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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집가장 May 26. 2024

하숙, 적당한 안정감과 불편함

응답하라 속 하숙집은 아니지만

학교 기숙사를 1년 채워 살고 나와 향한 곳은 하숙이었다. 당시 학교 앞에 원룸보단 하숙이 아직은 많았었고(지금은 많이 없어지지 않았을까), 부모님 입장에선 아예 혼자 살게 하는 것보단 어른의 보살핌이 있는 게 더 맞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친구들도 원룸보단 하숙에 많이 살았다.


하숙을 구하는 방법은 학교 커뮤니티의 '하숙/원룸' 정보글이 올라오는 게시판을 보거나 직접 학교 앞의 골목골목을 걸으며 간판의 전화번호로 연락을 하는 것이었다. (진짜 옛날사람 같다...) 마산에서 올라온 엄마와 학교 앞 골목을 돌아다니며 전화를 했던 듯하다. 많은 집을 본 것은 아니었고, 한 군데만 보고 바로 결정했다. 기숙사 1년을 살았던 학생들 모두가 학교 앞으로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기 때문에, 빈 방이 있다면 선점하는 것이 중요했다.


내가 선택한 하숙집은 학교 도서관 후문에 있어 학교에 인접해 있었다. 도서관 후문에선 도보 2분 컷이었으며, 학교 정문에선 7분 컷 정도 됐을 것이다. 위치가 깡패였고, 전화를 하고 방문해 마주한 하숙집 주인 부부 내외도 결정에 한 몫했다. 30대 자녀를 두신 하숙집 사장님이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계셨기 때문... 거기에서 일단 엄마의 마음 빗장이 하나 풀렸고, 아침저녁으로 식사가 나온다는 게 중요했다. 나는 유아기부터 초등학생 때까지 아토피로 고생을 많이 했었다. 물론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그 고생하던 시절 탓인지 엄마는 바깥음식보단 직접 해 먹이는 것이 훨씬 낫다는 강박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고등학생 때 떡볶이랑 라면을 너무 많이 먹어버림...) 매일매일 먹어야 하는 밥이라면 집밥이어야 그의 마음이 편했기 때문에 하숙은 이 점에서 엄청난 가점을 받았다. 또, 사장님이 맨 위층에 거주하는 여성 전용이라는 점과 오랜 기간 살고 있는 고학번 언니들은 물론 취업을 하고도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꽤나 인상적이었다.


방은 3평도 안 됐을 것 같다. 정말 좁았다. 아래와 같은 구조였으며, 나도 엄마도 평수에 놀랐지만 빈 방이 딱 하나였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단 이 방에 살기로 하고, 다른 방이 나오면 넓은 방으로 옮기자 말했다. 월세는 38만 원 혹은 39만 원이었다. 40만 원이 조금 안 돼서 기억하고 있다. 이때 하숙방 보통 시세는 40만 원~60만 원 정도였다. 좁은 만큼 싼 편이었다.

하숙집에서 내가 쓸 수 있는 구역은 방 하나, 공용 욕실, 윗 층 주인집의 부엌 정도였다. 한 층에는 4명 정도가 살았으며, 욕실을 같이 썼다. 방만큼이나 집의 전체적인 컨디션도 신경 써서 봐야 할 부분이었는데, 다행히 이 집은 부지런한 사장님 부부덕에 노후된 건물이지만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좁은 집의 부작용은 엄청났다. 이 방에 살았던 2년 넘는 시간 동안 나는 가장 우울했으며, 성질도 더러웠다. 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물론 과제가 많았던 탓에 거의 책상에 앉아있어야 했지만, 문제는 절대적인 공간이 좁아서 겪는 문제들이었다. 옷을 포함한 짐이 많던 시절도 아니었는데, 수납공간도 적어서 물건들이 다 밖으로 나와 있었고, 내가 작게 움직일 때마다 몸에 부딪히고 떨어지고 쏟아졌다. 행거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잤었는데, 겨울 옷을 걸어두면 행거가 머리 위로 쏟아질 듯했다. 아침에 일어나 눈 뜨면 옷자락이 보였다. 매일 그렇게 살다 보면 정말 미쳐버린다... 나는 자각하지 못했으나, 엄마는 니가 좁은 방에 살아서 성격이 안 좋아지고 있다고 정확하게 짚어서 말해줬고, 큰 방이 나오면 꼭 옮기자고 했다. 그러나 방은 나오지 않았고 2년 넘게 살게 됐다.


나는 이 곳에 살면서 집의 평 수가 사람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체득했다. 1인 가구가 살 수 있는 평수를 두고 논쟁하는 이 때에 경험으로 다 줘팰 수 있는 사람이 나다.


하숙집의 가장 안 좋은 점은 단연 욕실을 같이 쓴다는 것이다. 대부분 9시 수업을 들을 테니, 아침 8시가 넘어가면 욕실 눈치 싸움이 엄청나다. 지각할까 싶어 초조하게 기다리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차라리 아예 일찍 일어나서 씻고 위층에 올라가서 밥을 먹는 게 낫다. 암묵적으로 일찍 일어나서 씻는 사람과, 뒤에 씻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듯했지만 인간이 어떻게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겠는가... 하숙집에선 같은 층에 살더라도 모두가 데면데면했으므로 욕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아 누가 나왔겠구나. 씻을 수 있겠다' 생각하며 행동해야 했다.


밥은 정말 맛있었다. 디폴트 반찬은 장조림, 무말랭이였으며 늘 국물이 나왔다. 그냥 집밥으로만 먹어도 충분히 맛있지만 특식도 종종 나왔다. 날씨 좋은 봄이나 초여름엔 옥상에서 삼겹살 파티가 열렸다. 사장님은 삼겹살을 먹는 날엔 꼭 문자를 보내서 참석을 독려하시기도 했다. 타지 생활하면서 누군가 집에서 구워주는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꽤나 신선했었고, 내 주변인들에게도 큰 뽐뿌가 되곤 했다. 아침, 저녁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는데 나는 그 시간에 맞춰 시간표나 하루 루틴을 짰다. 밥도 잘 먹고, 그에 비례해 교류도 많아졌으므로 주인 가족분들이 나를 정말 잘 챙겨주셨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았던 하숙집이 정말 좋은 곳이라고만 생각했다. 나의 추천으로 친구, 선배 등이 나의 하숙집에 들어와서 산 적도 있었는데 같은 곳에 살아도 다 느끼는 게 달랐으므로 내 개인적인 경험에 따른 판단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안전하기도 했다. 학교와 가까운 것은 물론, 사장님들도 몇십 년 그곳에서 직접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소소한 사고도 없었다. 뭔가 께름칙하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사장님들에게 말하면 됐다. 여성 전용이었고, 95%이상 우리 학교 재학생 혹은 졸업생이었기 때문에 하숙생들 사이에서도 크게 불편할 일은 없었다.


이곳에 살다가 1년 간 농협 기숙사로 이사를 갔었지만, 다시 이 하숙집으로 돌아왔었다. 다른 방을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가장 실패 없고 안정적인 선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서, 어쩌면 아는 사람이 되어버린 하숙집 식구가 있었으니까. 이렇게 인연이 이어지다 보니 엄마는 하숙집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땐 선물을 보내주시기도 했다. 그러니 가족분들이 나를 더 잘 챙겨주시게 되고, 그렇게 큰 마찰 없이 하숙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휴학하고 새벽 마감 알바를 한 적이 있었는데, 매일 택시를 타고 퇴근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집에 도착하면 가족에게 연락을 했었는데, 별안간 새벽에 일이 너무 많아 마감 시간이 늦어지고 휴대폰을 볼 수도 없었던 날이 있었다. 그날 2시간 정도 늦게 퇴근하고 나오면서 휴대폰을 보니 가족은 물론 하숙집에서까지 전화가 엄청나게 와있었다. 내가 연락이 너무 안 돼서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셨고, 서울에서 나에 관해 연락할 수 있는 곳이 하숙집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다음 날 환상의 사죄쇼를 펼쳤던 기억이.


하숙을 살아봤다고 하면, <응답하라> 시리즈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기요 제가 90년대에 태어났는데요... 하숙생들 간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때는 밥 먹을 때인데, 매번 다른 시간에 올라가서 밥을 먹으니 늘 다른 멤버로 밥을 먹게 되고, 혼자 먹을 때도 많았다. 당시 10살 많은 직장인 언니가 밥 먹으며 종종 말을 걸어주셨는데, 코드가 안 맞아서... 하하^^;; 이러면서 진땀 흘리며 대답한 기억들이 있었다. (지금 내가 딱 그 언니 나이인데... 회사 가서 99년생한테 말 안 걸어야겠다ㅠㅠ) 나는 사장님이나 사장님 따님과 말을 많이 했다.


좁은 방에 살면서 성질이 한껏 더러워진 조폭같은 3학년이 되었고, 내가 누릴 수 있는 복지 하나를 뒤 늦게 알게 된다. 이름하여 농협장학관. 다음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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