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목길 경제학자 Apr 14. 2017

쇼핑거리 디자인의 정석, 마루노우치 나카도리

마천루 숲에서 골목길을 인의적으로 조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마루노우치 나카도리를 경험해보라. 마루노우치 일대는 도쿄역과 황궁 사이에 위치한 도쿄 경제 제 1번지다. 여기에 일본 정부와 민간 기업 미츠비시지쇼가 도쿄의 대표 쇼핑거리를 멋지게 건설했다. 글로벌 도시 도쿄도 이제 뉴욕의 맨해튼 5번가, 파리의 샹젤리제에 버금가는 쾌적하고 화려한 다운타운 쇼핑거리를 선보인다.


나카도리를 탄생시킨 마루노우치 재개발 사업은 1980년대 시작됐다. 단일 회사가 36만 평(120 헥타르) 규모의 지역을 재개발하는 사업이어서 처음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부동산 재벌 미츠비시 사업자 선정, 용적률 대폭 완화, 대형쇼핑몰 건축, 골목 철거 등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쳐 도쿄의 그랜드 에비뉴가 성공적으로 탄생했다. 혹시 미츠비시지쇼가 마루노우치에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


차 없는 거리에 노천카페를 설치한 마루노우치 나카도리


먼저 그들이 도시재생 기본에 충실했다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


다른 도심 개발 사업과 달리 가장 눈에 띈 것은 거리 경관이다.


공공미술, 차 없는 거리, 화단, 가로수, 가로등, 벤치로 나카도리에 아름다운 거리 풍경을 입혔다. 벼룩시장, 거리 전시회, 노천카페로 채워진 나카도리는 맨해튼의 어느 거리보다 생명력 넘친다.


미츠비시 이치고칸(1호관)미술관, 도쿄 국제포럼 아이다 미츠오 미술관, 마루빌딩 갤러리, 거리 공공미술 등 수많은 문화 시설을 배치해 나카도리를 문화거리로 만든 점도 거리의 품격을 높였다.


메이지 시대 건축물을 보전한 마루노우치 파크 빌딩 1호관


레트로(Retro) 건축도 특징적이다. 마루노우치 파크 빌딩의 이치고칸, 쇼핑몰 키테(KITTE)의 우정국 건물 전면, 1923년 준공 당시의 마루노우치 빌딩 현관 등 메이지 시대의 건축물들을 보전하고 복원했다.




골목 분위기를 발산하는 나카도리 도시미학

 

나카도리가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공적으로 조성한 대로가 마치 필자가 사랑하는 골목길처럼 느껴진다. 단순히 차 없는 거리로는 재현할 수 없는 이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시간이 지나자 그 이유가 보이기 시작했다.


첫째, 고층 빌딩을 저층부와 고층부로 나눠 착시효과를 일으켰다.


매일경제 박인혜 기자의 표현대로 "눈썹을 맞춘 듯 저층부 높이를 31m로 통일해 가로경관을 맞췄다. 과거 일본이 지진으로 몸살을 앓을 때 현재처럼 내진기술이 없어 건물 높이를 31m로 제한했던 역사를 입힌 것이다."


고층 건물 사이의 대로에서 골목길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가로수


둘째, 일렬종대로 선 가로수도 한몫했다.


거리를 뒤덮을 만큼 높고 무성한 가로수가 있어 고층 빌딩 속을 거닌다기보다 울창한 숲길 속에 있는 느낌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고층건물의 존재는 까맣게 잊을 수 있다.


촘촘한 볼거리를 만든 고층 빌딩의 저층 상가


셋째, 건축가 유현준이 강조하는 볼거리의 밀도와 우연성을 인의적으로 창조해냈다.


밀도는 거리와 빌딩 내에서 동시에 체험할 수 있다. 길게 뻗은 고층 건물의 거리 상가를 다수의 작은 가게로 촘촘히 배열해 밀도를 높였다. 고층 건물 옆을 걸으며 여러 가게를 연이어 구경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마루빌딩 내부 쇼핑몰 로비


천정이 높은 로비, 크고 넓은 건물 내부가 주는 여유로움이 가히 인상적이다. 건물 내 오픈 스페이스 갤러리, 공동 휴식 공간, 예술품, 홍보 포스터 등이 도시적이고 현대적 감각을 어필한다.


나카도리의 골목길 마루노우치 브릭스퀘어


우연성도 다양한 방법으로 구현했다. 가장 눈에 띄는 혁신은 조화를 이루는 건축물의 다양성이다. 새로운 고층 건물을 지었지만 곳곳에 근대 건물을 보존했고, 대로변 한 자락에 골목상권 '마루노우치 브릭스퀘어'를 조성했다. 조각과 디자인으로 신규 건물의 근대성이 돋보인다. 신구 건축물의 공존은 묘한 도시 분위기를 자아낸다.


넷째, 뉴욕 맨해튼 테마가 결정적이었다.


미츠비시지쇼가 선택한 마루노우치 재개발 사업의 이름은 바로 '맨해튼 프로젝트'다. 일본 정부는 1980년 이전 지진을 우려해 마루노우치 건물의 고도를 31미터로 제한했다. 규제가 완화되고 내진 설계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도쿄에 마루노우치 건축가들은 세계 중심부 뉴욕 맨해튼의 스카이라인과 문화를 재현해냈다.


나카도리 곳곳에 들어선 뉴욕 브랜드 가게들


나아가, 딘앤델루카(Dean & Deluca), 브룩스브라더스(Brooks Brothers), 케이트스페이드(Kate Spade) 등 초기부터 뉴욕 브랜드를 적극적으로 유치해 뉴욕 느낌을 연출했다.




도심재생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미츠비시


20년 가까이 마루노우치 재개발을 주도한 기관은 미츠비시 그룹이다. 자회사 미츠비시지쇼를 통해 마루노우치 건물 30%(약 100개 건물 중 30여개)를 소유하고 있다. 도쿄-미츠비시-UFJ 은행, 메이지야스다생명보험, 미츠비시 상사, 미츠비시 전기 등 미츠비시 그룹의 주요 계열사도 본사를 마루노우치에 두고 있다.


미츠비시의 마루노우치 역사는 메이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도 시대 귀족들의 거주지였던 마루노우치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육군의 병영으로 사용됐다. 1890년 미츠비시 그룹이 이 땅을 매입, 도쿄의 중심 비즈니스 지역으로 개발했다. 미츠비시가 이 지역 건물을 붉은 벽돌의 영국 양식으로 건축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지역을 '런던 타운(London Town)'이라 불렀다.


메이지 시대 '런던 타운'의 모습을 그린 벽화


1980년대 말 거품경제의 붕괴로 일본 경제 중심지 마루노우치 지역은 공동화 위기에 처하게 됐다. 1990년대 후반 미츠비시 그룹은 10여 년간 침체에 빠졌던 마루노우치의 재개발을 시작했다. 마루노우치 재개발의 추진 동력은,


한 기업이 오랫동안 꾸준히 특정 지역을 개발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서울대 박철희 교수에 따르면 "정치인이 치적 세우려고 시작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시작한 사업이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해당 지역에 부동산을 많이 갖고 있는 대기업이 자기네 건물뿐 아니라 주변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청사진을 만들고, ‘이렇게 고치면 모두가 경제적으로 이익을 본다’고 주변을 설득했다."  


미츠비시 장기 투자의 효과는 상권 관리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미츠비시는 상가를 개발해 분양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건물주로 남아 임대사업을 펼쳤다. 매력적인 브랜드를 유치하고 상점 포트폴리오를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진정한 의미의 디벨로퍼(Developer) 역할을 수행했다.  





일본 정부의 꾸준한 재개발 사업 지원


정부의 든든하고 변함없는 도심재생 노력도 주요했다. 2000년 일본 정부는 공중권이란 개념을 도입해 고층 건물 건축을 장려했다. 선우정 조선일보 기자가 설명한 바와 같이 "공중권이란 어떤 건물이 사용하지 않은 용적률(대지 면적에 대한 건물 연면적의 비율)을 남에게 팔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마루노우치 지역의 규정 용적률은 1,300%으로, 2007년 4월 문을 연 신마루비루는 도쿄역의 미사용 용적률 500%를 사들여 자신의 용적률을 1,800%로 확대했다."


2001년 취임한 고이즈미 준히치로 수상은 적극적인 수도권 투자로 거품경제 붕괴에 따른 경기와 부동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이즈미 정부의 노력으로 2000년대 도쿄는 도쿄역, 롯폰기, 아카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재개발 사업을 펼쳤다.


도심 재개발을 통한 경기 활성화 노력은 아베 신조 정부에서도 이어졌다. 현재 일본 정부는 2020년 도쿄올림픽을 맞아 마루노우치, 신주쿠, 시부야, 간다 등 도쿄 주요 부도심 전역에서 대규모 오피스 빌딩과 쇼핑센터를 건설하는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마루노우치 재개발 사업의 양면성


아직 일부 남아있는 무라쿠초 선술집들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대기업 미츠비시지쇼가 선두 지위했던 마루노우치 재생 사업을 완벽하다고 평가하기엔 이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마루노우치 재개발 사업의 아쉬운 점을 설명하자면,


첫째, 마루노우치 재개발로 서민들의 정겨운 저녁 문화가 제거됐다. 마루노우치 지역과 긴자 사이에 있던 전통적인 샐러리맨 유흥가 유라쿠초의 옛 모습을 더 이상 찾기 어렵다. 유라쿠초 지역은 철길을 중심으로 1991년까지 마루노우치에 위치했던 도쿄도청의 공무원들이 퇴근 후 즐겨 찾던 음식점과 술집이 많았던 곳이었다.


빌딩 숲에 둘러 쌓여 있는 도쿄역사


둘째, 도쿄역 주변을 미학적으로 개발했다고 평가하기도 어렵다. 우정국 건물이었던 쇼핑몰 키테(KITTE)의 옥상 정원에서 내려다본 도쿄역은 고층 빌딩에 둘러 싸여 위축된 모습이었다. 도쿄역을 압도하는 빌딩 숲은 더 이상 쇼핑거리를 거닐 때에 느꼈던 편안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과연 도쿄의 랜드마크이자 대표적 근대 건축 유산인 도쿄역사의 주변을 빌딩 숲으로 만든 것이 도시재생의 올바른 방향일까?  


셋째, 무엇보다 마루노우치와 나카도리 상가의 미래가 불투명하다. 전 세계적으로 다운타운 상가의 성장이 눈에 띄게 둔화되고 있다. 뉴욕의 5번가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랄프로렌 등 많은 명품 패션 브랜드들이 고임대료의 5번가에서 플래그쉽 가게를 폐쇄하는 추세다.


온라인 쇼핑몰만이 뉴욕 5번가의 명품 가게를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뉴욕 골목상권 곳곳에 개성과 개인맞춤서비스로 경쟁하는 소규모 부티크 가게들이 늘어나고 있다. 전통적으로 명성과 배타성에 의존해온 다운타운의 고급 상점들이 기술 발전과 가치의 변화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넷째, 대규모 상업시설의 개발이 새로운 산업과 고용의 창출로 이어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마루노우치 지역에 본사를 둔 기업은 예나 지금이나 미츠비시 그룹 계열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직 일본의 창조산업이 마루노우치 지역의 매력을 쫓아 이 지역으로 모인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이들이 모이는 지역이 있다면 그곳은 매력적인 청년 문화로 젊은 창업가들을 유치하는 시부야 지역이다.


장기적인 위협 요인을 고려할 때 마루노우치 개발은 진행형 프로젝트로 평가하는 것이 맞다. 일본 경제가 본격적으로 회복하고 있고 정부가 2020년 올림픽 준비를 위해 마루노우치를 포함한 도심 지역에 대규모 도시인프라 투자를 계획하고 있기 때문에 마루노우치의 지역 경제는 당분간 성장세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나카도리 거리 디자인에 대한 평가는 별개다. 다수의 디자인상을 수여한 건축계뿐 아니라 OECD와 같은 국제기구도 나카도리 사업을 다른 도시가 벤치마크 할 수 있는 도시 재생 모델로 인정한다.


 나카도리는 잃어버린 20년을 극복하고자 하는 일본 정부의 강한 의지와 지역 개발에 대한 대기업의 집념이 결합해 만들어낸 역작이다.




출처: 골목길 자본론, 다산북스, 2017

매거진의 이전글 도시 살리기가 대학의 일이 됐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