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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경제학자 Jun 30. 2020

대덕,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되려면

대덕연구단지는 도시 전체가 역사적인 장소다. 대전 예술의 전당에서 한밭수목원, 엑스포다리, 엑스포공원을 지나 카이스트(KAIST)에 이르는 길을 지나다 보면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전경이 펼쳐진다. 연구단지의 환경과 시설은 과학기술 강국을 염원하는 우리 국민이 준 선물이다.


그 많은 유산 중에서도 연구단지의 미래를 가장 잘 상징하는 장소는 카이스트 캠퍼스에 위치한 터만홀이다.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탠포드 공대학장 프레데릭 터만 교수를 기리기 위해 KAIST는 2004년 이 강당을 건축했다. 터만 교수는 '실리콘밸리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KAIST의 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1970년 한국 정부 요청으로 카이스트의 청사진을 제시한 ‘터만 보고서’를 작성하고, 이후 5년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방한하며 학교 설립을 지원했다. 


'실리콘밸리의 아버지'가 설계한 만큼 KAIST와 대덕연구단지도 실리콘밸리처럼 되길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 꿈이 이루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일단 인프라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실리콘밸리에 스탠퍼드 대학이 있듯 연구단지에는 KAIST가 있고, 실리콘밸리에 방위산업 연구개발 시설이 모여 있었던 것처럼 연구단지에도 다수의 정부 출연 연구기관과 기업 연구소가 입주해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건 연구단지 자체가 펄펄 끓는 창업혁신생태계로 거듭나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대표적 벤처투자자 폴 그레이엄(Y컴비네이터 공동창업자)은 새로운 실리콘밸리 건설이 이론적으로 아주 간단하다고 말한다. 실리콘밸리 엔지니어와 벤처 투자가 만 명만 다른 도시로 이주시키면, 그 도시가 실리콘밸리가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엔지니어와 벤처투자자 모두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도시가 매우 드물다는 점이다. 엔지니어는 뉴욕, LA, 마이애미 등 화려한 도시를 좋아하지 않고, 부유한 벤처투자자는 이타카, 매디슨, 피츠버그 등 엔지니어를 많이 배출한 대학 도시를 지루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실리콘밸리, 활기 넘치는 창업도시가 되려면, 부자와 공부벌레 모두가 좋아하는 특별한 도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도시는 미국에서도 흔치 않아서, 실리콘밸리, 오스틴, 시애틀 등 미국 서부에 위치한 소수의 도시만이 위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 이들 도시는 어떻게 부자와 공부벌레 모두를 매료시켰을까? 


물론 좋은 기후조건과 자연환경도 있지만, 필자가 주목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문화다. 미국 동부와 달리 서부 실리콘밸리에서는 ‘귀족문화’를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실리콘밸리의 ‘격식 없는 문화’는 캘리포니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캘리포니아 사람은 개방적이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하다. 동부를 떠나 캘리포니아를 개척한 사람 자체가 원래 그런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후 기존의 권위와 격식을 거부하고 개인주의적이며 자유로운 문화를 뿌리내렸다. 독특한 문화 덕분에 캘리포니아는 부자와 엔지니어 간의 장벽을 허물고 함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성공했다. 


격식 없는 문화는 창업 과정에서도 중요하다. 혁신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이 자유롭게 협력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이, 성별, 종교, 직위에 따라 상하관계, 우열관계, 위계질서를 만드는 사회에서 자유로운 협력이 가능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탄생과 성장이 가능했던 또 한 가지 핵심요인은 역시 스탠퍼드 대학이다. 스탠퍼드는 실리콘밸리가 필요로 하는 중요한 기술을 개발하고 첨단 기술 인력을 교육했다. 실리콘밸리 자체가 원래 스탠퍼드 캠퍼스 안 연구단지에서 시작돼 새너제이 방향으로 퍼진 것이기도 하다. 프레드 터만 교수는 1951년 스탠퍼드 공대 학장에 취임한 이후, 대학의 드넓은 땅을 첨단 산업 기업에 임대하는 방식으로 지역 기업을 유치하고 이를 통해 대학과 기업이 공조하는 창업 시스템을 개발하고 지원했다.


휴렛팩커드, 리턴인더스트리 등 터만 학장이 후원한 수많은 기업은 실리콘밸리의 모태가 됐고, 이후로도 실리콘밸리는 터만 학장이 건설한 스탠퍼드 연구단지를 중심으로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그래서 터만 학장을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다.


스탠퍼드를 보면 KAIST가 대덕연구단지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스탠퍼드 대학과 터만 학장이 실리콘밸리를 개척했듯, KAIST와 그 지도자 역시 연구단지에 창업혁신생태계가 뿌리내리도록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KAIST는 이미 학생 창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학기마다 열리는 ‘기업가 정신과 특허’ 강의는 학생들로부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또 창업 문턱을 낮추고 창업 전 주기를 지원하기 위한 ‘스타트업 KAIST’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학과별/부서별로 분산돼 있던 창업 지원 프로그램을 통합했다. 최근에는 창업 석사 과정도 개설하는 등, 학생 창업 촉진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앞으로 KAIST가 더 노력해야 하는 분야는 청년문화 중심의 도시문화를 조성하고 재생하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디자인 관련 시설, 문화 시설과 복합문화공간을 캠퍼스 주변에 유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골목상권을 살림으로써 연구단지가 청년문화의 중심지로 거듭하는 데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또한 교양수업과 창업 교육과정 활성화를 통해 KAIST와 대덕연구단지에 ‘격식 없는 문화’가 자리 잡도록 앞장서야 한다.


대덕연구단지를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만들 수 있는 주체는 연구단지의 중심 기관인 KAIST뿐이다. 생활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중앙정부는 혁신생태계가 요구하는 문화와 생활인프라를 조성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외부로부터 물리적 공급이 가능한 하드웨어와 달리 창조문화와 같은 소프트웨어는 현지에 살고 일하는 주민만이 가꾸고 키울 수 있는 자원이다. 정부가 혁신생태계 건설을 위한 권한과 자원을 KAIST에 이양하고, KAIST가 이를 자신의 사명으로 수임해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면, 대덕연구단지는 미국의 실리콘밸리 같은 혁신생태계로 거듭날 것이다.



출처: 라이프스타일 도시,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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