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입부: 왜 대학은 도시를 살리지 못하는가?
한국의 대학은 모순적 공간이다. 국가의 지식 생산과 인재 양성의 중심지이자 수천, 수만 명의 청년들이 모이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대학 주변은 종종 도시에서 가장 쇠락하는 지역으로 전락한다. 주변 상권과 도시 활성화에 기여하지 못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미국과 유럽의 도심 대학 캠퍼스들은 역사적으로 도시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앵커 시설로 기능해 왔다. 보스턴의 하버드 스퀘어, 옥스퍼드의 하이 스트리트,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 주변 등은 단순한 교육 기관을 넘어 지역 경제, 문화, 혁신의 허브로 자리 잡았다. 시라큐스, 피츠버그, 클리블랜드 같은 탈산업화로 쇠락하던 도시들이 대학을 중심으로 재생에 성공하며 '지식 경제와 창조 도시'로 변모했다.
그러나 한국의 대학은 다르다. 왜 한국의 대학은 도시를 살리지 못하는 것일까?
2. 연세대 사례: 서울 서부권 중심 대학, 쇠락하는 신촌 상권
서울 서부의 대표적인 명문대학이자 수만 명의 학생과 교직원이 모이는 연세대학교 주변의 신촌은 한때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 중심지였다. 1990년대까지 명동, 종로와 함께 강북의 3대 상권으로 군림했으며, 신촌블루스, 해바라기, 한경애의 활동 무대로 7080 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러나 현재 신촌은 경쟁력을 상실한 채 쇠락하고 있다. 2000년대 청년과 패션 문화가 홍대로 이동하면서, '대학가'라는 어휘에 걸맞지 않게 프랜차이즈와 직장인 중심 유흥가로 변질되었다. 2014년 시작된 대중교통 전용지구 사업으로 연세로가 '차 없는 거리'로 바뀌었지만, 상인들은 오히려 이면도로의 상점을 찾는 손님이 크게 줄었다고 호소한다.
연세대와 주변 상권의 관계를 살펴보면 대학 도시가 직면한 문제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핵심에는 대학 도시가 지닌 본래의 기능, 즉 대학 구성원을 위한 주거지 기능의 상실이 있다. 1940년대 택지 개발 사업으로 형성된 대신동(현 이대 후문, 연대 동문)은 본래 연세대와 이화여대 교수들이 모여 사는 '대학촌'이었다. 그러나 1960-70년대 금화터널 건설 등 도시 인프라 사업으로 동네의 규모가 축소되었고, 양 대학이 점차 주변 땅을 매입하면서 더욱 축소되었다.
연세대의 또 다른 주거지였던 연희동은 1960년대 서교, 성산, 연희 택지구획정리사업으로 조성된 단독주택 지역으로, 한때 연세대 교수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던 대표적인 대학촌이었다. 특히 연세대 북문과 서문에 가까운 지역에는 학교에서 제공한 연세대 교수 주택이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강남 개발과 아파트 선호 현상으로 단독주택을 떠나는 교수들이 늘어나면서, 기존 주택들은 학생들 대상의 원룸이나 다세대주택으로 대체되었다.
도시 공동체에 대한 대학의 인식은 캠퍼스 내부 상업 시설의 확충에서도 드러난다. ECC 복합개발, 백양누리, 세브란스병원 상가 등 캠퍼스 내에 다양한 편의시설과 상업시설이 들어서면서 학생들의 외부 상권 이용률이 크게 감소했다. 신촌 상인들은 "대학들이 캠퍼스 안에 상가를 조성하고 지역 상인이 단결하지 못해 쇠락한다"라고 어려움을 토로한다. 대학과 지역 상권의 경제적 분리, 구성원과 지역 주민의 사회적 분리, 그리고 상생을 위한 제도적 노력의 부재가 신촌 쇠락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3. 연세대가 예외인가? 전국 대학의 공통된 비극
연세대와 신촌의 사례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한국 전역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국내 대부분의 대학 주변은 대학 자체의 발전과 무관하게 도시 활성화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 한국 대학의 공간 구조가 가장 큰 문제다. 한국 대학은 초기부터 도시형이 아닌 전원형 캠퍼스로 조성되어 주변 상권과 생활권으로부터 격리되었다. 미국이나 유럽의 도시 대학들이 도시 조직과 유기적으로 결합된 것과 달리, 한국 대학은 담장과 경계로 구분된 '섬'처럼 존재한다. 지방의 경우, 대부분의 신흥 대학이 부동산 가격이 저렴한 도시 외곽지역에 위치해 도심과의 연결성이 약하다. 일부 대학의 경우, 캠퍼스를 여러 번 이전해 대학가 형성 자체를 저해했다.
홍대, 이대 등 예외적으로 활발한 대학가를 형성한 대학들의 경우, 대학 정문과 상권이 골목길로 자연스럽게 연결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결과 소통을 위한 공간 구조가 대학과 도시의 상생을 위한 기본 조건인 것이다. 물론 대학과 상권의 연결성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대 상권이 경우 연결성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유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둘째, 대학 주변의 도시 공간 구조도 단절과 분리를 강화한다. 신촌은 구조적으로 '걷고 싶은 거리'와는 거리가 멀다. 대중교통 전용지구 사업을 시행했지만, 여전히 대형 매장과 프랜차이즈 가게, 좁은 골목과 자동차 길이 혼잡하게 얽혀 있는 전형적인 대로변 상권에 불과하다. 홍대 지역이 저층 건물과 격자형 골목길을 통해 연남동, 연희동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된 것과 대조적이다.
셋째, 대학 자체가 캠퍼스 중심의 폐쇄적 개발 방식을 고수한다. 연세대뿐만 아니라 많은 대학들이 캠퍼스 내에 복합 상업시설을 조성하고, 기숙사, 학생회관, 편의시설을 확충하면서 학생들의 외부 지역 이용 필요성을 줄였다. 내부 상가 조성은 대학과 지역 간의 경제적, 문화적 선순환을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넷째, 대학의 지역 정체성 부재도 중요한 문제다. 한국의 대학들은 스스로를 지역 대학으로 인식하지 않고, 지역 발전에 대한 사명감이 부족하다. 미국의 시라큐스대학이 도심 재생 사업에 4천만 달러를 투자하고, 피츠버그대학이 지역 경제의 핵심 축으로 기능하는 것과 달리, 한국 대학은 지역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약하다.
다섯째, 탈산업화 시대에 대학이 지역 경제 혁신의 중심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학 정책은 여전히 정원 조정과 구조조정 중심으로 진행된다. 대학을 단순한 교육기관으로 인식하는 근시안적 발상이 대학의 지역 경제 발전 기여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다.
4. 서대문구 해결책 - 경의선 지하화
신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대문구는 신촌 재생 사업의 핵심으로 경의선 지하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경의선은 현재 연세대, 이화여대, 홍익대를 잇는 서대문구 대학 벨트를 가로지르며 지역을 단절시키는 물리적 장벽으로 작용한다. 이 철로를 지하화하고 그 위에 공원과 보행 친화적 공간을 조성한다면, 단절된 대학 지역을 통합하고 새로운 문화·경제 축을 형성할 수 있다.
경의선 지하화는 여러 측면에서 서대문구 대학 지역의 연결성을 강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첫째, 현재 철로로 인해 단절된 서대문구 북측과 남측의 물리적 연결이 가능해진다. 둘째, 지하화로 생기는 지상 공간은 새로운 문화·공공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연세대, 이화여대, 홍익대를 중심으로 하는 대학 문화 축을 형성하고, 각 대학의 특성을 살린 문화·창업 거점을 조성할 수 있다. 셋째, 홍대 지역에서 시작된 경의선숲길의 연장선상에서 신촌 지역까지 보행 친화적 녹지축을 형성함으로써, 홍대의 골목문화가 신촌으로 확장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경의선 지하화는 신촌과 대학 지역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 특히 연세대와 신촌 상권 사이에 있는 성산로(6-8차선 대로)가 그대로 존재하는 한, 철로의 지하화만으로는 연결성 개선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철로가 지하화 되더라도 성산로가 여전히 보행자의 자연스러운 이동을 방해하는 물리적 장벽으로 기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하화 된 공간에 새로운 공원과 건축물을 공급하는 방안도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단순한 공원화는 오히려 대학과 신촌 사이의 간격을 더 확대할 수 있다. 신촌의 문제는 건축물의 부족이 아니라 건축물과 가로의 연결 방식, 그리고 그 안에 담기는 콘텐츠의 경쟁력 부족이다. 따라서 경의선 지하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연세대와 이화여대가 주변 지역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화여대가 2016년 중소기업청 지원을 받아 정문 앞 골목상권을 '이화여대 52번가'로 재생한 사례는 대학이 지역 상권 재생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직까지 연세대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학은 지역 개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경의선 지하화가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물리적 환경 개선과 함께 대학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역과의 상생 모델 구축이 필수적이다.
5. 건축 주도 크리에이터 타운이 답이다
신촌과 대학 중심 지역의 진정한 재생을 위해서는, 단순한 물리적 환경 개선이나 상업 시설 확충이 아닌, 건축을 통한 창조적 공간 재구성과 문화 생태계 조성이 필요하다. 필자는 신촌 지역을 크리에이터 타운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홍대 지역의 성공적 발전 사례는 신촌 재생의 중요한 참고점이 될 수 있다. 홍대는 1984년 지하철 2호선 개통 이후 초기 성장을 시작했지만, 그 확장과 발전의 핵심에는 독특한 공간 구조가 있었다. 홍대 지역은 보행 환경이 양호한 이면도로와 골목길로 연결된 7개 행정동 규모의 광범위한 저층 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다. 와우산로, 어울마당로, 동교로, 성미산로 같은 '골목길 간선도로'가 상권 간 연결성을 강화하며 자연스러운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
신촌의 재생을 위해서는 우선 건축환경 복원 차원에서 단절된 도시 흐름을 회복해야 한다. 홍대가 연남동과 연희동을 연결한 두 개의 굴다리처럼, 연세대와 신촌 상권 사이의 성산로를 가로지르는 보행 친화적 연결로가 필요하다. 또한 신촌 내부에 걷기 좋은 골목길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홍대처럼 주변 지역과의 수평적 연결을 확대해야 한다.
둘째, 홍대의 성공이 단순히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홍대 발전 과정에서는 다양한 문화적, 제도적 지원이 있었다. 서울시의 '홍대의 장소 마케팅' 조사(2002), 문화지구 타당성 조사(2007), KT&G 상상마당과 같은 민간 앵커시설, 홍대 클럽데이(2001), 홍대 프리마켓(2003), 와우북페스티벌(2005) 같은 지역 축제가 홍대 문화의 토대를 형성했다. 신촌 역시 이러한 문화적 앵커와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셋째, 연세대는 시라큐스대학 모델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시라큐스대학이 디자인대학원을 도심으로 이전하고 도시 재생에 투자한 것처럼, 연세대도 도시환경대학원이나 디자인대학원을 신설하고 이를 신촌 지역에 배치해야 한다. 이러한 시설은 단순한 교육 공간을 넘어 KT&G 상상마당처럼 북카페, 소극장, 독립서점, 편집숍 등 캠퍼스타운에 어울리는 상업시설을 포함한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해야 한다.
넷째, 홍대의 창업 생태계를 참고한 소규모 창조 산업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 홍대 지역은 홍합밸리(2012)와 같은 민간 창업 지원과 서울시 신홍합밸리(2016) 같은 공공 창업 지원을 통해 창업 생태계를 구축했다. YG(1996), 스타일난다(2012), 애경(2018) 같은 기업 본사 이전도 지역 발전에 기여했다. 신촌도 이처럼 청년 창업가와 문화 예술인들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저렴한 공간과 지원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다섯째, 탈산업화 시대에 대학이 새로운 산업의 인큐베이터가 되어야 한다. 피츠버그가 철강 도시에서 보건, 바이오, IT 중심의 창조도시로 변모한 것처럼, 연세대를 중심으로 한 신촌 지역도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 연세대는 창업 지원, 산학협력, 도시 문제 해결형 연구를 확대해야 한다.
크리에이터 타운은 대기업 자본이 아닌 개인 창작자들의 집적과 협업이 공간과 문화를 형성하는 도시 모델이다. 이 모델은 직장·주거·여가가 가까이 위치한 '직주락 근접성', 복합용도 공간, 커뮤니티 기반의 문화 생산을 특징으로 한다. 신촌 지역은 홍대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크리에이터 타운이 형성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신촌이 진정한 대학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물리적 인프라 중심의 접근이 아니라, 건축이 주도하는 크리에이터 타운 조성이 필요하다. 건축 주도의 크리에이터 타운 조성은 단순히 경제적 활성화를 넘어, 신촌이라는 도시의 정체성과 문화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강화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