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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집가장 Jun 02. 2024

북한산 바로 앞에 살아보기

우이동 농협장학관에서 50만 원으로 살았던 1년

좁은 하숙방에서 한껏 성질을 버리고 난 뒤, 내 고향과 가까운 곳에서 온 과 동기와 이야기를 하다가 '농협장학관'이라는 곳을 알게 됐다. 그 친구는 그곳에 살고 있다고. 그래서 자격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농협조합원의 조합원이면서 성적이 너무 낮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거 완전 낸데?" 


출처 : 농협재단 홈페이지

아빠에게 전화해서 조합원 복지에 대해 물으니, 가능한 것이 맞았고 지원해 보기로 했다. 당시 농협조합원의 자녀 교육 복지로는 서울의 '장학관' 입사 혜택과 소소한 장학금 제도가 있었다. 장학금은 받았는데, 장학관은 내가 왜 이걸 몰랐지 싶었다. 물론 고민이 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위치가 정말... 북한산 바로 앞(우이동)에 있었다. 버스 차고지 바로 앞이며, 북한산 등산로 입구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 학교로 통학하려면 1시간은 잡아야 했다. 학교는 서울 중앙인데, 결국 이렇게 서울의 가장 끝으로 간다는 생각은 덤이었다.


지금은 우이신설선이 있지만, 당시엔 한창 공사 중이었다. (세월아^^) 그래서 지하철을 타려면 버스 차고지에서 버스를 타고 수유역까지 가야 했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방세가 1년에 50만 원이었기 때문에 길거리에 시간을 버리더라도 들어가는 게 이득인 것이다. 학교 기숙사는 1개월에 45만 원 정도였다... 5만 원 정도만 더 얹으면 1년을 살 수 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요즘엔 1학기에 50만 원이라고 한다.

출처 : 농협재단 홈페이지

서울의 끝에 위치한 덕에 장학관의 모든 공간이 널찍했다. 특히 2인 1실을 사용했고, 모든 것이 복붙으로 2세트를 갖춘 일반적인 기숙사의 형태였지만 방 크기가 달랐다. 학교 기숙사는 침대, 책상, 책장을 제외하면 여유 공간이 침대에 침대 사이 좁은 공간밖에 없었는데, 농협 장학관은 침대 사이도 넓고, 침대 발 쪽에도 너른 공간이 있었다. 훌라후프 돌리기도 쌉가능. 당시엔 생긴 지 n 년밖에 되지 않아 시설이 매우 깨끗했다. 신기한 것은 이불까지 제공했다는 것... 살다 살다 이불까지 주는 기숙사는 처음이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빨간 체크 이불을 모두 같이 쓰고 있었다. 


룸메이트가 다른 학교인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서울 소재 대학에 다니는 농협조합원 자녀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다른 학교 사람과 살아본 것이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였는데, 학교는 다르지만 전공은 같아서 나름 공감대가 만들어졌다. 언니는 한 살 많으면서 나를 되게 아기같이 대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언니랑 큰 트러블 없이 잘 지내서 매일 같이 밥을 먹었다. 그리고 기숙사에서 같은 층에 사는 사람들끼리 모임 같은 걸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래서 또 다른 학교에 다니면서, 다른 방에 살고 있는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치킨 먹고 싶을 때 연락해서 같이 시키고, 룸메 언니가 없을 때에도 밥친구가 되어줬다.


이 장학관의 최고되는 장점은 단연 '밥'이다. 밥값이 따로 들지도 않는데, 퀄리티가 미쳐버린 것이다. 특히 농협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식재료 걱정은 할 일이 없다. 늘 신선한 국내산 식재료를 푸지게 먹어댔다. 그래도 애들 밥이라고 파리바게트 같은 fnb브랜드 제품들도 잘 나왔다. 그리고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들이 계시니 제철 과일을 '사생 OOO 부모님이 보내주신 과일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눔이 되기도 했다. 서울에서 이런 경험해볼 수가 있냐고요. 상경 이후 가장 잘 먹고 잘 살았던 호시절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때 아주 똥똥하고 피부가 좋았다.


공기도 좋았다. 산 바로 앞에 있기 때문에 창문을 열면 녹음이 보였고, 풀 냄새가 불어왔다. 대신 새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다... 아침에 새소리로 기상 가능한...^^ 시골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됐다. 


통학길은 많이 힘들었다. 특히 나는 막 3학년이 되었을 때 들어갔는데, 나름 고학년이다 보니 과제가 너무 많았다. 특히 국문과를 복수 전공하면서 욕심내서 산문 수업과 비평론 수업을 동시에 들어버려서... 매일매일 책을 너무 많이 읽어야 했다. 그래서 새벽 2-3시에 자는 게 디폴트였던 시절이다. 아침마다 너무너무 피곤했지만 수유역에서 지하철을 타면 절대 앉아서 갈 수가 없었다. 이미 그전에 탄 사람들이 다 앉아서 오기 때문이다. 충무로역에서 사람이 쫙 빠지면 응디 들이밀 수 있는 정도였다. 늘 학교 앞에서만 살다 처음으로 버스와 지하철을 환승하며 학교를 다녀봤다. 경기도에서 통학하는 친구들을 점점 이해하기 시작했다.


위치가 멀었고, 지하철도 이어져있지 않다 보니 통금 시간은 좀 맞추기 힘들었다. 나는 종종 이전에 아르바이트했던 여의도의 가게에 '대타'를 간 적이 있는데, 여의도에서 밤에 퇴근하고 우이동까지 오려면 교통편도 교통편이고 통금 시간을 지키기도 어려웠다. 늦으면 벌점을 받기 때문에 아예 일찍 판단해서 외박을 신청하고 새벽까지 술을 먹고 아침에 오곤 했다...^^ 그리고 수유역 분위기는 정말 1년을 살아도 적응이 안 됐다. 각종 야시시한 전단지가 판치는 그곳. 셔츠룸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그곳에서 환승하다 처음 알았다. 친한 대학 동기가 덕성여대 쪽에서 자취를 해서 덕성여대나  솔밭근린공원에서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 살면서 한 달 유럽여행도 다녀왔다. 다른 곳에 살았더라면 한 달 월세를 날리는 게 많이 아까웠을 것 같은데 이곳은 1년 이용료를 납부해놨고, 1개월 이용료로 환산해도 매우 저렴했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걱정, 밥 걱정 없이, 쾌적한 공간에서 학업에 집중할 수 있었던 1년이었다. 나는 대학 생활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공강을 활용한 교내 행정 근로 외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은 유일한 시절이기도 했다. 부모님과 나의 거주비 부담이 줄어들어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지역 출신으로서 서울에서 살아볼 수 있는 '비교적 특이한 주거 형태'가 아닐까 싶다. 한남동 소재의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하게 되어 다시 학교 앞으로 이사하며 1년의 가성비 기숙사 생활은 막을 내렸다.


내가 회귀한 곳은 어디일지... 다음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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