙사라는 비교적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울타리에서 타지인으로서 오롯하게 서울에서 살아가는 것에 점점 적응을 하게 됐다. 하지만 적응을 하고 나니 거주 가능 기간 1년이 끝났음을...
기숙사를 나가야만 하는 저는 어디에서 살게 됐을까요...는 다음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