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어야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할 수 있다.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진 나는 앞으로를 생각해야 했다.
교육과 인사에 나름 경력을 쌓아온 내가 전혀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잠시 하긴 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너무 지겹고 상처를 많이 받아왔던지라 정말 떠나고 싶은 욕구도 엄청나게 많았다. 다른 일을 하기로 맘먹지 않은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돈이 없어서'...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투자하고 시도할 수 있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자책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남들 다 모은다는 돈도 못 모으고 뭐 하고 살아온 거야...' 대기업에서 팀장을 달고 권력을 휘두르며 일하는 친구들, 부모님 건물로 대출을 받아 또 건물을 짓고 그 임대 수익으로 생활하며 회사는 용돈벌이 하듯 다니는 친구, 백화점 MD로 입사해서 과감히 때려치우고 나와 이제는 200억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친구들이 생각났다. 이들에 비하면 난 그저 루저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교육이다. 20년 넘게 이쪽 일을 해왔으니 뭐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였다. 무언가 끄적대기 시작했다. 일단 이력서는 다시 정리해야 했다. 해왔던 일들을 주~욱 나열했다. 다 쓰고 보니 일관성이 없다. 교육을 했다가 인사를 했다가 중간에 컨설팅을 했다가 또 창업을 했다가... 어느 하나 보란 듯이 전문가라고 보일만한 흔적은 없었다. 그래서 이력서를 여러 가지 버전으로 만들었다. 인사기획과 성과관리 전문가, 교육사업 기획과 운영 전문가, 인사 컨설턴트.... 뒤죽박죽 경력이지만 이렇게라도 정리를 해놓으니 한결 기분은 나아진다.
그다음은 다시 창업의 세계에 대한 고민으로 들어간다. 창업... 말만 들어선 장밋빛 미래를 그릴 것 같지만 교육시장은 엄청난 레드오션 세계이기도 하다. 교육 철학이 너무나 훌륭하고 사업도 잘하고 있는 곳도 있지만 간혹 교육의 철학이며 무엇을 위한 교육인지도 모르는 정말 돈벌이 수단으로 교육을 하겠다는 곳도 많다. 코딩만 잘하면 원하는 대학에 무조건 갈 수 있다, 코딩만 잘하면 대기업에 그냥 들어갈 수 있다며 현혹하는 광고들도 넘쳐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쨌든 돈을 벌고 있다.
창업... 한번 실패했는데 또 할 수 있을까. 교육의 철학을 만들고 사업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구체적인 커리큘럼을 만들어낼 지식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함께 할 사람이 필요한데 어디서 어떻게 끌어와야 할까라는 현실적인 고민이 이어졌다. 두 번째의 창업은 완벽하게 구도가 갖춰져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저런 현실의 고민에 휩싸여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고 하루하루 스트레스는 쌓여갔다. 그러던 중 이메일을 보다가 어느 재단에서 보내준 뉴스레터를 읽게 됐다. 주로 힘들게 살다가 극복한 이야기들을 다루는 내용이 많았는데 큰 관심이 없다가 '나'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주제가 눈에 보였다.
모든 것에 '나'가 있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단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SNS에서 본 광고 하나가 생각이 났다. 심리상담 애플리케이션 광고다. 나에 대해 알아야 했다. 도대체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이며 왜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지, 왜 진도를 나가고 있지 못하는지를 알고 싶어 졌다.
애플리케이션을 휴대폰에 설치하고 바로 결재를 눌렀다. 성향파악 프로세스가 진행된다. 직접 대면하면 또 다른 기분이 들었겠지만 그래도 저렴하게 할 수 있어 좋다. 결과를 기다린다.
당신은 엄격한 완벽주의자 성향을 지니셨군요
내가 완벽주의자라고? 근데 그게 안 좋은 거야?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모든 일은 완벽한 준비가 되어야만 온전하게 실행할 수 있다고 믿어왔는데 그게 문제였다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래 내용을 더 읽어 본다.
목표와 기준이 높아 쉽게 만족하지 못하고 지칠 수 있다
"제대로 해야 한다"는 압박에 오히려 미리 포기하거나 시작을 미룬다
실수나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끊임없이 점검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 밖에 몇 가지 성향이 나오는데 불안에 민감하고, 미움받는 게 두려우며 화내고 후회하는 성향 등등 몇 가지가 나온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전혀 고민해 본 적 없는 나를 만났다.
3일 정도를 꼬박 내가 왜 이런 성향들을 갖게 되었을지를 살폈다. 나의 결론은 하나였다. 그동안 '나'가 중심이 된 삶이 아니라 '남'이 중심이 된 삶이었다. 내가 아닌 타인을 의식하고 그들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기 위해 공부를 하고 일을 해왔다는 거다. 그토록 즐겁지 못하고 억지로 해야 할 수밖에 없던 나의 지난날들이 이해가 됐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완벽한 사람' 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스스로 생각해도 완벽하지 못하니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냐는 질타를 받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어렵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정작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에 무척이나 자존심 상해하던...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날들이었음을 알게 됐다. 그러니 언제나 답답하고 불안한 인생을 살 수밖에...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했다. 그래서 나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펴보고 알아야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 과정은 진행 중이다. 얼굴 한번 보지 못했지만 그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내가 읽어볼 수 있도록 내용을 작성해 주신 그분들께 깊이 감사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난 지금 이 순간도 혼자서 자책하며 힘들어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을 테니...
'나'를 위해 살아보기로 했다. 나의 정신상태부터, 나의 마음이 바로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했다. '남'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나'가 만족할 수 있도록 '남'을 만족시켜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내가 있어야 타인도 있다. 교육사업이든 인사 든 간에 내가 불안한데 그들에게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다짐을 하게 된 후 정신의학 교수님들이나 심리상담가들이 쓴 여러 권의 책을 사서 읽었다. 하나같이 주옥같은 말들이다. 이전과 또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가기 전에 나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 이 시간들을 감사한다. 마치 카메라로 증명사진을 찍듯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살펴볼 기회를 갖게 됐다. 힘들다고 나 혼자서 자책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는 시간, 반성보다는 앞으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보다 집중하는 것이 일단 나를 세우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매일매일 하루를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나는 오늘 하루 마음상태는 어땠는지 기록해 보고,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살핀다. 언제 끝낼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영원히 이런 과정을 지속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한순간에 바뀌지 않는다던데 기한 없는 성찰의 시간을 통해 가벼운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