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나는 아빠가 되었다.
2008년 늦여름쯤이었을 것 같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휴대폰으로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명확한 "두 줄"이 있는 플라스틱 막대가 보였다. 아내의 뱃속에 새로운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그날 저녁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 웃으며 아내를 꼬옥 안아주었다.
병원에 다녀와 임신했음을 확인하고, 그 소식을 양가 어른들께 알렸다. 어머니는 조카가 태어난 후 10년 만에 손주를 보시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쁘셨던지 몸이 떨려 간장 병을 들고 음식을 준비하시다가 그 간장 병을 떨어뜨리기까지 하셨단다.
나 역시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다만 그 이면엔 동전의 양면처럼 걱정과 불안이 생겼다.
첫 번째는, 내가 과연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걱정이었다. 이미 아이를 가졌고 너무 기쁜데 스스로 독립할 때까지 내가 정말 올바른 아이로 양육하고, 불편함 없이 키울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인 걱정이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겠다는 아내를 만류할 수는 없었다. 오롯이 내가 일을 하며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살아야만 하는데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인 걱정이었다. 금전 문제로 힘들어 자살까지 하는 마당에 내가 과연 이 세상에서 두 발을 굳게 디디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책임감과 무언의 압박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런 문제로 아이를 살해하고 스스로 자기 생을 마감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면 무척 가슴이 아프다. 때로는 나를 돌아보며 지금까지는 적어도 내가 그런 마음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다.
두 번째는,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날 것인가라는 걱정이었다. 생명으로 다가온 것이 고작 한 달도 채 안 지난 시점에서 이런 걱정을 한다는 것이 빠르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때는 이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영화 '하루'에서 그토록 바라던 아기에게 문제가 생겨 어쩔 수 없이 아기를 떠나보내야만 하는 장면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좋은 것을 생각하기보다 안 좋은 것을 먼저 떠올리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라 말하지만, 그런 생각과 감정이 생기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을 듯하다.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생각 안 해 본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아내는 하루하루 엄마 모드로 들어갔다. 아이에게 좋을 거라며 그림을 그렸고, 직접 손으로 아이에게 줄 베개를 만들기도 했다. 퇴근해 씻고 나온 내 손을 붙잡아 배 위에 올려놓고는 "우리 아기한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줘. 아빠의 저음 목소리를 아기들이 더 좋아한데" 라며 재촉했다. 건널목을 건너는 동안에도 배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우리는 지금 건널목을 건너고 있어. 길을 건너가서 우리는 맛있는 식사를 할 거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매일매일의 우리의 일상은 온통 아기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09년 5월의 어느 날. 잠을 자고 있는데 아내가 나를 툭툭 치며 나를 깨운다.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그 즉시 미리 챙겨둔 짐을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4시간 30분여의 진통 끝에 아이를 낳으러 분만실로 들어갔다. 얼마 후 아이는 "응애 ~ 응애 ~" 하며 세상으로 나왔다. 간호사 선생님은 탯줄을 자르라며 가위를 내 손에 쥐어준다. 순간의 긴장감은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이해할 것 같다. 한 번에 자르지 못하고 두 번 만에 탯줄을 자른 뒤 간호사 선생님들은 테이블에 아기를 눕히고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손도장 발도장을 찍었다. 그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마디.
사진 찍어도 되나요?
열심히 되는대로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아내는 어떻게 그 순간에 사진 찍어도 되냐는 말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며 웃었다) 그리고 아내의 품에 아이를 안겼다. 쭈글쭈글한 얼굴에 한쪽눈만 가늘게 뜨고 있는 아이와 아내를 보았다.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는 아빠들도 많다던데 그렇지는 않았다. 그저 아이와 아내가 건강한 것에 감사했을 뿐이었다.
아내는 입원실로, 아기는 신생아실로 이동했다. 그 오랜 세월 혼자서 온갖 고통을 견뎌내며, 체력이 약해 자연분만을 할 수 있을지를 걱정하며 지냈던 세월들을 떠 올리며 아내를 오랜 시간 꼬옥 안았다.
고생했어. 많이 힘들었지? 자기랑 아기가 다 건강해서 다행이야
시간이 얼마간 흐른 후 나의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무척이나 떨렸다. 오롯이 가져보는 둘 만의 만남이 기대됐다. "내가 아빠인걸 알까?", "눈 뜬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등등 온갖 질문이 떠오르며 묻고 싶어졌다. "내가 네 아빠야~!!"라며 외치고 싶었다. 신생아실로 가서 창문을 톡톡 치고 간호사에게 아기를 보여달라 요청했다. 그리고 잠시 뒤 유리 창문 너머 우리 아들이 보였다.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예쁘다기 보단 아직은 쭈글쭈글하고 뭔가 정리가 필요할 듯한데 그냥 미소가 절로 나왔다.
우리 한 번 잘해보자. 아들
창문 너머 아들에게 던진, 아빠로서의 첫 번째 말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빠라는 역할이 추가됐다. 추가됐다는 말이 어색하지만 아들, 남편, 동생 등등의 역할로 살아오던 내가,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둘도 없는 막중한 역할을 기꺼이 부여받았다. 아내가 잘 회복할 수 있도록 입원실이며 식사며 온갖 것들을 챙겨주는 것도 최우선으로 신경을 썼다. 이때를 잘 넘기지 못하는 남편들은 두고두고 타박을 받기 일쑤다.
모든 것이 감사했고 또 감사한 순간이었다.
결혼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고, 기대감보다는 걱정이 앞섰던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모두가 축하해 줘서 감사했고, 아내와 아기가 건강해서 감사했다. 지금까지도 이 말 밖에는 더 이상 어떠한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빠로서의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수많은 것들이 머릿속에 떠 올라 내 몸을 감쌌다. 내 몸속에 생명이 자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구역질을 참아내는 것도 아니고, 내가 힘을 써서 아이를 낳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벅차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는 그 무언가다.
그래서, 가끔 출산을 앞두고 있는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된다. 그저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무언가 떠오르는 수많은 감정과 단어들이 있을 텐데 나쁜 것만 아니라면 그 자체로 며칠 동안은 충분히 행복해하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