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입부: 왜 기차역은 도시를 살리지 못하는가?
한국의 기차역은 역설적 공간이다. 도시의 관문이자 유동인구의 중심지이면서도, 그 주변은 종종 도시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있다. 매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오가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기차역은 주변 상권과 도시 활성화에 기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구의 도시들에서 기차역은 역사적으로 도시의 중심 공간으로 기능해 왔다. 런던의 킹스크로스, 파리의 가르 뒤 노르, 밀라노 중앙역 등은 단순한 교통 시설을 넘어 상업, 문화, 관광의 허브로 자리 잡았다. 역사 건물 자체가 도시의 랜드마크이자 문화재로 보존되며, 역사 주변은 자연스럽게 도시의 활력 있는 중심지로 발전했다.
그러나 한국의 기차역은 다르다. 교통의 요지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상권은 침체되어 있고, 도시 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하지 못한다. KTX로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이 되었다지만, 정작 고속철도가 정차하는 역 주변은 도시의 '사각지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왜 한국의 기차역은 도시를 살리지 못하는 것일까?
2. 익산역 사례: 호남권 최고의 교통 요충지, 빈약한 상권
익산역은 이 역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호남권에서 가장 바쁜 기차역 중 하나인 익산역은 장항선, 전라선, 호남선 등 3개의 주요 철도 노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다. 하루에도 수많은 열차가 정차하고, 수만 명의 승객이 이용하는 핵심 교통 시설이다. 서울에서 익산까지 KTX로 불과 1시간 10분 거리에 위치하며, 전북 지역의 관문 역할을 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산역 주변 상권은 공동화 현상이 뚜렷하다. 역 앞 중앙동은 한때 익산의 중심 상권이었지만, 현재는 침체된 원도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익산역(구 이리역)의 역사를 살펴보면 현재 도시가 직면한 문제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이리역은 처음부터 도시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구조였다. 당시 승객들이 역에서 내리면 바로 마주치는 두 개의 중심가로가 있었다. 하나는 역사에서 동서 방향으로 뻗어나간 신정통이고, 다른 하나는 철도 선로와 평행하게 남북으로 이어지는 영정통(현재의 문화예술의 길)이었다. 이 두 중심가로가 십자형으로 교차하며 사람과 상업 활동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유기적인 도시 구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는 이 도시 구조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사고 이후 재건 과정에서 역사와 영정통 사이에 6차선의 넓은 익산대로가 건설되었고, 역사 자체도 이전되면서 기존의 동서 중심가로인 신정통 대신 50미터 남쪽에 위치한 현재의 중앙로가 새로운 중심가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과거의 조화로운 도시 구조가 무너졌고, 두 중심가로의 기능이 모두 약화되었다. 역사와 도시 중심부 사이의 자연스러운 연결이 끊어진 이 구조적 문제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채 익산 원도심 침체의 주요 원인으로 남아있다.
3. 익산역이 예외인가? 전국 KTX역의 공통된 비극
익산역의 사례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한국 전역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전국의 대부분 KTX 정차역 주변은 역사 자체의 교통량과 무관하게 도시 활성화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 도시 계획 측면에서 역사와 상권의 분절이 가장 큰 문제다. 대부분의 한국 기차역은 역사 앞에 대로가 놓여 있어 보행 접근성을 저해하고, 역사와 상권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방해한다. 익산뿐만 아니라 대전, 동대구, 광주송정역 등 주요 KTX 정차역 앞에는 대개 6차선 이상의 대로가 놓여 있어 역에서 내린 사람들과 주변 상권 사이에 물리적 장벽을 형성한다.
둘째, 역사의 빈번한 이전과 재건축이 도시 구조의 안정성을 저해했다. 역사적으로 기차역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전통시장과 유락가가 형성되었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역사가 빈번하게 이전되거나 재건축되면서 이러한 유기적 연결이 단절되었다. 새로운 상권과 도시 문화 형성은 안정적인 건축환경과 충분한 시간을 요구하지만, 한국의 기차역은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셋째, 새로 형성된 역사 지구는 대개 신도시 계획 논리에 따라 설계되었다. 넓은 광장, 대형 상업시설, 고층 건물 위주의 개발은 인간 척도를 무시하고 보행 친화적 환경 조성에 실패했다. 또한 대규모 개발 사업은 소규모 창의적 업체들의 진입 장벽을 높여, 다양하고 활기찬 상권 형성을 저해했다.
4. 익산시 해결책 - 복합환승센터의 한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익산시를 비롯한 많은 지방 도시들이 추진하는 대표적 해법은 역사 복합개발이다. 익산시 역시 총 2조 원이 소요되는 복합환승센터 건립을 계획 중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개발 사업이 과연 도시를 살릴 수 있을까?
국내 복합환승센터 개발 사례를 살펴보면 그 한계가 명확하다. 동대구역, 의정부역, 영등포역, 용산역 등 복합개발을 추진한 역사들은 내부 상업시설은 활성화되었을지 모르나, 주변 원도심 상권 활성화와 도시 재생으로 이어지는 데는 실패한 경우가 많다. 오히려 복합환승센터 내부로 상권이 집중되면서 주변 지역과의 격차가 더욱 심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최근 복합환승센터 내부의 공실률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대 자본을 투입해 건설한 대형 복합시설이지만, 실질적인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빈 공간으로 남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특히 지방 도시의 경우, 인구 감소와 지역 경제 침체로 인해 대형 상업시설의 지속가능성이 더욱 의문시된다. 결국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실률 증가로 인한 또 다른 도시 문제를 양산할 위험이 있다.
복합환승센터는 대개 대기업 자본에 의한 대형 쇼핑몰, 오피스, 호텔 등이 복합된 구조로,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획일화된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는 지역의 특색과 정체성을 반영하지 못하며, 소규모 창의적 비즈니스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대규모 자본의 환수를 통한 원도심 불균형이 심화될 위험이 크다.
5. 건축 주도 크리에이터 타운이 답이다
익산역과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대안적 접근은 무엇일까? 필자는 동네 단위 혁신 생태계의 개념을 바탕으로, 익산 원도심을 어떻게 크리에이터 타운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건축환경 복원 차원에서 익산대로의 지하화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역사와 원도심 사이의 물리적 장벽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보행 친화적인 공원과 가로를 조성함으로써 중앙로와 상업가로를 재활성화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도로 정비가 아니라, 도시의 근본적인 동선 체계를 회복하는 작업이다.
크리에이터 타운은 대기업 자본이 아닌 개인 창작자들의 집적과 협업이 공간과 문화를 형성하는 도시 모델이다. 이 모델은 직장·주거·여가가 가까이 위치한 '직주락 근접성', 복합용도 공간, 커뮤니티 기반의 문화 생산을 특징으로 한다. 익산 원도심의 중앙동은 이러한 크리에이터 타운이 형성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지역 자원을 활용한 콘텐츠 제작과 생산을 지원하는 메이커스페이스를 구축해야 한다. 이 공간은 단순한 작업 공간을 넘어, 교육, 네트워킹, 마케팅, 판매까지 통합적으로 지원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해야 한다. 백제 문화 디자인, 식품 가공 및 요리, 패션 및 공예, 디지털 콘텐츠 등 익산의 특색을 살린 다양한 콘텐츠 개발이 가능하다.
원도심 콘텐츠는 지역 자원을 활용한 로컬 콘텐츠뿐 아니라, 커피, 베이커리, 독립서점, 게스트하우스, 복합문화공간 등 글로벌 콘텐츠와, 공유 주거 및 공유 오피스와 같은 직주락 콘텐츠를 함께 포함해야 한다.
익산역이 진정한 도시의 관문이자 활력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대규모 복합환승센터와 같은 하드웨어 중심의 접근이 아니라, 원구도심 건축마을을 기반으로 한 크리에이터 타운 조성이 필요하다. 건축이 주도하는 크리에이터 타운 조성은 단순히 경제적 활성화를 넘어, 익산이라는 도시의 정체성과 문화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강화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