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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집가장 Jun 17. 2024

원룸 직거래해서 살기

도서관, 이마트만 있으면 돼

회사는 상암이었으나 마포구는 방값이 너무나 비쌌으므로, 나는 은평구 그중에서도 응암동의 원룸을 구한다. 당시엔 집을 구할 여유 자금과 기간이 빠듯했다. 그냥 빨리 구해서 빨리 들어갈 수 있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회사 탈주 계획과 맞물려 있었으므로 자세하게 적지는 못한다...)


아무튼, 2017년 당시에도 부동산 어플이 있었나 긴가민가하지만 보편적이진 않았고 나는 네이버 카페 <피터팬의 좋은 방 구하기>를 샅샅이 뒤졌다. 내가 원하는 조건은 보증금 500만 원/월세 50만 원 내/관리비 10만 원 내/여자가 살던 집 등이다. 지리적으로는 딱히 까탈스럽지 않았으므로 가격을 잘 맞추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던 중 카페에서 응암동의 한 원룸 사진을 보게 됐다. 6평 정도로 넓진 않았지만, 여성분이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놔서 깔끔하고 따뜻해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급매였기 때문에 가격도 딱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0만 원 그리고 이전 세입자분이 이사비도 조금 지원을 해준다고. 관리비도 5만 원이었다. 쪽지를 보내고 약속을 잡아 혼자 집을 보러 갔다. 아, 부동산 등기부등본을 떼서 보고 갔다. 내 나이 26살이었지만 나름 꼼꼼했네. 보증금이 적었기 때문에 크리티컬 한 결함은 없었다.


사진에서도 넓어 보이진 않았기 때문에 허위 매물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고, 전세입자분이 정말 친절하고 다정하셨다. (=여기에서 이미 마음 넘어감) 본인도 너무 잘 살고 있었는데, 직장 문제로 급하게 방을 빼게 돼서 아쉽다고. 뻥 같지 않았던 게 집을 꾸며놓은 게 여간 손이 많이 가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튼, 궁금한 것도 편하게 물어볼 수 있는 분위기라 이것저것 잘 살필 수 있었다. (사실 혼자 집을 보러 간 것은 처음이라 좀 떨리기도 했다) 계약할 것 같다고, 하게 되면 연락을 드리겠다고 하고 사택으로 돌아갔다. 딱히 걸리는 것은 없었지만, 뭔 아이스크림 사러 가는 것도 아니고 냉큼 "할게요!"라고도 할 수 없는 게 집 아닌가 싶었다. 엄마한테 허락받고 전세입자에게 의사를 전하고, 집주인과 연락을 하게 됐다.


집주인은 부동산을 통하면 복비를 내게 되니, 직거래를 하자고 했다. 중고나라도 아니고 직거래...? 어떻게...? 이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피터팬의 좋은 집 구하기 카페의 글들이 대부분 이런 형식으로 거래되는 것 같았고, 나도 급한 마당에 복비까지 내고 싶지 않아서 직거래에 응했다. 부동산 임대차계약서를 쓰고, 계약하려는 집 우체통에 넣어서 주고받았다. 그러니까 계약하는 과정에서 집주인을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50대 남성분이셨는데 내가 뭐 부탁하거나 물어보면 친절하게 다 대답해 주셨으므로 찐 부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자고로 건물주란 내 연락 잘 받아주고, 나한테는 연락 잘 안 하는 게 최고 아니겠냐며...

그렇게 입주한 원룸. 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건물이었고, 나는 6층에 살았다. 한 층에는 2 가구가 입주해 있었다.

건물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불광천이 있었고, 또 다른 방향으로 5분 정도 걸으면 이마트가 나왔으므로 생활권도 훌륭했다. 이마트에서 장을 봐서 밥을 해 먹고, 저녁엔 불광천에 나가서 달리기를 하는 것. 백수로서 내가 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이었다. 이 동네는 내가 살아본 서울 중 가장 물가가 저렴하기도 했다. 역시 중앙에서 멀어져야 살만한 것인지. 초등학교 근처에 살면 좋은 점은 분식점이 코앞이라는 점이다. 딱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떡볶이 맛이며 가격이 겁나게 싸다. 심지어 이 동네는 당시 붕어빵 시세가 5마리 1천 원이었다.


이 동네의 좋은 점은 도서관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즐겨 다녔던 은평구의 도서관을 나열하자면 이렇다.

1. 구산동 도서관 마을 : 만화 특화 도서관이라서 만화책 섹션이 따로 있고, (당시엔) 생긴 지 얼마 안 돼서 쾌적했고, 건물 디자인도 독특하다. 다만 특이한 디자인 탓인지 컨셉인지 정형화된 자리는 많이 없고, 약간 불편한 자리들이 많다.

2. 구립응암정보도서관 : 여기는 막 좋진 않은데... 연세 많은 분들이 많다. 딱 오래되고 작은 동네 도서관 느낌.

3. 구립증산정보도서관 : 여기도 꽤나 크기가 커서 갈만했다. 특히 자율열람실 자리가 낭낭해서 완독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4. (내 최애) 새절 내를 건너 숲으로 도서관 : 내가 응암동에 살던 중 생긴 완전 새삥 도서관이었다. 모든 공간이 널찍하고 깨끗했고, 메인 공간엔 빈백이 늘어져있어서 책 읽다가 잔 적도 많다. 가장 좋았던 건 역시 모두 새책이었다는 점. 실제로 내가 처음 펼쳐본 책들이 많아서 느낌이 너무 좋았다.


이 정도만 봐도 은평구는 도서관에 진심인 곳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백수가 되어서는 거의 매일 도서관에 가서 자소서를 쓰기도 했고, 책을 읽기도 했다.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많은 책을 완독한 시절이다. 도서관이 여러 곳이고 휴관일도 겹치지 않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점이 가장 좋았다.

또 나의 고향 친구가 은평구에서 직장을 다니고, 가까운 거리에 살기도 했다. 둘 다 힘들었던 시기라 누군가 가까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좀 힘이 됐던 기억. 학교 앞이 아닌 곳에 살면서 동네에 친구가 있었던 게 처음이었고, 이것 참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때 9개월가량 재취업을 준비하면서 혼자 보내야 하는 하루가 너무 길었고, 친구들은 근속연수와 경력이 쌓여가고 있었다. 2월에 퇴사하고 12월에 신입 공채로 새 회사에 합격하게 됐는데, 실업급여와 퇴직금은 11월에 바닥을 드러내서 카카오 비상금 대출을 받아 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시기를 후회하지 않는 건 그제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직시하게 됐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간을 겪은 이후에 누군가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한다면, 퇴사를 하라고 말한다. 퇴사를 하고 내가 알게 된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은평구에서 보낸 내 26살, 27살은 33살이 된 지금까지도 인생에서 꼭 필요한 때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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